도연스님(道鍊, 1911生, 비구니)
도연(道鍊)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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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도연(道鍊) |
법호 | |
속명 | 김차임(金次任) |
출생 | 1911.02.22. |
출가 | 1951년 |
입적 | |
사찰 | 내원사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207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도연(道鍊)스님은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했으며, 일일부작 일일불식을 실천하여 승풍진작에 기여 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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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 경북 상주 출생 |
1951 | 경주 보리사에서 수옥(守玉)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2 |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마산 멸빈암에서 수행 | |
정화 당시 조계사에서 단식 등 한국불교정화운동에 참여 | |
1974 | 부산 범어사 대성암, 문경 대승사 윤필암, 대구 동화사 부도암, 문경 김룡사 등 선원 안거 성만 |
2004 | 양산 내원사 주석 |
문중 | 삼현(三賢)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화용(和龍)·진성(眞晟)·천공·진현(眞現)·진홍·성묵(性默)·법우(法雨)·상우(箱穻)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法喜, 8)→수옥(守玉, 9)→도연(道鍊, 10)→보학(寶鶴, 11), 화룡(和龍, 11), 진성(眞晟, 11), 청공(靑㫒, 11), 진현(眞現, 11), 성묵(性黙, 11), 혜오(慧晤, 11), 진홍(眞弘, 11), 상우(箱釪, 11) |
활동 및 공헌
출가
도연(道鍊)스님은 1911년 2월 22일 경북 상주군 함창면 신흥리 307번지에서 아버지 김형진과 어머니 황보리심 보살 사이의 2남 4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영이며, 이름은 김차임이다.
출가 전부터 불심이 깊었던 스님은 월혜스님과 오스님이 윤필암에 계실 때 10여 년 가까이 윤필암에 다니며 신심을 다졌다. 절 집의 스님들을 보면 그저 흠모하는 마음이 들면서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 하루가 다르게 발심의 기운이 차오르던 스님은 더 이상 속가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출가하기로 결심을 하고 윤필암으로 입산했다.
윤필암에 머물던 스님은 되도록이면 속가 집에서 먼 곳으로 출가하기 위해 경주 보리사로 갔다. 그곳에서 수옥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1951년 41세의 늦은 나이로 출가득도하고, 이듬해에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불교정화운동 참여
사미니계를 받은 해 여름, 도연스님은 비구니스님들께서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던 마산 멸빈암에서 공양주를 살았다. 그곳에서 조석으로 능엄주와 108 대참회를 하며 본격적인 수행을 하다가 대성암 만성(萬性)스님 회상에 가게 되었다. 대성암에서 한동안 정진을 하다가 다시 윤필암으로 돌아갔는데, 서울 조계사에서 진행되고 있던 불교정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다.
6·25전쟁 직후 모든 것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 예닐곱 명의 스님들이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기차의 좁은 기관실에 몸을 싣고 힘들게 상경하여 조계사 앞에 당도했다. 섣달 추운 겨울 날, 비구니스님들은 가사장삼 차림으로 맨땅에 엎드렸다. 불교계의 정화를 바라는 비구니스님 들의 열정을 보여준 것이다.
정화운동시 단식 농성
단식 농성을 할 때 청담 큰스님은 참여 대중들에게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다른 대중들은 어느 정도 눈치를 봐가며 물을 마시기도 했는데, 강직하면서 한편 순진했던 스님은 큰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물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입에서 썩는 냄새가 났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그러다가는 죽는다. 몰래 물을 마셔야 한다.’며 물을 권했지만 스님은 끝내 마시지 않았다. 얼마 후 단식을 풀고 대중이 모두 죽을 먹기 시작했을 때,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스님은 두 숟가락도 넘기지 못했다.
생활 및 수행
정화를 주창하던 대중들이 모두 흩어진 뒤 이듬해 여름, 스님은 대구 동화사 묵노스님 아래에서 공부하다가 문경 대승사, 문경 김룡사에 가서 삼동 결제를 마친 후 양산 내원사로 갔다.
도연스님은 무착스님, 혜춘스님, 응민스님과 함께 양산 내원사에서 하안거를 마쳤다. 안거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스님은 보덕사에서 철을 나고 오시던 은사 수옥스님을 만났다. 수옥스님은 내려오는 스님들을 보고 “절이 비었으니 모두 다 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리하여 나머지 스님들은 떠나고 스님만 남아 은사스님을 모시고 내원사로 들어갔다.
도연스님은 은사스님을 깊이 신뢰했고, 그 믿음은 신심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어 공양주[1], 채공[2], 원주[3], 별좌[4]를 혼자서 전부 맡아 보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생활했다.
논농사, 소작을 직영으로
당시 양산 내원사는 사찰 소유의 논 100여 마지기(약6만6천㎡)를 갖고 있었는데, 모두 소작을 주고 있었다. 거기에서 나오는 소작료라야 겨우 쌀 네 말 정도이다 보니, 20~30명의 대중이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정월만 지나면 양식이 떨어져 배곯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은사스님은 소작을 모두 거두어 들여 직접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셨고, 대중을 모아 놓고 ‘후래 중생이 걸망을 벗어 놓고 공부할 곳은 이곳밖에 없으니 다 함께 농사를 지어 생활하자.’는 법문을 하셨다. 그러자 고생하는 게 염려스러웠는지 많은 스님들이 절을 떠나고 겨우 8명만 남았다.
