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불성관(無佛性觀)스님
- 법호·법명 : 무불성관(無佛性觀, 1907-1984)
- 생애·업적
무불스님은 1907년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아버지 남영철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남 의령이며 어릴 때 이름은 점룡(點龍)이다. 15세 되던 해인 1921년 계룡산 동학사에서 김월암(金月庵)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법명은 성관(性觀)이다. 그 해 동학사에서 방해안(方海眼)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계하고 1931년 동학사에서 백초월(白初月) 강백 문하에서 사집과를 이수, 강원도 표훈사에서 김동선(金東宣)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대계를 받았다. 이후 1936년 금강산 유점사 변설호(卞雪湖) 강백 문하에서 사교과를, 1938년 서울 개운사 박한영 강백 문하에서 대교과를 이수했다. 1939년 스님은 사교입선으로 나아가 금강산 마하연에서 송만공선사의 회상에 들어 참선수행한 이후 유점사 표훈사 범어사 등 유명 선원에서 20하안거를 성만했다. 1940년에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박대륜(朴大輪) 스님을 법사로 건당하고 무불 법호를 받았다.
경전에 해박하고 깊은 선리를 참구한 스님은 1940~43년 1월 동학사 강사, 1943년2월~44년1월 유점사 강사를 역임했다. 6·25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온 스님은 1951년 부산 동래 금정산 금정선원 원장을 맡아 1952년 4월까지 운수납자를 지도했다. 1956~57년 범어사 동래 포교당 주지를 맡은 후 1970년 부산 동래구 거제동에 연화사를 창건, 조실로 있었으며 1973년 거제동 금용암 주지로 주석하다가 1984년 3월23일(음력 2월21일) 세수 78세, 법랍 64세로 금용암에서 입적했다. 무불스님의 비는 금용암 입구에 1984년 9월 세워졌다.
무불스님을 추모하는 불자들은 한결같이 스님에 대해 이렇듯 말을 한다. 스님께서는 법상에서 법문을 하시지는 않았으나 평소 당신의 일상언행이 곧 법문이었다고. 경학과 참선수행에 깊은 경지를 지녔으며 사경을 수행으로 삼아 부처님 은혜와 시주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무불스님이 사경을 수행방편으로 쓴 연유가 있다. 스님이 유점사 강사시절인 1943년은 일본제국주의가 극에 이르러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던 때였다. 스님은 강제징집을 피해 금강산으로 숨어 든 청년들을 숨겨주었다고 한다. 스님에게는 독립투사와 학병을 피해 숨어다니는 청년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게 ‘요시찰인물’의 낙인이 찍혔다. 이 때문에 스님은 왜경에게 붙들려 가서 곤욕을 치르기를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유점사 강사를 내놓고 전국을 만행하던 시절, 어느 날 대전역에서 일이다. 일본 경찰이 스님을 보고 “이 봐, 거기 서” 했다. 스님은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옮겼다. 일경은 더 큰 소리로 스님을 불렀고 스님은 여전히 묵묵부답했다. 화가 난 일경은 스님 뒤에 바짝 쫓아와 스님의 장삼을 잡고서는 “잠깐 같이 갑시다” 했다. 완력으로 드잡이하는 일경에 끌려 스님은 역전 파출소에 연행됐다. 스님은 일경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척추를 다치고 말았다. 스님은 그 일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그 이후부터 좌선을 하는 대신 사경에 몰두하게 됐다.
무불스님이 평생 사경한 작품은 법화경 7질, 금강경 18질, 아미타경 60여질이며 반야심경은 그 수를 세기 어렵다. 또한 선구나 법구도 참 많이 썼다. 상좌 덕윤스님은 스님 생전 <무불선묵집>(4,6배판 170여 쪽)에 스님의 묵적 정수를 엮어냈다. 무불스님의 필적은 금강산 마하연 제3차 중건 비문(1932), 금강산 마하연헌답기념비문(1932), 금정사 방생비문(부산 동래), 미타암 신혜월선사 비문(경남 양산), 운수사 사적비문(부산 북구 모라동), 금용암 사적비문, 삼십삼 조사 전법게(박대륜화상 회갑기념)에서 볼 수 있다.
※ 출처 : 불교신문(2016.04.25 15:21)[이진두의 영남 고승전] ④ 무불성관(無佛性觀) 대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