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
자민(慈珉)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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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자민(慈珉) |
법호 | 보월(寶月) |
속명 | 정시자(鄭時子) |
출생 | 1939. 10. 15 |
출가 | 1952년 |
입적 | |
사찰 | 연대선원(충남 천안시 원성동 589-5)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보월(寶月) 자민(慈珉)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 시절에 청정한 승가를 위한 인재양성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재불사에 매진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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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 충북 제천 출생 |
1952 | 범어사 대성암에서 혜진(惠眞)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4 |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2 |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68 |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5699 개심사]에서 성능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음 |
1969 | 개심사 강원 강사 이후 청룡사, 운문사 강사 역임 |
1978~1979 | 개심사 강원 강주, 천안 연대암 주지, 재단법인 선학원 감사 |
1981 | 대한불교 조계종 7, 8, 9대 중앙종회의원 |
1985 |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 |
1985~1995 | 전국비구니회 사회부장 |
1986 | 재단법인 선학원 교무이사 |
1988 | 신림동 보련암 주지, 둔촌동 보성사 주지 |
1997 | 양천구 목동청소년수련(회)관(현 목동청소년센터) 부관장 |
2002 | 재단법인 선학원 교육위원장 |
2018 | 선학원개혁비대위 상임대표, 천안 연대선원, 서울 보성사 회주 |
문중 | 삼현(三賢)문중 |
수계제자 | 지현(志衒)·재응(在應)·대영(大暎)·덕운(德雲)·보연(補衍)·상규(尙圭)·영운(嶺雲)·진우(振佑)·인욱(仁旭)·계현(季泫)·성운(星雲)·영조(暎照)·진각(眞覺)·지오(志悟) |
활동 및 공헌
자민스님 아버지의 출가 및 환속
보월(寶月) 자민(慈珉)스님은 1939년 10월 15일 어머니의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서류 상의 출생지는 충북 제천군 봉양면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정시자이다. 자민스님의 증조부 정운의는 병조판서를 지내신 분으로 동학혁명 때 강진 해남으로 낙향을 했다. 어려운 세상살이에 시골 생활의 고단함까지 더해지자 스님의 할머니는 4살인 스님의 아버지를 업고 절로 들어가서 11세 때 계룡산 신원사에서 수월스님을 은사로 수계했고, 관응, 석주스님과 도반이 되었다. 그 후 여러 수행처를 두루 찾아다니던 중 33세 되던 해 금강산에서 겨울을 나고 내려와 강원도를 지나는 길에 스님의 어머니를 만나 환속을 했다.
자민스님의 출가
스님의 부모님은 화전민으로 양봉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충북 단양의 하동산 스님 옆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하동산 스님에게는 부모님의 강요로 얻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 자라자 아버지 스님을 따라 출가를 했다. 그 분이 바로 지선스님이다. 자민스님은 지선스님을 14세 때 처음 만났고, 스님보다 세 살 위인 지선스님의 조카 하연자와 친구가 되었다.
1952년 어느 날, 친구 하연자와 범어사에 놀러 갔던 자민스님은 그곳이 마치 옛날에 살던 집처럼 느껴져서 출가하게 되었다. 그때 함께 갔던 이가 훗날 유화사 주지스님의 상좌가 된 연방스님(하동산 스님의 맏손녀)인데, 연방스님은 나중에 환속했다.
자민스님의 은사스님(혜진(惠眞)스님)
자민스님은 대성암의 흙으로 만든 부뚜막에서 아침이면 죽 공양을 짓고, 나무를 하여 새끼줄로 묶어 짊어지고 와서 은사스님 방에 군불을 때면서 살았다.
은사스님은 멋쟁이셨다. 초하루와 보름 저녁이면 법문을 들으러 가시는 은사스님을 위해 자민스님은 꼭 광목 장삼을 다려 드렸다.
