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실스님(宗實, 1951生, 비구니)
종실(宗實)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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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종실(宗實) |
법호 | |
속명 | 이수옥(李秀玉) |
출생 | 1951. 5. 13 |
출가 | 1971년 |
입적 | |
사찰 | (연화사)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2동 583-7 |
특이사항 |
정의
종실스님은 한국 불교계 최초로 점자불경을 발행하고 어린이와 청소년, 사회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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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대전 출생 |
1971 | 견성암에서 자인(慈仁)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76 | 수덕사에서 법장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9 | 범어사에서 비구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졸업 |
1980~1983 | 중앙승가대학교 입학 및 불교학과 졸업 |
1983 | 대전시 동구 가오동 자광사 개원, 어린이법회 운영, 5명에서 시작하여 70~80여 명으로 증원. 어린이불교학교 개최, 300~400여 명 교육 |
1984 | 조계종 불교사회문제 연구소 근무 |
1986 | 대전 맹학교 아나율 불교학생회 지도법사 .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
1993 | 대전 법동 종합사회복지관 관장 |
1995 | 대한불교 조계종 연화사 창건 .대한불교 청소년연합회 대전지부장 |
1996~2002 | ‘맑고 향기롭게’ 대전모임 본부장(6년) |
1996~2004 | 대전광역시 청소년활동진흥센터 소장 |
2004 | 현재 연화사 주지, 청소년 선도 공로 '신한국인상' |
기타사항
문중 | 성혜(性慧) |
상 훈 | 총무원 포교특별상(1988), 신한국인상(1997), 대통령 표창(1998), 평송상(1995) |
생활신조 |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자 |
저서 및 작품 | 불교점자성전』 (1988) |
수계제자 | 지민(智敏)·지명(智明)·윤서(允瑞)·득연(得燃) |
활동 및 공헌
“청승맞게 무슨 승려니? 수녀는 유니폼이라도 예쁘지.”
종실(宗實)스님은 1951년 5월 13일 대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속명은 이수옥이다. 고모가 서울 도선사와 칠보사 등 절에 다니고 있어 그 영향을 받았는데, 고등학교 시절에는 우연히 비구 화봉 큰스님(임환경 스님의 제자)을 알게 되었다. 논산 관촉사에 주석하던 화봉스님은 당시 송광사에서 학생법회를 하고 계셨는데 ‘인물 천 냥, 글 천 냥, 말 천 냥을 더해 삼천 냥’이라고 할 만큼 다재다능한 분으로 대단한 감화력을 지닌 분이었다. 그래서 송광사 학생회에는 출가를 꿈꾸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종실스님 또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생활하면서 법회에 가는 기쁨이 제일 컸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은 우연히 수업을 하시다가 “너희들 가운데 스님 되고 싶은 사람 있니?” 하고 물어보셨는데 학생들 가운데 손을 든 사람은 이수옥 한 사람뿐이었다. 친구들은 “청승맞게 무슨 승려니? 수녀는 유니폼이라도 예쁘지.” 하며 놀렸지만, 선생님은 ‘내가 입시준비 때 절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때가 지금보다 행복했었다.’라며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셨다.
