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노대휘(老老大徽)
- 법호·법명 : 노노대휘(老老大徽,1915~1992)
- 생애·업적
대휘(大徽)스님(1915~1992)은 10살에 출가하여 67년을 수행하면서 청정한 계행과 굳건한 신심으로 일관한 종단의 어른이다. 젊은시절에는 중국의 유명 사찰에서 정진에 몰두했으며 일찍이 인도 성지순례를 하고 일본 교토의 절에 머물기도 했다. 남보다 앞서 국외로 나가 견문을 넓히고 수행력을 쌓아나갔다. 귀국해서는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하여 유명 선원에서 안거하면서 정진력을 더했다. 스님은 그 수행력으로 경남 김해(지금은 부산시 강서구)에 육주사(六舟寺)를, 충북 제천에 강천사(江天寺)를 창건했다.
스님은 평생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여 직접 농삿일을 하면서 수행정진했다. 겉으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울 정도로 깐깐하고 엄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속으로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응대하는 따스한 심성을 가진 분이었다. 꽃과 나무를 기르기를 좋아하여 당신이 머무는 도량에 직접 심고 가꾼 수목들이 지금은 숲을 이루고 있다. 종단 안팎으로 사람 기르는 일에도 마음씀을 깊게 했다. 스님은 특히 시줏물의 무서움을 후학에게 엄하게 일러주었고 당신도 씀씀이가 인색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시줏물을 엄격히 사용했다.
대휘스님이 강천사를 창건하게 된 연유도 후학들에겐 전설이 되고 있다. 스님이 제천 송학산에 토굴을 짓고 수행을 할 때다. 스님은 중국에 갔을 때 익힌 능엄주를 늘상 외었다. 수백만송을 했다고 한다. 어느날 마을사람들은 산불이 났다고 웅성거렸다. 숲속에서 불길이 뻗쳤으니 모두 놀랐다. 모두들 그 불길을 향해 달려 올라와보니 웬 젊은 중이 떡하니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스님의 머리꼭대기에서 불빛이 뻗쳐나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 스님이 예사 사람이 아니라고들 쑥덕거렸다. “도인이야, 산 부처님이야.” 소리가 이입 저입에서 나왔다.
마을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스님에게 왔다. 스님은 당황스러웠으나 그 사람들의 형편이 안타까워 토굴 근처에 있는 쑥이나 풀을 뜯어주며 약으로 달여 먹으라 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병이 나은 사람들이 늘어갔다. 대휘스님은 이를 보고는 “내가 의원도 아닌데 저 사람들이 자꾸 몰려오니 어쩌면 좋으냐. 나의 이런 처방에 사람들의 병이 낫지 않으면 그때 어찌하노?” 했다. “스님 그런 걱정말고 하던대로 하세요. 믿음은 산도 움직이게 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들은 스님을 믿고 오는 거니까 별일 없을 겁니다.” 스님의 사제 대인스님은 이렇게 사형에게 말했다고 한다. ※ 출처 : 불교신문( 2016.10.31 14:58)[이진두의 영남 고승전] ⑩ 대휘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