16세의 자민스님은 후원에서 혼자 공양주[1] 를 살았는데, 70여 명의 공양을 지었다고 한다. 스님은 '그때 그 복으로 오늘까지 산다.'고 말한다.
성우스님이 부전[2]을 살고 만성스님과 탁자 밑에서 잠을 자던 그때가 영산회상 시절이었다. 은사스님은 범어사 주지스님인 경산당 스님의 아내였다. 경산당 스님의 영정은 범어사 영각에 모셔져 있다. 경산당 스님은 9명의 자녀를 두고 상처를 했는데, 은사스님의 모친(노스님)이 당신의 딸을 시집 보내어 아홉 아이를 키우도록 했다.
그 후 경산당 스님이 돌아가시고 은사스님은 진갑 해에 삭발을 했으며, 사자암과 논 20마지기를 경작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쪽에서 본공스님과 본견스님 등 비구니스님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거처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자민스님은 은사스님에게 “큰절에 가서 절을 달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라며 요청했고, 그리하여 사자암과 대성암을 바꾸어 받게 되었다. 대성암은 스님의 본사이다.
이후 만성스님이 입승[3] 을 살았고, 전국 각처에서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본견 스님이 도감[4] 을, 도정스님이 원주 소임[5] 을 살게 되었다. 소임을 돌려야 한다는 대중스님들의 의견에 따라 은사스님께서 도감을 내놓은 것이다. 모든 것이 시기와 질투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민스님은 월명스님의 설득에 넘어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도감이 바뀌었는데, 종무소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았다. 성품이 선하신 은사스님에 대해 호의적 이었던 대처승들이 의리를 보여준 것이었고, 대처승들은 은사스님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대성암은 만성스님의 회상이 되었다.
장군암 에피소드
자민스님은 17세 때 장군암에서 속임수를 당한 적이 있다. 당시 서울에는 이광우 스님, 대전에는 진광우 스님, 부산에는 강광우 스님이 있었다. 하루는 월명스님이 '장군암(강광우 스님)에서 부전을 살면 논산 정덕사에서 공부를 시켜주겠다.”며 자꾸 자민스님을 설득했다. 스님은 당시 자호스님이 재실 같은 곳을 고쳐서 정덕사로 이름 짓고 비구니 강단을 시작하려고 할 때여서 마음은 움직여도 은사스님을 두고 갈 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
그러나 월명스님의 설득은 날로 강해졌고, 견디다 못한 스님은 빨래를 다 해놓고, 아침 죽까지 쑤어서 양푼에 넣어둔 다음 미리 챙겨둔 바랑을 메고 밤에 길을 떠났다. 월명스님은 일주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암에서는 부전살이[6]와 공양주살이를 했다. 그러나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지만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다. 월명스님이 모두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상가에 시달림을 가서 한 푼이라도 받아오면 그것마저 온갖 핑계를 대며 가져갔다. 누군가가 장삼을 해 입으라고 주었던 소청 한 필마저 가져가버렸다.
그때는 부전살이를 하면 두 가지 누명을 쓴다는 말이 있었다. 도둑질과 서방질이 그것이다. 매일 장군암에서 고된 살림을 사느라 자민스님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논산 정덕사에 가서 공부를 시켜준다던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팔려서 간 것도 아닌데 수중에 돈이 전혀 없으니 아무 데도 가지 못한 것이다.
불교정화운동시 비구니스님들의 역할
장군암을 벗어나게 된 것은 정화운동 때였다. 전국의 비구·비구니스님이 서울로 집결했다. 비구니스님들의 힘을 모두 모아 정화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장군암에서는 주지와 두 명의 스님 이 상경하기로 했고, 이에 자민스님이 가게 된 것이다. 기차역으로 나가 기차를 타니 객차 안은 스님들로 가득했다. 당시는 정화운동이 일어난 초창기였고, 그렇게 서울로 올라간 뒤 스님은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
자민스님은 장군암에서 7~8개월 동안 고달픈 머슴살이를 살았다. 은사스님이 미움을 받은 바람에 고생이 더 심했다. 은사스님의 성정이 착하고 자민스님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당했던 뼈아픈 경험이었다.
