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창림(春城昌林)
- 법호·법명 : 춘성창림(春城昌林 : 1891~1977)
- 생애·업적
춘성 스님은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이씨며 휘(諱)는 창림(昌林), 법명이 춘성(春城)이다.
1903년 13세에 백담사로 출가하여 한용운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머리를 깎았으며 20세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915년 안변 석왕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한 뒤, 1920년 신흥사 주지, 1925년 석왕사 주지를 지냈다. 그 후 서울 삼청동에 칠보사를 창건하였다.
1930년, 49세에 세상의 무상을 느끼고 덕숭산에 들어가 만공 스님 밑에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화두로 삼고 참선 수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만공 스님이 물었다.
“별전일구(別傳一句)가 재기처(在其處)요?” 춘성 스님은 크게 “할” 했으나 만공 스님이 인정치 않아 수덕사 산내 정혜사(定慧寺) 큰방에서 한겨울에도 불도 때지 않은 채 장좌불와 하였다. 이후 유점사에서 정진중 수마를 물리치기 위하여 동안거 삼동결제 기간에 큰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밤마다 그 안에 들어가 머리만 내놓고 정진하여 잠을 항복받게 되었다. 이후 자고 싶으면 자고, 자고 싶지 않으면 깨어 있는 대자유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느 날 흥국사에서 장좌불와 정진 중 만공 스님이 나타나 오색이 영롱한 연꽃을 들어 보이니 전에 덕숭산 시절의 별전일구를 홀연히 깨달아 오도송을 읊었다.
연화장세계 내 몸 속에 있으니
항하의 모래알처럼 광활한 우주가 곧 내 몸일세.
누군가 따로 전하는 한 마디 묻는다면
묻고 답하는 찰나에 비로자나 출현했다 답하리.
蓮花藏是通身見 (연화장시통신견)
大千沙界是我身 (대천사계시아신)
若人問我別傳句 (약인문아별전구)
問答卽是出毘盧 (문답즉시출비로)
스님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산천을 주유하면서 설악산·오대산·금강산의 선원과 서산 간월암·동래 금정사·선학원·양주 흥국사 등의 제방 선원에서 25하안거를 성만했다.
1960년 이후 망월사 주지, 강화 보문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1970년부터 망월사 조실을 역임한 후 81세를 기하여 다시 만행길에 올라 발길 닿는 대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했는데, 망월사에서만 50여 년을 지냈다.
1977년 스님은 봉국사에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은 뒤 입적하였다. 세수 87세, 법랍 75년 이었다.
허공의 骨體(골체)를 보았느냐?
滿月靑山(만월청산)에 無寸樹(무촌수)하니 懸崖撤手丈夫兒(현애철수장부아)니라.
八十七年事(팔십칠년사)가 七顚八倒起(칠전팔기)로다.
橫說與竪說(횡설여수설)이여, 紅爐一點雪(홍로일점설)이니라.
다비한 재를 몽땅 바다에 뿌리라고 유언했으므로 제자들은 당신의 영롱한 사리까지 서해에 던졌다.
춘성 스님은 자유롭게 살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자연 그대로의 선승이었다. 자기 삶에 대한 조작을 싫어했으며 원초적인 생명 그대로의 모습을 아무 거리낌 없이 보여 주었다. 생각나는 대로 거침없이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 돌발적인 행동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인위적 조작이나 작위적 삶을 거부하고 무위자연으로 살아간 호호탕탕한 무애 도인이었다. 그런 모습이 일반인의 눈에는 기승이요 괴각승으로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도 칠순이 넘어서도 전혀 이불을 덮고 잔 적이 없었으며 대중들에게도 따뜻하고 안락한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탐심을 내지 말고, 돈을 모으지 말며, 가진 것을 언제나 남에게 보시하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한평생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에 입각하여 일의일발(一衣一鉢)만으로 살아가다가 고요히 입적하였다.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384~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