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창수스님(昌守, 1842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7일 (화) 17:02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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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창수스님(昌守)은 사형인 정기(正基)스님과 협력하여 청룡사 중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42 한성 출생
1881 청룡사(숭인동)에서 계흔(桂昕)스님을 은사로 출가
1902 정기(正基)스님과 협력하여 청룡사 중수
1910 청룡사에서 입적(세수 69세, 법랍 29세)

※ 임종시(臨終時) 편와 수북향(首北向) 안서향(顔西向) 하였음.

문중 법기문중(法起)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금전(錦典)상근(祥根)・보현(普賢)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충휴(2)→처금(處金, 3)→등확(登彉, 4)→계흔(桂昕, 5)→창수(昌守, 6)→금전(錦典, 7), 상근(祥根, 7), 금하(錦河, 7)

활동 및 공헌

출가

창수스님은 1842년(현종 8년) 한성 연못골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충주 김씨이다. 일찌기 남양 홍영일 씨에게 시집 가서 슬하에 두 아들 준택, 기범과 두 딸 금전, 상근을 두었다. 평소 신심이 돈독하여 출가 전에도 재가신도로서 항상 부처님 앞에 나아가 마음 닦는 공부에 열중하던 스님은 1881년(고종 18년)에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발심하였다. 스님은 가족회의를 열고 자신의 뜻을 밝혀, 마침내 청룡사에서 계흔(桂肵)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은사이신 계흔스님은 청룡사에서 등확(登彉)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많은 사찰에 경전 강의와 법문을 하셨다. 계흔스님은 1889년 3월 9일 청룡사에서 법랍 71세로 입적하였다.

두 딸의 은사스님 되다

창수스님이 출가하던 해 여름, 장녀 금전이 창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2년 뒤 가을에 차녀 상근 또한 창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 모녀가 함께 출가하여 사제지간이 되었다.

청룡사 중수

1902년(고종 6년) 창수스님은 세수 61세에 정기(正基)스님과 동심협력하여 회갑기념으로 청룡사 건물을 중수하였다.

입적

창수스님은 1910년 세수 69세, 법랍 29세로 청룡사에서 입적하였다. 입적시 편와 수북향 안서향(便臥 首北向 顔西向;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옆으로 누워서 얼굴을 서쪽을 향하게 하는 것)하였다.

수계제자

수계제자로는 금전(錦典)・상근(祥根)・보현(普賢)이 있다.

창수스님의 사형인 정기스님

계흔스님의 상좌이자 창수스님의 사형인 정기스님은 경기도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이다. 정기스님은 벽암법사(碧岩法師)가 “어떠한 경계를 보았는가?(見如何之境界)"라고 묻자. '서방정토마하반야바라밀다(指西方言 摩訶般若波羅蜜多)"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청룡사와 흥국사를 중창한 정기스님은 1923년 1월30일 법랍 78세로 청룡사에서 입적하였다.

※ 출처 : 남양홍씨세보, 충주김씨세보, 청룡사

『법기문중 세계도』6에 의하면 법기문중 청룡사 계열의 법맥은 처금-등확-계흔 대에 이르러 정기・창수・사용 등의 3명의 제자를 두면서 이들의 후손들에 의해 문중의 번성을 보기 시작했다. 청룡사 계열 6대손인 이들 3인 중 특히 창수에게 사사받은 제7대손인 금전・상근・금하의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오늘날 청룡사 계열의 문도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 출처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56.

청룡사

[청룡사]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171

청룡사(靑龍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현재 숭인동)에 위치한 절로,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의 유언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사찰은 한양의 외청룡 산등성이에 지어져서 ‘청룡사’라 불렸지만, 그 건립 연혁에 관해서는 정확히 전해지는 것이 없다.

제1세 주지로 혜원(慧圓)이 절을 맡은 이래로, 줄곧 비구니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예로 조선 건국 이후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이 절에 있었다거나, 1차 왕자의 난 뒤에는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세조 때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곳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았다고도 한다. 영조대의 이 기록들은 모두 정업원(淨業院)과 관련한 내용으로 청룡사의 전신을 정업원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남긴다.

청룡사의 존치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서이다. 청룡사에는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석지장삼존상 및 시왕상일괄(보물 제1821호)이 있는데, 이를 통해 청룡사의 정확한 존치 시기를 조선 중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보물 외에도 1868년(고종 5)에 제작되어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칠성도(七星圖), 현왕도(現王圖)가 있으며, 1898년(광무 2)에 제작된 감로도(甘露圖), 1902년에 제작된 신중도(神衆圖), 가사도(袈裟圖), 석조삼불상(石造三佛像)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숭인동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청룡사는 대부분의 전각이 최근에 새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각 배치는 조선 중기 사찰의 전형적인 구성인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의 배치이다. 산지중정형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후면에 중심 불전을, 좌우에 승려들이 기거하거나 대중을 받는 요사(寮舍)를, 전면에 사찰로 진입하는 입구가 되면서 법회 등을 여는 우화루(雨花樓)를 배치하는 형식이다.

청룡사는 우화루 우측에 다포형식의 일주문(一柱門)을 두어 사찰 안으로 진입하도록 했지만,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주보는 곳에 우화루를 두고, 좌우에 심검당과 명부전을 배치하여 조선 중기 산지사찰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대웅전 뒤쪽 약간 높은 곳에 산신을 모신 산령각을 둔 것은 다른 사찰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 출처 : 청룡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4132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58~59.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56, 355.
  • 남양홍씨세보, 충주김씨세보, 청룡사
  • 청룡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413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창수(昌守)스님 본항목 창수스님(昌守, 1842~1910) 昌守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창수스님(昌守,_184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창수스님(昌守)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창수스님(昌守) 계흔스님(桂昕) ~의 수계제자이다
창수스님(昌守) 서울 청룡사 ~에서 출가하다
창수스님(昌守) 서울 청룡사 ~을(를) 중창하다

지도

  • 청룡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동망산길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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