조계사는 대처승의 본부였다. 1953년 7월경 정화회의가 시작되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연되다가 삼동에 선학원과 조계사를 오가며 대처승들과 대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비구스님들은 비구니스님들의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조계사에 남아 있으라고 한 뒤 선학원에 가 있었다. 비구니스님들은 조계사에서 대처승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두면 대치 상황이 길어질 것으로 판단한 대처승들이 비구니스님들을 쫓아낼 계획을 세우고 어느 날 밤 행동에 돌입했다. 그 와중에 대처승이 비구니스님을 끌어안았다 하여 한바탕 대소동이 일어났다. 유리창을 부수는 등 난장판이 벌어진 뒤 결국 조계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차지가 되었고, 대처승들은 물러나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대처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여론은 비구니스님들의 편이었다. 비구니스님들은 이런 상황을 적극 활용했다. 관계부처 장관이나 관련 공무원들의 부인들을 찾아가 비구니 스님들의 사연을 알리고 설득을 한 것이다. 그렇게 펼친 안방 공사는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장관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대처승으로부터 조계사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대처승들이 물러나자 그제야 선학원에 가 있던 비구스님들이 불편하다면서 조계사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비구니스님들은 선학원으로 가게 되었고, 아침이면 가사 장삼을 수하고 줄지어 조계사로 내려오곤 했다.
비구스님들은 상황이 불리할 때면 비구니스님들에게 일을 맡기고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정법은 언제나 비구니스님들이 지켜갔다. 정화 당시 조계사를 되찾은 것은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시절 대처승들은 김범이, 김동화 등의 인재를 길러 사회로 진출시켰으며, 재계나 학계로 뻗어나가 불교계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계종의 비구스님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안목이 좁아 인재 육성에 소홀했다. 집 열 채를 지은들 그 집을 지킬 인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학
정화가 끝날 무렵 수옥스님은 내원사에 내려가서 사찰 복원 불사를 맡았다. 내원사 복원 불사를 함께하여 낙성법회를 마치고 자민스님은 1959년 19세 되던 해에 동학사에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두 강원에서 합동법회를 했다. 동학사에서는 묘엄스님, 혜성 중강스님, 자흔스님, 지윤 스님이 참석했고 선암사에서는 명성스님, 지운스님(환속)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대처승들의 중상모략으로 동학사 강주 스님에게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삼복 중에 자흔스님과 함께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탄허스님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도원스님, 인보스님, 지도스님, 녹원스님 등과 같이 사집 현토, 주역, 선혜, 영가집 등의 강의를 들었다. 1년 반 동안 공부를 한 후 1962년에 영은사에서 나왔다.
그 즈음 자민스님은 몸이 매우 아팠다. 그러자 죽을 때 죽더라도 계를 받고 싶은 마음에 범어사로 향했고, 24세 때 계를 받게 되었다. 비구니계를 받을 때 오래된 구참들과 자은, 랑천, 법형스님 등이 함께했다. 이후 관응스님이 직지사에서 강을 하게 되자 녹원스님의 권유로 함께 직지사로 가서 능엄, 기신, 반야 등 사교 재강을 받았다. 자흔스님은 관응스님 밑에서 함께 공부하기로 약속하고는 오지 않았다. 자흔스님은 탄허스님께 배우기를 더 원했다. 그래서 두 스님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자민스님은 자흔스님에 비해 공부가 뒤처질까 염려하여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스님이 직지사에서 공부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흔스님은 직지사에 오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자민스님은 자흔스님의 공부가 일취월장할 것 같은 조바심에 괘종시계를 사서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면서 15명 정도가 모여 함께 공부를 했다.