“중질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그래도 하겠느냐?”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수옥은 비구니스님에 대해 점점 더 관심이 갔다. 길에서 비구니스님들을 만나면 가지고 있던 동전을 드리고는 조금밖에 시주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후다닥 도망을 치고는 하였다. 하루는 오랜 생각 끝에 출가를 결심하고 큰스님을 찾아가 입산의 뜻을 밝혔는데, 큰스님께서 “중질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그래도 하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집으로 돌아와 출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큰오빠와 다툰 후 작은집으로 가시는 일이 생겼다. 결혼 전 풍족한 가정의 무남독녀로 자랐던 어머니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와서 딸을 고등학교까지 가르치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이수옥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머니를 찾아가자 어머니는 “삶이라는 것이 별 것도 아닌데…. 이제 졸업을 했으니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나 대신 죽어주는 것도 아니고, 아픈 것을 대신해 줄 수도 없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출가하다 스님은 어머니의 태도에 놀라고 서러워 두세 시간을 더 울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나를 대신 해서 죽어주는 것도 아니고, 아픈 것을 대신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멎었다. 굳게 출가를 결심한 스님은 3일 동안 사진과 앨범 등 주변을 정리하고 동학사로 향했다. 당시 동학사 강원은 지금의 안양 안흥사 회주이신 수현스님이 주지를 맡고 계셨는데, 종실스님이 찾아갔을 때는 마침 출타 중이셨다. 시자스님에게 출가하러 왔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비구니 암자를 소개해주었는데, 대한민국의 비구니사찰 이름이 다 적힌 듯 암자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수옥은 법회에 다닌 경험으로 고무신과 비누 등 갖가지 살림살이를 준비해서 짊어지고 수덕사 견성암으로 떠났다. 마침내 이수옥은 1971년 견성암에서 자인(慈仁)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종실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시자스님이 종실스님을 사숙님에게 보냈는데, 자인스님께서 ‘무조건 내 상좌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시는 바람에 자인스님을 은사로 삭발을 하게 되었다. 종실스님은 육두문자를 잘 쓰고 거침이 없는 자인스님께 가지 않으려고 한 달 동안 버텼지만, 인연이 깊었는지 결국 사제의 연을 맺었다. 그 후 사형스님이 환속하는 바람에 자인스님의 맏상좌가 되었다.
동학사강원에서 부전을 살며 독불공을 없애고 법문을 듣도록 만들다
출가 4년 후 1975년 종실스님은 동학사 강원에 입학했다. 당시 동학사에는 한 반에 25명 정도가 있었는데, 비구 호경(好鏡) 노스님이 강주를 맡고, 일초스님이 사집을 가르쳤다. 스님은 동학사강원에서 4년을 공부하는 동안 학비를 낼 형편이 안 되어 부전을 살았다. 그런데 당시 동학사는 초파일, 백중, 동지 등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법문도 없이 불공만 드리고 마치 전쟁 치르듯 급하게 신도들에게 음식을 싸주고 끝내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스님은 기지를 발휘하여 과감히 개인의 독불공을 없애는 대신 불공 뒤에 법회를 열어 법문을 듣게 만들었다.
남들은 다 영근 벼를 수확할지라도 나는 흔들림 없이 어린 모를 심겠다
1983년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한 종실스님은 슬슬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자 혹시라도 외국 유학길에 잘못될까 염려한 어른스님들은 편찮으신 은사스님을 시봉할 사람이 없다는 구실로 스님을 대전으로 불러 내렸다. 어쩔 수 없이 스님 약 시봉을 위해 내려간 스님은 처음에는 속인들이 사는 마을에 있는 자광사에서 지내는 게 어렵고 불편했지만 내려온 지 20여 일 만에 일대 사건을 저질러 버렸다. 그것은 바로 절에 오는 어린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쳐주겠다는 벽보를 써 붙인 것이다. 벽보를 보고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자광사를 찾아왔다. 스님은 아이들과 함께 일요일이면 산으로 들로 소풍을 가고 한문도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몇 달 사이에 아이들이 90여 명으로 늘어났고, 다들 자광사를 제집 드나들 듯하였다. 선방 수좌이신 은사스님은 상좌에게 약 시봉을 받으러 오셨다가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피해 수덕사 견성암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노스님들의 야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누가 은사스님 약 시봉하랬지 애들을 불러들이라 했느냐.” 하시며 호된 꾸지람을 내리셨지만 스님의 생각은 확고했다. ‘남들은 다 영근 벼를 수확할지라도 나는 흔들림 없이 어린 모를 심겠다.’ 스님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어린이 여름불교학교를 열었는데 점차 참가자 수가 늘어 300~400명의 어린이들이 몰려와 현수막을 내다 붙일 필요도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한국 최초로 맹인을 위한 점자 불경을 만들다
