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곡법장(仁谷法長)
- 법호·법명 : 인곡법장(仁谷法長. 1941~ 2005)
- 생애·업적
인곡당 법장 대종사께서는 1941년 6월15일 충청남도 서산군 음암면 성암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부친 원주 김씨 김기홍(金基洪) 거사님과 모친 가성(星)보살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속명은 계호(界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사촌형의 모습에 매료돼 덕숭총림 현 방장이신 원담 큰스님을 은사로 1960년에 발심, 출가하셨습니다.
1965년 덕숭산정혜사 능인선원의 하안거를 시작으로 1975년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5번째 하안거를 성료하셨습니다.
1980년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스님은 1981년 종회 사무처장, 1982년 총무원 사회부장을 역임하면서 불교의 사회참여와 복지활동의 절실함을 피력하고 종단의 대사회적 역할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1984년에는 재무부장을 거치며 투명한 재정관리와 원융산림의 원칙과 소신을 확고히 했습니다. 1973년에는 종무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재무행정을 수료하였습니다.
종단이 혼란에 처해 있을 때 개혁과 정화운동에 적극 동참하셨고, 1994년에는 개혁회의위원으로서, 1999년에는 법규위원으로 종단개혁에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특히 1987년 학교법인 동국학원 감사를 시작으로 1995년부터는 재단이사로 건학이념 구현과 교육불사에 크게 이바지하셨습니다.
1992년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 근대 한국불교의 선맥을 계승한 선지종찰로서의 위용을 회복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수덕사 종합불사 계획을 수립해 가람을 정비하고 수행환경 보전을 위하여 사하촌 이전불사를 추진하셨습니다.
1995년에는 수덕사에 성보박물관을 건립하여 경허 만공 스님의 유품을 비롯한 성보문화재 1000여 점을 전시하였습니다. 평생 동안 주석하시던 수덕사를 새롭게 정비하여 수행과 전법포교 전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지역사회에서 교구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1986년부터 홍성교도소의 종교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교정교화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또한 수덕사에 지역의 불우한 아이들을 모아 돌보았으며, 소년소녀가장이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종단의 행정과 포교현장에서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시고 종단의 인재불사에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한국의 간화선 수행풍토를 진작시키고 재가자들의 수행생활을 돕기 위해 1999년에 한국불교선학연구원을 서울 강남지역에 설립하여 일반인들을 위한 선학강좌와 시민선방을 개원하셨으며 한국선학의 전통을 학술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세미나를 수차례 개최하셨습니다. 또한 2001년에는 총무원 산하 승가교육진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여 교육제도 개선에 주력하셨습니다.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국제포교에 적극 참여하셨습니다. 한·태 불교교류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불교교류에 앞장섰으며, 2001년에는 세계불교 도우의회(WFB) 한국지부 총재를 맡아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도모하셨습니다.
2003년 2월 24일 대한불교조계종 제31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종단 안팎의 지지를 받아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1대 총무원장 인곡당 법장 대종사께서는 늘 즐겨 말씀하시던 다음의 게송을 남겨 놓으시고 2005년 9월 11일 세수 64세, 법랍 45세를 일기로 원적에 들었습니다.
我有一鉢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無口亦無底 입도 없고 밑도 없다.
受受而不諾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出出而不空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 출처 : 서광사 법장스님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