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수련(九山秀蓮)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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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구산수련(九山秀蓮,1909~1983)
  • 생애·업적

1909년 12월17일(음력) 전북 남원군 남원읍 내척리 509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소재형(蘇在衡)선생과 모친 최성녀(崔姓女)여사의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소봉호(蘇鎬). 본관은 진양이다.
어려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학을 공부하다, 1923년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가사를 책임졌다. 이 무렵부터 남원 용성보통학교 정문 앞에서 명치(明治)이발관을 운영했다. 부처님 10대 제자로 이발사 출신인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존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20대 후반에 병고가 찾아온 후 생사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한 지인(知人)의 권유로 지리산 영원사에 들어가 100일 기도를 했다. 그 뒤로 불법(佛法)에 귀의해 송광사 삼일암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가 1937년이었다. 효봉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은 이듬해인 1938년 통도사에서 해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출가 후 송광사 삼일암 선원, 백양사 운문사 선원, 통도사 백련암 선원에서 정진했고, 1943년에는 김천 청암사 수도암 정각토굴에서 용맹 정진했다. 1946년 가야총림 개설 당시 은사 효봉스님이 방장으로 추대되자 도감 소임을 보았다. 1947년 합천 가야산 법왕대에서 정진 중 깨달음의 경계에 들었다. 1951년 효봉스님에게 전법게를 받고 법맥(法脈)을 이었다.
1953년 통영 미래사를 창건하고 은사 스님을 모시며 불법을 폈다. 정화불사가 발발하자, 500자 혈서(血書)를 써서 당위성을 알렸다. 1955년 초대 전남 종무원장을 거쳐 조계종 중앙감찰원장(1956년, 1967년), 중앙종회의원(1960~1967년), 팔공산 동화사 주지(1962년) 소임을 보면서 정화불사를 완성하고 종단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헌신했다. 1957년 백운산 상백운암에서 안거를 했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에서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69년 5월30일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개원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으며, 같은 해 불일회(佛日會)를 창립해 총재 겸 총회장을 맡는 등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후 구산스님은 1976년 동국대 이사를 지냈으며,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눈을 돌려 미국 LA 고려사(1979년), 스위스 불승사(1982년)와 미국 카멜 대각사를 창건했다. 1973년에는 조계총림 불일국제선원의 문을 열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983년 은사 효봉스님의 유훈을 계승해 제2정혜결사운동을 발원하고, 제8차 중창불사를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 12월16일 조계총림 삼일암에서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 47세. 저서로 영문판 법어집 , 법어집 <석사자> <칠바라밀> 등이 있다. 법명은 수련(秀蓮), 법호는 구산(九山)이며, 별호(別號)는 석사자(石獅子)와 타우자(打牛子)이다. 상좌로 보성.원명.현호스님 등이 있다.
※ 출처 : 불교신문(2010.05.14 17:03) 93. 구산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