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학눌(曉峰學訥)(효봉원명(曉峰元明))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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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효봉학눌(曉峰學訥), 효봉원명(曉峰元明) : 1888~1966
  • 생애·업적

효봉 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金城洞)에서 태어났으며 출가 전 속명은 이찬형(李燦亨)이다. 신동으로 자라나 1913년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26세에서 36세(1912~1923) 때까지 10년간 법조계에 투신하였다.
법조계에 몸 담은 지 10년째 되던 날 젊은 판사는 최초로 내린 사형 선고 앞에서 몇날 며칠을 인간 실존의 문제로 고뇌한다. 죽음과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숙명, 죽음을 언도하는 나 자신의 문제로 번민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가족과 법조계를 버리고 뛰쳐나와 3 년 동안 엿판 하나만 달랑 메고 팔도강산을 종횡무진으로 유람하게 된다. 그것은 속죄의 길이며 참회의 길이었다. 아니 구도 행각이었다. 1925년, 38세 되던 해 스님은 금강산에 이르러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계신 금강산 도인 석두(石頭) 스님에게 득도하였다. 이 때의 법명은 원명(元明), 원명 수좌는 늦깎이로서 오직 좌선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실참하기로 결심한다. 스님은 1927년 여름 다시 금강산에 들어와 신계사 미륵암 선원에서 안거에 들어가면서 정진 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 없습니다. 묵언을 하면서 입선과 방선, 경행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만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양해를 구하고 3달 동안 정진했는데, 엉덩이 살이 헐어서 진물이 나와 중의와 방석이 들러붙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한 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아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하였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43세 때, 법기암 뒤에 토굴을 짓는다. 단칸방이었다. 한 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냈고 햇볕과 밥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 내었다.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1931년 여름, 비가 개인 어느 날 아침 스님은 토굴벽 한쪽을 박차고 나왔다. 1년 6개월 만이다. 오도송이 울렸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의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누가 능히 알꼬
흰구름 서쪽에 날고 달이 동쪽으로 뛰누나.
海底燕巢鹿抱卵 (해저연소록포란)
火中蛛室魚煎茶 (화중주실어전다)
此家消息誰能識 (차가소식수능식)
白雲西飛月東走 (백운서비월동주)


은사 석두 화상은 효봉에게 전법게 사좌전송(師佐傳頌)을 내린다.

봄이 오매 온갖 꽃 누굴 위해 피는고
동으로 가면서 서쪽으로 간 이익을 보지 못하며
흰머리 자식 검은 머리 아비에게 나아가니
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로 들어간다.
春至白花爲誰開 (춘지백화위수개)
東行不見西行利 (동행불견서행리)
白頭子就黑頭父 (백두자취흑두부)
兩個泥牛戰入海 (양개니우전입해)


그렇게 이심전심의 미소가 흘렀다. 그 후 스님은 1935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에서 한 철씩 정진하는데, 오대산에서는 한암 스님으로부터 포운(泡雲)이라는 호와 함께 전법게를 받았다.

망망한 큰 바다의 물거품이요
적적한 깊은 산봉우리 구름이여
이것이 우리 집안 다함없는 보배
시원스레 오늘 그대에게 주노라.
茫茫大海水中泡 (망망대해수중포)
寂寂深山峰頂雲 (적적심산봉정운)
此是吾家無盡寶 (차시오가무진보)
灑然今日持贈君 (쇄연금일지증군)


1937년 50세 때 효봉스님은 조계산 송광사에 도착했는데 “낯설지 않고 고향집같이 느껴졌다.” 한다. 효봉이라는 이름도 16국사 중 마지막 인물인 고봉 화상이 꿈속에 나타나 “이 도량을 빛내 달라.”며 게송과 함께 주었단다. 나아가 스님은 지눌 스님을 흠모하여 지눌을 배운다는 뜻에서 스스로 호를 학눌(學訥)이라고도 하였다. 보조 국사의 정혜쌍수 정신을 이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계·정·혜 삼학은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니 함께 닦아 쉬지 않으면 마침내 정각을 이루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렇게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후학을 제접하면서 조실로 머물다가 1946년 가을,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되어 해인사로 향했다.
6·25가 돌발하여 총림이 와해되자 스님은 부산 금정선원으로 옮겨와 안거하였으며 1951년 여름부터 1954년 3월까지 통영 용화사 뒤 토굴에서 안거하다가 1954년 교단 정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5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지리산 쌍계사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모셔진 탑전에 안거하다가 1957년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어 58년 2월까지 재직하였으며 이후 종정에 취임하였다. 그러면서 1958년 겨울부터 59년까지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안거하며 후학을 제접하였다. 1960년부터 1963년 9월까지 통영 미래사에서 정진하였으며 1962년부터 66년까지는 통합종단 초대 종정을 지내면서 1963년부터 1966년 5월까지 다시 동화사에 주석하였다. 1966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그해 10월 15일 오전 10시, 다음의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에 들었다. 세수 79세, 법랍 42년이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누나.
吾說一切法 (오설일절법)
都是早騈拇 (도시조병무)
若問今日事 (약문금일사)
月印於千江 (월인어천강)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181~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