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담정은(松潭正隱)
- 법호·법명 : 송담정은(松潭正隱, 1927~ )
- 생애·업적
송담정은(松潭正隱)스님은 1927년 8월 24일(음)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리에서 박일규(朴日圭)를 부친(父親)으로 이 금강심을 모친으로 하여 태어나셨다. 속명은 박종삼(朴鍾參)이며,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시고 늦게 학교에 들어갔다. 1945년 광주 서중 졸업식 날 이발소에서 삭발하고 출가를 결행하여, 이 해에 광주 무등산 자운선원(紫雲禪院)에서 전강선사를 은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수년간 전강선사를 모시고 광주 계림동 경양방죽가에서 낮엔 하꼬방 장사를 하며 정진하고 밤에는 좌선하셨다. 10년 묵언정진 끝나던 해인 1957년(31세)에 담양 보광사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시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전강선사께서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치고 나서는 흔연히 인가를 하시니, 경허 → 만공 → 전강으로 이어지는 불조의 제78대 법맥을 이으셨다. 전강선사께서 도봉산 망월사 조실로 계시던 1960년에 정식으로 스님에게 송담(松潭)이라는 법호와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시고 이를 대중에게 공표하니 전법게는 이러하였다.
非法無非法 (비법무비법)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없느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 없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더라.
此日秋色多 (차일추색다) 이 날 가을빛이 많이 있어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 구름이 날더라.
스님은 이후 오랜 동안 탄광, 어촌 등으로 몸을 숨기시고, 전국의 여러 기차역과 버스정류장의 화장실과 그 주변청소를 하시기도 하셨으며, 서산 방조제를 막는데 일꾼으로 일하기도 하시면서, 그 가운데 투철히 보림수행(保任修行)을 하셨으니 이른바 ‘성스런 태를 오래 오래 기른다[長養聖胎]’라 함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후 1970년에 수원 용주사 주지를 역임하셨으며, 1975년에 전강선사께서 열반에 드시니 뒤를 이어 조실스님이 아닌 법보법인 용화사 선원장으로 취임하시고 현재까지 법을 널리 펴고 계신다.
2014년 송담스님이 "수행 가풍이 달라서 조계종에서 탈종한다." 고 선언했다. 당신이 어른으로 게시는 용주사에서 선거로 계속 시끄럽고 잡음이 들리니까 "선거로 주지를 뽑지 말고 문중이 잘 화합해서 주지를 추대하도록 하라." 말씀하셨건만 지켜지지 않았다.
언젠가 누가 “왜 스님이 되셨습니까?” 하고 질문을 드린 적이 있는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얼까!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다. 사람들은 평생토록 잘 살기 위해 고생 고생하지만 끝내는 환상과 꿈을 간직한 채 죽어가니, 결국엔 나도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고뇌 때문에 출가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하는 물음에 담담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고플 때는 밥 먹고, 피곤할 때는 잠자고, 손님들이 올 때는 같이 이야기 하면서 웃기도 하고, 손님들이 떠나면 조용히 시간을 보냅니다, 그냥 그대로….”
송담선사께서 언젠가 용화사 법당에서 어느 영가의 49재 법문을 하시는데, 어느 유명한 구참 스님이 갑자기 할(喝)을 하니, 송담선사께서 그 자리에선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법문을 마치시고는 방으로 내려오셔서 사시공양을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야, 아까 소리 지른 놈이 누구냐? 거 미친 놈 아니냐?” 하고 점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