1년 뒤 스님은 관응스님을 모시고 내원사 화엄산림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흔스님을 만났는데, 생각보다 공부가 덜 되어 있었다. 그 뒤 자흔스님은 결국 혼자 떨어져 지내다가 인연을 만나 환속했다고 한다.
이후 관응스님이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가시면서 강원이 해체되었고, 자민스님은 자광스님과 함께 개심사로 향했다. 개심사 시절에는 명우스님, 도문스님 등과 함께 『반야경』과 『원각경』을 보고, 3년 동안 『화엄경』을 보았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화엄종강을 앞둔 동짓달 열하룻날이자 성능 스님의 생신날이었다. 생신상을 마련하고 모두 자리에 앉자 성능스님께서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셨다. 박헌영 스님 강맥으로 전강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민스님은 '보월(寶月)'이라는 당호와 함께 성능스님께 전강을 받게 되었다. 관응스님께도 '허조(虛照)'라는 당호를 받았는데, 이는 보월과 비슷한 당호였다.
자민스님은 출가 후 경봉스님, 탄허스님, 관응스님, 성능스님께 회향을 했고, 네 분 스승이 모두 당대 대강사 종장인지라 늘 스승 복이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명성스님과 자민스님
그 후 청룡사에 있던 명성스님이 운문사로 가게 되었고, 청룡사 주지스님은 절 식구들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탄허스님께 강사를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탄허스님은 강사를 구해주는 대신 방을 하나 내어달라는 청을 넣은 뒤에 도원스님을 강사로 추천했다. 월정사에서 살다가 온 도원스님은 청룡사에 와서 둘러보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다급해진 탄허스님은 자민스님에게 전보를 넣었다. 그때 스님은 성능스님이 열반하셔서 49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탄허스님은 자민스님에게 화엄합론 원고 교정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스님은 작은 힘이나마 보태드리기 위하여 허락을 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만에 탄허스님이 이문동으로 이사를 가시게 되자 스님 또한 청룡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그 즈음 운문사는 산판 이중계약 사건, 호거산 큰 산불로 인한 학인 압사사건 등 몇 가지 힘든 일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 명성스님이 태국 왕실 초청 유럽순례를 가게 되었다.
(※ 명성스님은 1975년 12월 11일부터 1976년 6월 1일까지 정확히 5개월 24일 동안 태국왕립사원 초청으로 원시불교연구를 위해 동남아 일대와 유럽을 거쳐서 미국까지 돌아보았음.)
강주스님이 공석이라 두세 번 사양하다가 자민스님은 혹시라도 그 사이 대처승들이 운문사를 차지하면 명성스님이 돌아왔을 때 갈 곳이 없게 될까 염려하여, 명성스님이 돌아오면 즉시 떠나리라 마음을 먹고 운문사를 맡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해인사 혜안스님이 주지를 맡고, 스님이 강사를 하며 6개월 정도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성스님이 유럽순례를 마치고 일본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즉시 운문사를 떠났다. 명성스님이 돌아와서 자민스님을 찾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상황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더 이상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발심의 재충전
6년 만에 다시 개심사 강원을 열고 강의하던 시절, 자민스님은 '누군가의 귀한 딸이 삭발하고 출가하여 남의 상좌가 되었는데, 책임지고 잘 가르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시험을 보게 했다. 뜻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는 스님들은 아래 단계로 내려 보내 다시 지도하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스님이 아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책임감을 갖고 가르쳐서 내보내겠다는 각오로 강의를 했다. 스님은 농사를 지어서 살아가는 방법도 가르치고 싶었지만,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
처음 발심한 그 마음은 어디로들 갔는지 자민스님은 점점 회의가 생겼다. 그래서 더 나은 강사 스님께 보내고, 이후 대중포교 분야로 돌아섰다.