1985년 가을 어느 날 맹인학교 자원봉사자 법우가 찾아와 시각장애인들이 스님을 보고 싶어 하니 학교를 방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학교의 이름은 대명공립맹학교라고 하는데, 마침 자광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며 유치부에서 고등부까지 130여 명의 맹인학생이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맹인 학생들을 처음 만났던 날 종실스님은 몹시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였다. 한 학생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스님, 불교는 신흥종교입니까? 종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한번은 제가 어느 절에 찾아갔는데 큰스님께 가라고 해서 가면 이번에는 작은 스님한테 가라고 하고, 작은 스님한테 가면 다시 큰 스님한테 가라고 해서 그날 저는 큰 스님과 작은 스님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가다가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한 시각장애인의 항변에 종실스님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해 가을 대명공립맹학교 학생 5명과 함께 법회를 시작했다. 법회 이름은 ‘아나율 법회’로 정했다. 아나율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으로 부처님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수마와 싸우며 혹독하게 수행 정진하던 중 시력을 잃은 맹인수행자였다. 피나는 수행 후 아나율은 육신으로 얻을 수 없는 심안(心眼)이 열려 천안제일(天眼第一) 제자가 된 분이다. 1986년 12월 16일 정식으로 아나율 법회 불교반이 탄생했다. 그런데 막상 법회를 해나가다 보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이 생각보다 컸다. 고심하던 끝에 종실스님은 점자불경을 만들기로 다짐하고 학생들에게 꼭 점자불경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길로 탁발에 나선 스님은 다행히 화주가 잘 되어 출판 비용보다 더 많은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1년여의 노력 끝에 마침내 『관음경』, 『천수경』 등 여러 대승경전을 담은 600쪽짜리 7권으로 된 점자불경이 태어났다. “출판기념 법회를 여는데 전국에서 500여 명 정도의 맹인들이 모였어요. 자원봉사자들의 손을 잡고 곳곳에서 구름처럼 몰려드는데, 마치 심청전의 한 장면 같았지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점자불경을 기다려왔는지 짐작하고도 남았어요.” 일반 불교경전은 한 권으로 만들면 되지만 점자책은 부피가 커서 일곱 권에 나눠서 담아야 했다. 무거운 점자불경을 들고 가는 맹인들의 모습이 무척 숭고하게 느껴졌다고 스님은 회고했다. 점자불경 발행을 계기로 서울에 해광맹불자회, 대광맹불자회가 생겨났다.
맹인불자 학생들에게 공연할 기회를 마련하다
‘아나율 불교반’은 당시 맹학교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을 해냈다. 종실스님은 학생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맹인학생들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1980년 스님은 다시 화주를 하여 300만원을 모아 가톨릭회관을 빌려 ‘빛 있는 밤’ 발표회를 열었다. 이 발표회는 시각장애인들이 춤, 노래, 연극을 공연하는 자리였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불교계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던 학생들, 그들을 지도하느라 목이 쉬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선생님, 그리고 객석을 가득 메운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되어 감동으로 차올랐던 소중한 자리였다.
청소년센터와 복지관을 위탁 받아 성공적으로 운영하다
종실스님은 1995년 11월 1일 대전시 중구 문화동에 연화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연꽃어린이집’을 개원했고, 같은 해 4월에는 대전광역시로부터 청소년 자원봉사센터 운영을 위탁받았다. 스님은 센터를 운영하면서 매년 자체적으로 2,000만원의 운영비를 부담했는데, 이러한 사례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나중에 대전시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대전 청소년 자원봉사센터는 이후 활발한 국제교류 활동을 벌여 청소년활동진흥센터로 명칭을 바꾸어 1996년 3월부터 2007년 2월말까지 센터장을 맡아 기관의 초석을 닦았다.
스님은 또한 1993년 대전 법동종합사회복지관 관장으로 취임하여 복지관을 고아원이나 양로원으로만 생각하는 기존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스님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97년 신한국인상, 1998년 대통령 표창, 2004년 신한국인상 등 수차례 표창을 받았다. ‘청소년과 함께 하는 스님’, ‘미래 불자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종실스님은 현재 연화사 주지를 맡고 있으며, 오늘도 부처님 전법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지민(智敏)·지명(智明)·윤서(允瑞)·득연(得燃)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64~47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55.
- 「종실 스님, 청소년 선도 공로 '신한국인상' 수상」, 법보신문 2004.8.10.
- 「종실스님의 편지 한 통」, 월간 『해인』
http://www.haeinji.org/m/index.php?contents=default_view&seek_no=8&webzine_no=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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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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