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범룡(無影梵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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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무영범룡(無影梵龍,1914~2005)
  • 생애·업적

무영범룡 스님은 1914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으며 동면 소요리에서 박순섭(朴順燮)과 길중득(吉中得) 사이에서 2남2녀 중 셋째로 탄생했다. 1929년(1934년 설도 있음) 4월 8일에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해 만허(滿虛)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만허 스님이 은사라는 설도 있음)한 이후 41년 8월 22일 오대산에서 한암(漢巖)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35년 유점사 승가대학 수월당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후 1936년 봄,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승려수련소에 입소했다. 당시 상원사 승려 수련소는 유점사, 건봉사, 월정사에서 스님들을 뽑아 공부시키던 곳으로 범룡 스님은 한암 스님 밑에서 좌선하면서<금강경>을 배웠다. 그때 함께 공부한 수좌들이 승려수련소 1기생들인 서옹(西翁), 고암(古庵), 월하(月河), 지월(指月), 서각(西覺) 스님 등이었다.
스님은 한암 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고 참선 정진했다. 스님은 1943년에 승려수련소를 수료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무자 화두를 들고 공부하다가 범어사로 발길을 옮겼다. 범어사를 향하여 한 달간 도보로 걸어가면서 일보 일보 무자 화두 참구에 매달렸다. 범어사 금어선원에 도착해서도 동산 스님을 모시고 피곤을 무릅쓰고 곧바로 화두를 들며 정진했다. 그러다 방선 30분 전에 화두가 성성히 들려오면서 수마와 망상을 조복받았다.
그 뒤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 회상에서 한철을 났으며 다시 오대산 한암 스님을 찾아 뵙고<화엄경> 공부에 진력했다. <화엄경> 에 대한 공부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송광사로 내려가 <화엄론절요>를 일일이 베껴 다시 한암 스님께 가서 토를 달고 자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은 선사로서의 이력 외에 불국사 등 강원에서 강주로서의 이력도 붙게 되었다. 선과 교를 아우르면서 깨달음의 법기를 깊이깊이 천착해 갔던 것이다.
수덕사에서는 만공 스님 호상에서 살다가 간월암으로 옮겨 수행하면서 경허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당시 남방의 지리산, 동방의 금강산, 서방의 구월산, 북방의 묘향산 선원이 유명했는데 이 사산(四山)에 방부를 든 수좌라야 알아주었다고 한다. 스님은 이 네 군데 선원을 모두 돌아다녔다. 해인사 선원에서도 정진하며 참선에 들었다.
1962년부터 1969년 까지 강원도 홍천 수타사에서 정진했으며, 1972년에서 1975년까지는 곡성 태안사에 머물며 선원을 개원하여 납자들을 제접하면서 수선하였다. 1980년에는 동화사 주지 소임을 맡았으며 81년 하안거 땐 금당선원 조실로서 안거 대중을 제접했다. 그후 1997년부터 1년 6개월동안 봉암사 회양선원 조실로 머물기도 했다.
한편 동화사 조실 소임을 내놓으면서 곧바로 동화사 비로암에 주석하기 시작한 스님은 피폐했던 암자를 울력으로 절다운 절로 일궈 놓은 뒤 비로암 조실로서 찾아오는 구도인의 안목을 틔워 주었다.
《현대불교신문》, 2013. 2.17.자 기사에 의하면 현재 서울 조계사의 옛 이름이 태고사였는데, 범룡(梵龍)스님이 ‘조계사’로 바꾸자고 제안했으며, 조계사 현판을 탄허 스님이 쓰셨는데 글씨가 워낙 힘 있고 좋아 누군가 떼어 가버렸다고 한다.
대구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조실 범룡(梵龍)스님이 2005년 12월 15일 오후 3시 27분 비로암에서 열반했다. 세수 91세.
※ 출처 : (아름다운 5060) 한국의 대승 (11) - 범룡(梵龍) (1914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