당시 스님은 강원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섯 군데 정도 법문을 다니고 있었다. 한 곳에 50명 정도였으니 어림잡아 250명 정도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했던 것이다. 신도들은 '한 달에 한 번 법문을 듣고 재충전을 하여 다시 새로운 한 달을 살아간다.'고 했다. 또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절에 오는데, 스님이 오시지 않으면 정말 힘이 빠진다.'고도 했다. 자민스님은 이렇게 스님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강단을 접기로 결정한 것이다.
고양 흥국사 시절
그 후 스님은 천안으로 내려갔다. 자민스님을 만난 흥국사 덕수스님은 스님에게 강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치며, 문중 어른들과 함께 1년이나 설득을 했다. 결국 자민스님은 주경야독하며 힘들게 집을 지었다.
그런데 범조스님(청룡사에서 서장을 배우던 학인)과 덕수스님 사이에 갈등이 생겨, 덕수스님이 황진경 스님에게 그만 사표를 던져버렸다. 호랑이 입에 넣어준 격이었다. 결국 흥국사는 비구스님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덕수스님은 원래 개운사 위쪽에 있는 대원암에 있었는데, 정화 공신이라고 대원암을 내주고 흥국사를 받아서 살았다. 학인들과 수많은 고생 끝에 도량을 가꾸었는데, 하루아침에 쫓겨나고 만 것이다. 임술년 4월에서 9월까지 근 5개월 가량 비구스님들과 대치하여 싸웠으나, 절을 되찾지는 못했다. 자민스님은 천안에 절을 지으려고 모아둔 1,300만 원을 흥국사 주지실 재건축비로 썼기 때문에 그 돈을 돌려받고 나왔다.
학인들 몇몇은 흥국사를 떠났고, 더러는 '스님이 고통 받고 있는데 어떻게 가느냐.'며 떠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죽도암 주지스님의 상좌가 있었다. 자민스님은 학인들과 함께 죽도암에 가서 바위 위에 앉았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심정이었다. 그날 따라 폭풍이 심해서 파도가 거칠었고, 배도 갈매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자 날씨가 맑아졌다. 배도 보이고 갈매기도 날아다녔다. 그때 스님은 '세상이 험악할 때에는 쉬어 가는 것이 최고의 진리'임을 자연에서 배웠다. 그런 깨달음을 얻자 마음이 쉽게 가라앉았다.
“장자 강의를 들을 때였습니다. 한번은 공자님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성인의 정치이념을 강의하는데 공자님을 시기하는 패가 나무를 베는 바람에 압사당할 뻔한 수모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성인도 어려움을 겪는데, 이 정도는 고맙게 생각하자,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자고 마음을 먹으니 편안해졌습니다. 스님들한테 고통을 준 사람들도 용서가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때 망치 들고 각목 들고 설치면서 세상을 한 손에 움켜쥐려고 했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지만, 나는 아직 건재합니다. 참는 것이 최고의 진리입니다. 지금은 아무 후회 없이 살고 있습니다.”
종회의원 시절
자민스님은 7, 8, 9대 종회의원을 지냈다. 그런데 종회의원이 되어 처음 종회에 갔을 때, 비구니 스님들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정의도 없었다. 그러나 차츰 무언의 표현이 오히려 힘이 되는 것을 느꼈다.
7대 종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종회의원 정족수는 35명이었는데 비구니스님은 3명뿐이었다. 세 명의 비구니스님은 서로 합심하기로 뜻을 모으고, 표결을 할 때 항상 함께 하여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권위도 있었다.
자민스님은 무엇이든 시작을 하면 끝까지 해내는 성품이었다. 뒤로 물러설 줄도 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원이 몇 명씩 늘어나면서 출석만 하고 그냥 가버리는 스님들이 생겼다. 그래서 표결할 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번은 종회에서 큰 난리가 벌어지고 급기야 고소가 잇따랐다. 비구니스님들이 공명정대하다고 판단한 검찰은 자민스님에게 법정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했다. 법정에 선 자민스님은 비구스님들의 거짓된 모습에 한심한 생각만 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검사는 스님의 말 없는 표현을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그때 비구니 종회의원들은 내적 단결을 위해 비구스님들과 어울리지 않는 등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성되는 부분이 있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어울려야 비구스님들의 얘기도 듣고 그 속사정도 알 수 있을 텐데,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던 겁니다.”
