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암(昔岩)스님 비구
- 법호·법명 : 석암혜수(昔巖 慧秀, 1911~1987)
- 생애·업적
석암스님은 1911년 음력 9월29일 경기도 포천 선단리(仙壇里)에서 아버지 문화 류씨(柳氏) 동열(東烈)공과 어머니 권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재기(在氣)이다. 어릴 적엔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30년 19세 되던 해 황해도 신천(信川) 월정사에 입산 출가하여 완허(玩虛)스님을 은사로 운암(雲庵)율사를 계사로 득도 수계했다. 법명은 혜수.
1941년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貝葉寺)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이수했다. 그해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영명(永明)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아 지녔다. 이어 덕숭산 정혜선원의 만공스님 회상에서 수행했다. 이후 제방선원에서 참선정진한 스님은 1942년 혜월스님의 상수제자인 기석호스님과의 기연(機緣)이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석암스님이 석호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선의 참된 도리입니까?(如何是眞禪)” 하니 석호스님이 즉시 답하기를 “입을 열기만 하면 잘못되느니라(開口則錯)”하고 돌연히 할(喝)! 했다.
석암스님은 석호스님의 이 할에 그 자리에서 크게 마음의 눈이 열리는 바가 있었다(喝一喝有省). 이에 석호스님은 석암스님의 경지를 인가하고 심법(心法)을 전하고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석암(昔巖)이라 당호(堂號)를 내리고 전법게문(傳法偈文)을 써서 그것을 증거했다. 게문은 이러하다. “그대와 내가 본래 무심하니/ 전해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으나/ 전해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법을 주고받을 것 없이 주노라(汝我本無心 無傳無受者 無傳無受法 付與無受者).”
1944년 대덕 법계를 품수하고 1946년 파계사 성전암, 1947년 팔공산 운부암, 수덕사 능인선원, 1948년 수덕사 능인선원, 파계사 성전암에서 수행하고 1949년 수덕사 능인선원을 거쳐 1950년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수행했다. 1951년 범어사 선원에서 수행, 금정사 원주를 맡았다.
이 해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이 개원한 천화율원(千華律院)에서 일타, 지관스님과 대소승(大小乘) 오대부율장(五大部律藏) 전서(全書)를 연찬, 율학을 대성했다.
1952년 부산 선암사에서 수행을 시작으로 스님의 선암사 주석시절이 열렸다. 1953년 선암사 총무, 1954년 선암사 주지를 맡았다. 1954년 종단의 정화불사에 참여했으며 1961년 범어사 주지에 취임하여 동산스님을 모시고 대중을 이끌면서 범어사 사격(寺格)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5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 대종사로부터 전계대화상을 전수했다. 이로부터 스님은 전국 각처에서 비구계·보살계 법회를 열어 승속을 교화한 것이 500여 회에 이른다. 1967년 전국 수좌들의 모임인 선림회(禪林會) 회장에 추대됐으며 해인총림이 발족하자 초대 수좌로 모셔졌다.
1971년 인재양성을 위해 대한불교 장학회(현 석암장학회)를 발기하여 오늘에 이른다. 1973년 도솔산 내원정사(부산 서구 구덕산 꽃마을에 위치)를 창건, 불사에 진력하고 1983년 고희가 넘어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에 추대됐다. 1987년 5월13일(음력 4월16일) 밤 10시45분 내원정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승랍 58년 세수 77세. “80년 한 평생을 회고해 보니/ 마치 남가일몽이어라/ 꿈속에서 또 꿈을 말하니/ 꿈 가운데 일이 가소롭도다(回顧八十年 猶如南柯夢 夢中又說夢 可笑夢中事).” 스님의 임종게다.
※ 출처 : 불교신문(2017-10-16 14:28)[이진두의 고승전] <21> 석암당 혜수 대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