하지만 은사스님은 좌절하지 않고 손수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각진스님과 함께 꼬박 두 달 동안 보리를 베고 모를 심었다. 한번은 못자리를 하려고 봇물을 대는데 소작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삽으로 모조리 퍼내며 횡포를 부렸다. 그 와중에 은사스님은 다리를 다쳤으나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고 절룩거리며 일을 하셨다. 은사스님은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갈무리까지 무사히 끝냈다. 그러자 다시 대중이 모였다고 한다.
생활 및 수행
양산 내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로서 수려한 산수와 6Km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제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천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1300여 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도연스님은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만성스님이 계실 때 그곳에서 안거를 여러 철을 지냈으며, 본공(本空)스님이 대구 동학사 부도암에서 입승[5]을 맡고 계실 때 몇 철 안거를 나면서 유마거사, 방거사 등에 관한 효봉 큰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그때 들은 법문 가운데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과 방거사의 가족이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 등을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할 정도로 큰스님의 법문은 너무나도 감명 깊었다.
한번은 본공스님, 선경스님, 선행스님 등과 함께 순천 선암사에 머물렀는데, 당시 명성(眀星)스님이 선암사 강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러나 순천 선암사에 머무는 동안 비구승과 대처승의 싸움이 심해 오래 있지 못하고 나와 남해 도솔암으로 가서 여름 한 철을 지내고, 다시 내원사로 와서 삼동에는 기장 월내 묘관음사 향곡 큰스님 밑에서 지냈다. 당시 월내 묘관음사에는 진제 큰스님께서 입승으로 계셨고, 사부대중이 다 함께 정진했다.
도연스님은 승가사에서 몇 안거를 나고, 김룡사에서 안거를 나는 등 여러 선방을 두루 다닌 후 현재까지 양산 내원사에서 수행하고 있다.
“늙으면 추해지니 젊을 때 열심히 정진해라.”
스님은 세수 90세를 전후하여 여러 해 동안 산문 밖을 나서지 못할 만큼 건강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법당에 갈 수 없을 때에는 방에서라도 법당을 향해 예불을 했고, 사시에는 꼭 큰방에 가서 발우 공양을 하며, 항상 『지장경』을 독송했다.
“늙으면 추해지니 젊을 때 열심히 정진해라.” 하며 상좌들에게 공부할 것을 강조하는 도연스님은 상좌들이 절에 모셔 가고 싶어 해도 대중에서 살지 않으면 중노릇이 아닌 걸로 생각하는 보배 같은 스님이다.
2004년 내원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도연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화용(和龍)·진성(眞晟)·천공·진현(眞現)·진홍·성묵(性默)·법우(法雨)·상우(箱穻)스님 등이 있다.
양산 내원사
내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로써 수려한 산수와 6Km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제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천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300여 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성사께서 창건하신 절이다.
1898년 석담유성(石潭有性) 선사가 설우(雪牛), 퇴운(退雲), 완해(玩海) 등과 더불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절 이름을 내원사로 개칭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 명명한 후 선찰로써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경허선사의 법제자인 혜월선사께서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운봉, 향곡선사 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을 잇는 명안종사를 배출한 도량이다.
6ㆍ25사변으로 사원이 전소되자, 비구니 수옥스님의 원력으로 10년 만에 독립된 비구니 선원으로써 새롭게 중창되었다. 그 후 만공스님의 법제자인 법희, 선경스님등 납자들의 정진처가 되었다. 1979년 도용스님을 입승으로 모시고 18명의 스님들이 모여 삼년결사를 시작한 이후 1999년 여섯 번째 회향을 하였고 지금도 비구니 선객의 정진도량으로 선불장이 되고 있다.
- 원효대사와 비구니 수옥 스님의 이야기 *
1,300여 년 전 원효대사는 중국 태화사(太和寺)에서 건너온 1천 명의 대중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들어와 대둔사(大屯寺)와 89개의 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의 암자 가운데 상ㆍ중ㆍ하 내원암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발생한 큰 수해로 대둔사와 89암자 대부분이 유실되고 하내원암만 남아,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내원사로 법등을 잇게 된 것이다. 한말에는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는 선찰(禪刹)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6.25로 소실되고 말았는데, 오늘날의 내원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시기에 이룩한 비구니 수옥(守玉) 스님의 업적이다. 스님은 어려운 시절에 전쟁으로 폐허화된 내원사를 중건하고 단절된 선원을 복원하여, 오늘날 명실공히 내원사를 비구니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일구어낸 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원으로서 내원사는 근대 경허(鏡虛) 스님의 법제자인 혜월(慧月) 선사가 조실로 주석하며 운봉(雲峰)ㆍ향곡(香谷)ㆍ명안(明眼) 선사 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禪脈)을 잇는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수행도량으로서의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도 ‘동국제일선원’으로서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으며, 눈 푸른 선승들의 수행공간 구실도 아울러 담당하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53~159.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86.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391, 394, 395.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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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道鍊)스님 | 본항목 | 도연스님(道鍊, 1911~) | 道鍊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도연스님(道鍊,_191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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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스님(道鍊) | 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
도연스님(道鍊) | 수옥스님(守玉) | ~의 수계제자이다 | |
도연스님(道鍊) | 경주 보리사 | ~에서 출가하다 | |
도연스님(道鍊)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도연스님(道鍊)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도연스님(道鍊)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범어사 대성암, 문경 대승사 윤필암, 대구 동화사 부도암(도학동), 문경 김룡사 등 |
지도
- 내원사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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