선학원 감사 및 이사 소임
자민스님은 선학원 감사로 16년, 이사로 12년을 살았다. 선학원에 소속된 350개의 사찰 대부분이 비구니 사찰이었다. 우이동 '보광사 사건'은 사적인 감정이 발단이 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선학원 이사 소임을 내놓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인재불사
그 후 성열스님(강남 포교당)과 함께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2년 전, 몇몇 스님들이 모여서 장학 사업을 시작했는데, 봄과 가을 두 차례씩 시상식을 갖기로 하고, 지금까지 장학금을 세 번 지급했다. 얼마 전에는 사단법인 등록까지 마쳤다. '불교연구 소장학자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파알리어 원전 번역을 하거나 논문을 쓰는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스님은 인재불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들의 업적을 남기고 사후 관리까지 도와야 합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돈은 필요할 때 주선해서 쓸 수 있지만 인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재가 곧 재산입니다.”
“상좌는 분신이요,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존재”
자민스님은 상좌스님들의 교육에 특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상좌들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25년 전에 일체 소임과 경제를 내놓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요. 하루는 장을 봐왔는데, 저와 상좌스님이 서로 다르게 장을 봐왔습니다. 저는 싸면서 싱싱하고 좋은 것을 사왔는데, 상좌는 물건을 볼 줄 몰라서 돈은 더 주고 품질은 더 안 좋은 것을 사온 것입니다. 그때 '내가 화장막 가서 장 봐다 줄 수는 없으니 일찍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더 지불하더라도 직접 하도록 시켰습니다. 더 나가는 돈은 교육비로 생각했지요. 그랬더니 몇 달 정도 지나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아예 다 맡겨 버렸습니다.”
그 후 자민스님은 살림에 대해 절대 묻지 않는다고 한다. 상좌들이 알아서 살도록 간섭하지 않고 있다. 자꾸 질문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대충 대답하는 일이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상좌들이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민스님은 상좌에게 살림을 못 맡기겠다는 스님을 보면 안타깝다고 한다. 언젠가 살림을 맡길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넘겨 그들의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상좌들이 좀 더 폭넓은 사회 활동을 하며 살기를 바라고 있다. '스님이 하시는데 우리가 뭘요.'하면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것만 같아 마땅치가 않고, 어느 정도의 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스님의 성에 차지는 않는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즘에도 상좌들이 승가대학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노장님, 기력 없어 보이는데 상좌를 두셔야겠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상좌가 아니라 종을 두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상좌를 마치 종 하나 두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사고가 깨이지 못 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스님은 공부도 가르치질 않습니다. 상좌는 나의 분신이요,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존재입니다.”
오래 전 자민스님은 명우스님, 도문스님, 길상스님 등과 함께 미얀마 마하시 수도원에서 한 철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미얀마 스님들에게 '한국에 한번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그분들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미얀마 스님들을 편안히 모실만 한 사찰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 중에 진관사에서 장소를 제공해준다고 약속을 해주어서 마음을 놓았는데, 방문 사흘을 남겨두고 약속을 취소하는 바람에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고민하던 자민스님은 지난 21년간 법회를 다녔던 승가사 주지스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주지스님께서 쾌히 승낙해주셔서 다행히 거처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후 우빤디타, 우짜띨라, 우케민다(일본거주 미얀마스님)스님은 승가사에서 한 달 동안 머물고 가셨다. 이때 통역은 거해스님이 맡았으며, 한 달 동안 승가사에서 법회를 열어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현재 자민스님의 상좌 두 명과 제자 등 10여 명이 미얀마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상좌인 천안 연대암 주지스님도 가기를 원하여서 보내주었다. 당시 자민스님은 중학교 1학년생과 2학년생, 유치원생을 돌보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승가사에서 관응스님을 모시고 법화산림을 하는 한편 다른 사찰로 법문을 다니기도 했다. 자민스님은 아이들을 뒷바라지할 공양주를 급히 구해서 맡기고, 새벽에 출근하여 밤 10시에 천안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공부를 하겠다는 상좌가 있으면 기꺼이 보내주었다. 안 하려고 해서 문제이지, 거들어줄 상좌없이 혼자 살게 되더라고 공부를 하고 싶어 하면 언제든지 보내준 것이다.
