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산사
- 사찰명 : 경주 감산사(甘山寺)
- 주소 :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경북 경주시 외동읍 앞등길 117-20)
감산사는 719년(성덕왕 18) 중아찬 김지성이 67세에 관직을 떠나면서 자신의 감산장전을 희사하여 아버지 인장 일길간과 어머니 관초리 부인의 명복을 빌고, 나아가 국왕과 그 일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했다. 창건 후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 1구를,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상 1구를 조성했는데, 미륵보살상이 감산사의 주불로 금당에 봉안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두 불상 광배 뒷면의 명문과 〈삼국유사〉 권3 탑상 남월산조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1915년 두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으며, 현재 절터는 전답으로 변해버리고 감산사지3층석탑 1기와 작은 불당 2채만이 있다. 관련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1962.12.20 지정). 상높이 183cm. 국보 제 82호로 현재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형광배와 고부조의 불신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8각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몸을 약간 왼쪽으로 비튼 삼굴(三屈)자세로 명상에 잠긴 듯한 얼굴과 어깨·가슴·팔 등이 통통하고 양감이 풍부해 약간 관능적인 느낌마저 풍긴다. 둥글고 네모난 이중의 목걸이, 가슴에서 대각선으로 겹쳐진 천의가 양팔뚝을 감았다가 밑으로 늘어진 모습, 허리부분에 겹쳐져서 구슬띠를 맨 상의 표현은 8세기 당(唐) 보살상에서 유행하는 특징이다.
이와 비교되는 중국의 보살상은 8세기초 장안 보경사에 있던 삼존불의 협시보살상과 십일면관음상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에 새로 도입된 것으로 경주 남산 칠불암 삼존불의 협시불에서 유사한 양식이 보인다. 보살의 관에 화불이 있는 경우는 대부분 관음보살인데 명문에 미륵보살로 명시되어 있으므로 도상학적으로 보관 위에 화불이 있는 특이한 미륵보살상이다.
광배 뒷면의 명문에 의해 조성연대와 배경을 알 수 있어 조각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외래양식의 수용과 신라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우수한 조각이다.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국보(1962.12.20 지정). 상높이 174cm.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면관(正面觀)에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불신은 주형광배와 함께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8각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풍만한 몸에 밀착된 대의는 가슴 위와 두 다리에 여러 줄의 U자형 주름을 이루면서 내려오는데, 이는 새로운 옷주름 표현방식이다. 이러한 옷주름 표현은 8세기 신라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이 불상은 절대연도가 있는 유일한 예이다. 이와 같은 계열의 상으로는 경주박물관 회랑에 있는 사암제(砂岩製) 불입상, 선산출토 금동불입상 등이 있다.
중국에서 이러한 불상형식은 5세기 병령사(炳靈寺)나 윈강석굴에서 보이다가 7세기 중엽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는 현장과 같은 구법승들의 활약으로 다시 유행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불상양식의 시원과 그 표현 특징의 기준은, 985년 송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청량사 목조여래입상의 복장기(腹藏記)의 내용에 의해 불전에 보이는 우전왕사모상(優塼王思慕像) 전설과 연결지어 이와 같은 형식의 불상을 편의상 우전왕식불상이라고 한다.
앞의 미륵보살상과 함께 광배 뒷면의 명문에 의해 조성연대와 배경을 알 수 있어 통일신라시대 조각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외래양식의 수용과 신라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우수한 상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 다음백과 감산사
- 영아의 발로 뛰는 여행 경주 여행지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은곳 감산사
•지도 : 감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