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스님(昭林, 1937生, 비구니)
소림(昭林)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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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소림(昭林) |
법호 | |
속명 | 이은숙(李銀淑) |
출생 | 1937.01.12. |
출가 | 1949년 |
입적 | |
사찰 | 수덕사 견성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소림(昭淋)스님은 사찰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중스님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헌신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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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 충남 공주 출생 |
1949 | 수덕사 견성암에서 상정(常淨)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0 | 수덕사에서 춘성(春城)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수옥스님으로부터 『치문』 수료, 침허스님으로부터 사집 수료, 고봉스님으로부터 사교 수료 | |
1955~1966 | 수덕사 견성암에서 안거 성만 |
1968 | 수덕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69~1975 | 울진 불영사 총무 |
1985~1995 | 견성암 입승, 재무, 도감 등 역임 |
2006 | 견성암 선원장 |
2019 | 명사법계 품수 |
문중 | 실상(實相)문중 |
생활신조 | 정진을 열심히 하자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혜인(慧印)·혜성(惠星)·정엽(靜葉)·오성(悟星)·송파(松坡)·지융(知融)·일선(一禪)·효원(曉圓)·효현(曉玄)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실상(實相, 1)→순동(順同, 2)→의선(義善, 3)→상정(常淨, 4)→소림(昭林, 5)→혜인(慧印, 6), 혜성(惠星, 6), 정엽(靜葉, 6), 오성(悟星, 6), 송파(松坡, 6), 지융(知融, 6), 일선(一禪, 6), 효원(曉圓, 6), 효현(曉玄, 6), 원성(圓性, 6) |
활동 및 공헌
출가
소림(昭林)스님은 1937년 1월 12일 충남 공주군 사곡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은숙이다. 스님은 1949년 13세에 견성암에서 상정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귀의했다.
수학
스님이 14세 되던 해, 지선스님께 초심을 배울 때의 일이다. 경 읽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했던 스님은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책을 몰래 감추어 선방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숲을 찾아 큰 목소리로 몇 번씩 읽곤 했다.
18세 때에는 비구니 3대 강백 중 한 분인 수옥스님께 『치문』을 배우고, 침허스님께 사집을 수료했다. 또한 정혜사에서 강고봉 큰스님께 사교를 공부했다. 유난히 경전 보기를 즐겼던 소림스님을 어른스님들은 문중을 떠나 모두가 아낌없는 격려와 지도를 해주셨다. 유난히도 겁이 많아 밤에 정랑(화장실) 가기를 무서워하다 보니 정랑을 가야 할 때면 부득이 성노스님이 따라가주곤 하셨다.
수행
아주 어려운 시기에 학인생활을 했던 터라 스님은 대중스님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번은 스님이 대중스님들의 기도 회향 시기에 두부 공양이라도 올릴 마음으로 마을에 콩 탁발을 나갔다. 며칠 동안 돌아다닌 끝에 탁발한 것을 전부 모아보니 두어 말 남짓 되었다. 스님은 탁발한 콩으로 정성껏 두부를 만들어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선방으로 출가하여 선객스님들을 보면서 신심을 다진 소림스님은 불영사 총무 소임 이후 1966년부터 3년 동안 동해 관음암 토굴로 들어가 일념으로 수행했다.
1983년부터 제방 선원을 다니면서 수선 안거를 한 스님은 1985년부터 현재까지 수덕사 견성암에 머물며 정진 중이다. 그동안 스님은 견성암에서 입승, 재무, 도감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자성참구에 혼신을 바쳐 왔다. 스님은 2019년 비구니 스님에 대한 최고 지위인 명사법계를 품수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인(慧印)·혜성(惠星)·정엽(靜葉)·오성(悟星)·송파(松坡)·지융(知融)·일선(一禪)·효원(曉圓)·효현(曉玄)스님 등이 있다.
수덕사 견성암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회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회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척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71~7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03.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430, 43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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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昭林)스님 | 본항목 | 소림스님(昭林, 1937~) | 昭林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소림스님(昭林,_1937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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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스님(昭林) | 실상문중(實相) | ~의 일원이다 | |
소림스님(昭林) | 상정스님(常淨) | ~의 수계제자이다 | |
소림스님(昭林)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 | |
소림스님(昭林) | 춘성스님(春城)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소림스님(昭林) | 석암스님(昔巖)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소림스님(昭林) | 명사법계(明師法階) | ~을(를) 품수하다 | |
소림스님(昭林)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 |
지도
-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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