한번은 상좌들이 스님의 환갑 때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하여 운전을 배운 적이 있었다. 기사를 둔다는 가정 하에 유지비를 따져보니 매월 약 200만 원 정도가 필요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된 스님은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운전면허를 딴 후 자동차를 살 때가 되었는데, 차의 크기에 대해 스님의 생각과 상좌들의 생각이 달랐다.
상좌들은 스님의 신분을 고려해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차를 원했고, 스님은 혼자 타고 다닐 만한 소형차를 원했다. 의견 차이로 차를 사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던 중 자민스님이 넘어져서 어깨를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된 스님은 자동차 사고 때문에 다치고 장애인이 된 사람들을 보고 차를 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자민스님은 절 집의 일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님들이 먹는 데 투자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반찬은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간혹 상좌들이 반찬을 많이 차려오면 나무란다.
또한 스님은 이 시대에는 모든 면에 밝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뉴월 박넝쿨이 초가지붕을 다 덮어도 가을 소슬바람 찬 서리가 내리면 시들고 말듯이 요즘은 사실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종교전쟁이 나면 그때는 어떡할 겁니까? '자연의 순리를 따르자, 우주의 법칙에 맡기자.' 하며 혼자 마음을 다잡기도 하지만 때로는 속이 상합니다. 불법이 보배이면 무엇 합니까? 다른 종교에 정복이라도 당하게 되면 끝입니다. 불법승 삼보의 승보가 없으면, 이 시대에 불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승보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민스님은 2018년 천안 연대선원, 서울 보성사 회주로 있으며, 수계제자로는 지현(志衒)·재응(在應)·대영(大暎)·덕운(德雲)·보연(補衍)·상규(尙圭)·영운(嶺雲)·진우(振佑)·인욱(仁旭)·계현(季泫)·성운(星雲)·영조(暎照)·진각(眞覺)·지오(志悟)스님 등이 있다.
사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4~230.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85.
- 현대불교, 후학양성·사회사업 헌신하는 자민 스님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94 (2005년)
- BTNm, 이하얀이 만난 스님 http://www.btn.co.kr/pro/Program_detail.asp?ls_StSbCode=CATPR_11&PID=P613&DPID=58471 (2010년)
- 연합뉴스, 조계종, 비구니스님 11명에 최고 품계 https://www.yna.co.kr/view/AKR20190315124500005 (2019년)
- 법보신문, [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5. 자민 스님 인터뷰(끝)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358 (2020년)
- BBS, 믿음이 중요한 이유? _ 자민스님 [찾아가는 백고좌 법회] https://www.youtube.com/watch?v=x0WO9fwv2oQ (2021년)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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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慈珉)스님 | 본항목 | 자민스님(慈珉, 1939~) | 慈珉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자민스님(慈珉,_193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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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慈珉)스님 | 삼현(三賢)문중 | ~의 일원이다 |
자민(慈珉)스님 | 혜진(惠眞)스님 | ~의 제자이다 |
자민(慈珉)스님 | 범어사 대성암 | ~에서 출가하다 |
자민(慈珉)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자민(慈珉)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자민(慈珉)스님 | 천안 연대선원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
자민(慈珉)스님 | 신림동 보련암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
자민(慈珉)스님 | 둔촌동 보성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
지도
- 연대선원 (충남 천안시 원성동 5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