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선암사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5월 9일 (목) 22: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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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명 : 순천 선암사(仙巖寺),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 주소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802


순천 선암사는 2009년 12월에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542년(진흥왕 3)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처음으로 개창하여 비로암(毘盧庵)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개의 암사(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따라 도선이 세 암자를 창건하였는데, 곧 선암(仙巖)·운암(雲巖)·용암(龍巖)이 그것이라고 했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되는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088년(선종 5) 의천(義天)이 중창하였으며 선암사에 의천의 영정이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석종(石鍾)·철불(鐵佛)·보탑(寶塔)·부도(浮屠)·문수전(文殊殿)·조계문(曹溪門)·청치(圊廁) 등은 다행히 화를 면하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병화에 소실되었다. 정유재란에 불타기 이전의 선암사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에 명부전(冥府殿)·약사전(藥師殿)·적연당(寂然堂)·명경당(明鏡堂)·대장전(大藏殿)·청운당(靑雲堂)·백운당(白雲堂)·배면당(背面堂)·독락당(獨樂堂) 등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미타전(彌陀殿)·무집당(霧集堂)·영풍루(迎風樓)·천장전(天藏殿)·지장전(地藏殿)·문수전·보현전(普賢殿)·용화당(龍華堂)·만월당(滿月堂)·반선각(伴仙閣)·제운료(際雲寮)·낙성료(落星寮)·서하당(栖霞堂)·성행당(省行堂)·탕자방(湯子房)·청치 등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정문·종각·대루(大樓)·조계문 등이, 그리고 그 뒤쪽에는 첨성각(瞻星閣)·국사전(國師殿)·오십전(五十殿)·응진당(應眞堂)·팔상전(八相殿)·원통전(圓通殿)·능인전(能仁殿)·원명각(圓明閣)·성적당(惺寂堂)·진의각(眞疑閣)·활연당(豁然堂)·적조당(寂照堂)·심주각(尋珠閣)·완월당(玩月堂) 등이 있었다. 1660년(현종 1)에 경준(敬俊)·경잠(敬岑)·문정(文正) 등 세 대덕이 중건하였고, 그 뒤에 침굉(枕肱)이 많은 당우(堂宇)들을 보수하였다.
특히 침굉은 선암사에서의 규범을 엄하게 하였다. 해마다 제석(除夕)이면 승려들이 동서로 패를 나누어 술을 마시며 노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하고 염불로써 밤을 새우도록 승려들의 금계(禁戒)를 엄하게 하였던 것이다. 침굉의 문인에는 호암(護岩)과 치현(致玄)이 있었다.
특히 호암은 『법화경』을 염송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으며, 사찰의 중수에 부지런하였다. 1699년(숙종 25)을 전후한 시기에 원통각(圓通閣)·약선궁(若仙宮)·대법당·오십전 등을 새로이 건설하고, 관음상 1구, 소상(塑像) 61구, 화상(畵像) 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1704년에는 호연(浩然)이 『선암사사적(仙巖寺事蹟)』을 썼다. 1819년(순조 19) 봄에 불이 나자 곧 상월(霜月)이 중건하였고, 1823년에 또 다시 불이 나자 그 이듬해에 해붕(海鵬)·눌암(訥庵)·월파(月波)가 대규모의 중수불사를 이룩하였다.
1911년 6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이 발표되고, 다시 같은 해 7월 8일 반포된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0본사가 정해질 때, 선암사 또한 30본사 중의 하나가 되어 승주군과 여수시·여천군의 말사를 통섭하였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순천 선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