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원(行願)스님
- 법호·법명 : 숭산행원(崇山行願 : 1927~2004)
- 생애·업적
숭산 스님은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했다. 순천공립학교와 평안공업학교를 졸업했으며 1949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1946년 좌우익 대립에 실망을 느낀 스님은 머리를 깎고 사상전집 10권을 짊어진 채 마곡사로 향했다. 스님은 마곡사에서 수양생활을 하다가 신소천 스님이 쓴 《금강경》을 읽어나가 던 중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사구게 대목에서 깨닫는 바가 있어 출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47년에 마곡사에서 득도했으며 1950년에는 고봉(古峰)스님을 만나 행원(行願)이라는 불명을 받고 건당하게 되었다. 고봉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사연인 즉슨 이렇다.
숭산 스님은 1950년 덕숭산에서 하안거 해제를 하고 고봉 스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제 삼세제불을 다 죽이고 송장까지 치우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냐?”
“송장을 치다 남은게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며 숭산 스님이 오징어와 술잔을 꺼냈다.
“그럼, 한잔 따라라.”
“잔을 내 놓으십시오.”
고봉 스님은 손을 내놓았다.
“그게 스님 손이지 술잔입니까?” 하고는 술병 이 깨지도록 방바닥을 내리치자, 고봉 스님은 “아, 그놈 고약한 놈이네.” 하면서 1천7백 가지 공안 중에서 하나하나를 끄집어내 물었다.
묻는 말에 답을 할 때마다 스님은 “아니다.” 라고 해 숭산 스님은 ‘내가 틀려나보다.’ 생각 하고 10분간 묵묵부답으로 있다가 여여(如如)가 아닌 즉여(卽如)의 도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고봉 스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은 말로 인가를 내렸다.
“왜 내가 네 꽃이 피었는데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수덕사에서 하안거 이후 10하안거를 성만했다. 1951년 마곡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1958년부터 1966년까지 조계종 종회의원을 역임했고 1958년부터 1966년까지 불교신문사 사장을 맡아 보았다.
1966년 일본에 홍법원을 개원하면서 본격적인 해외 포교를 나서기 시작했다. 1969년 홍콩 홍법원, 1972년에 미국 홍법원, 1974년에 캐나다 토론토 선원, 1978년에 폴란드 홍법원 및 8개 선원을 잇달아 개설했다. 계속해서 1980년 영국 런던 선원, 1983년 브라질 상파울로 선원, 1985년 프랑스 파리 선원을 개원하였다. 1986년에는 소련 정신문화협회 초청으로 소련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고 1989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불교포교원을 개설했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세계 30여개국에서 선원 160여 개를 개원하여 외국인 제자 5만여 명을 두게 되었다.
1992년부터 화계사 국제선원 조실을 맡아 내외국인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스님은 이 같은 왕성한 국제포교활동으로 WVM 세계평화 문화인 대회에서 세계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97년 만해포교대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세계일화(Ten Gates,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부처님께 재를 털면(Dropping Ashes on the Buddha)》 《선의 나침판》 등이 있다.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887~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