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스님(盈圓, 1949生, 비구니)
영원(盈圓)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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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영원(盈圓) |
법호 | |
속명 | 박문자(朴文子) |
출생 | 1949.05.27. |
출가 | 1957년 |
입적 | |
사찰 | 옥련암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1139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영원(盈圓)스님은 월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청도 옥련암을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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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대구 출생 |
1579 | 운문사 청신암에서 월명(月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8~1966 | 청도 백련암에서 수행 |
1966 |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0~1973 | 운문사 강원 치문, 화엄경 수학 |
1972~2004 | 청도 옥련암 주석 |
1973 |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93~199 | 옥련암 법당 중창 |
2004 | 옥련암 주석 |
문중 | 계민(戒珉)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승헌(承憲)・지홍(智弘)・주호(宙昊)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도장(10)→계운(桂雲, 11)→성림(成林, 12)→월명(月明, 13)→영원(盈圓, 14)→승헌(乘憲, 15), 지홍(智弘, 15), 주호(宙昊, 15) |
활동 및 공헌
출가
영원(盈圓)스님은 1949년 5월 27일 대구시 중구 대신동에서 아버지 박일윤과 어머니 이복순 사이의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문자이다. 1957년 9세 되던 해 스님의 가정 형편이 원만치 못하여 고모가 알고 지내는 스님이 있는 운문사 청신암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월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세상 속에 휩쓸리면 제대로 된 스님이 되지 못한다.'는 어른들의 노파심 때문에 학교 공부를 더 이상 지속하지 못했다.
백련암에서 지내다
그 뒤 영원스님은 청신암에서 노스님과 은사스님 을 모시고 생활하던 중 6·25전쟁 때 아버지의 사상 (공산주의)이 문제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청신암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때 고모들은 스님과 함께 청신암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생활이 어려워 고모들은 속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혼자 남게 된 스님은 마을에 셋방을 얻어서 1년 동안 생활하다가 집터도 없는 산에 터를 닦아 초가집으로 백련암을 지어서 들어갔다. 가을에는 볏단으로 지붕을 이어서 생활하였다.
스님은 18세 되던 1966년 3월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다음 백련암에서 노스님과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21세 되던 해인 1970년 운문사 강원에 들어가 치문을 배우다가 장질부사를 앓게 되어 강원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병이 완치 되자 스님은 강원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은사스님께서 위암을 앓으셔서 은사스님 시봉을 하며 강원공부를 미루었다.
은사 월명스님
은사스님이신 월명스님은 평소 부지런하고 기도를 잘 하셨다. 예불과 도량석은 물론 효심이 깊어 상노스님이신 계운스님이 중풍으로 10년을 앓을 때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끼니마다 누룽지를 해서 올렸다. 6·25전쟁 당시 노스님은 중풍이 드신 상노스님을 손수 업고 나올 만큼 은사스님에 대한 효성과 정성이 지극하셨다.
수학
은사스님은 1973년 12월 15일 옥련암에서 세수 51세, 법랍 20세로 입적하셨다. 그리하여 스님은 다시 운문사 강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옥련암이 운문사와 가까이 있고 사찰의 여러 가지 일에 스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치문을 배운 후에 인연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화엄경만 배웠다.
처음 치문을 배울 때 강주스님은 묘엄스님이셨고, 학인은 150여 명이었다. 화엄경을 배울 때는 강주스님이 명성스님이셨고, 200여 명의 많은 학인이 도량을 가득 채웠다. 1972년 강원을 졸업하고, 25세 되던 1973년 봄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그 후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어려운 아이들 7명을 키웠는데, 훗날 그 중 2명이 출가를 하여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는 제자가 되었다.
옥련암 창건
1972년 성림 노스님이 60세 때의 일이다. 원래 백련암 터는 박씨 문중의 땅이라 양식 2말을 세로 주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20가마니를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1972년 현재의 옥련암으로 옮겨 왔다. 옥련암은 당시 3마지기 정도의 밭에 불과했다. 노스님이 손수 터를 닦아 백련암 12평 법당을 그대로 떠서 옮기고, 초가 요사도 떠서 옮겨 지붕을 기와로 바꾸셨다.
현재 옥련암 법당은 1993년에 다시 불사를 하였고, 생활을 하던 요사는 태풍에 기울어 1996년에 급하게 새로 지었다. 요사와 법당 주변으로 사찰 소유의 땅 1,000여 평이 있는데, 그동안 땅 문제로 어려운 일이 많아서 주변의 땅을 사들인 것이다.
옥련암에서 수행 정진 중인 영원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승헌(承憲)・지홍(智弘)・주호(宙昊)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26~529.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30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5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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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盈圓)스님 | 본항목 | 영원스님(盈圓, 1949~) | 盈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영원스님(盈圓,_194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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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스님(盈圓)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영원스님(盈圓) | 월명스님(月明) | ~의 수계제자이다 | |
영원스님(盈圓) | 운문사 청신암 | ~에서 출가하다 | |
영원스님(盈圓)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영원스님(盈圓)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영원스님(盈圓) | 청도 옥련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영원스님(盈圓) | 청도 옥련암 | ~을(를) 창건하다 |
지도
- 옥련암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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