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일스님(法一, 1904生, 비구니)

biguni
전영숙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5일 (화) 21:40 판 (새 문서: <indicator name=인명사전>비구니 인명사전</indicator> {{인물정보 |표제 = 법일(法一)스님 |사진 = 200px |법명 = 법일(法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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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일(法一) 스님은 폐사였던 진주 대원사를 참선도량으로 일군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4 서울 출생
1925 경기여고 거쳐 동덕여고 졸업
1927 진주 식산은행 근무
1936 진주 대원사에서 문성(文成)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7 진주 대원사에서 영암(暎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40 영암스님으로부터 사교 이수
1950 해인사에서 효봉(曉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3 동화사 비구니 총림 교무국장 및 종회의원
1954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운문사 비구니 강원 교무국장
1955 진주 대원사 주지
1957 사리전 선원 증축
1958 대웅전, 천광전, 사무실 신축
1960 객실 신축
1963 원통보전(관음전) 산신각 신축
1968 봉상루, 범종각 신축, 범종불사
1981 명부전 신축, 창고 건립, 후문 신축
1983~1984 단일 구족계단 비구니 증명사
1991년 10월 10일 대원사에서 (세수 88세, 법랍 55세)입적
문중 계민(戒珉)문중
상훈 총무원장 표창장
수계제자 행원(行願)・성우(性牛)・행돈(行敦)・행석(行錫)・진홍・행욱行旭・ 자현慈賢・행련行蓮・지형智亨・계정戒靜・종재宗齋・도정道正・도행・ 수현修賢・도문道文

활동 및 공헌

법일스님 태몽

법일 스님의 출가 전 이름 봉이(鳳伊)는 어머니의 태몽에 따라 지은 것인데 조부께서 큰 봉황새를 어머니 가슴에 안겨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법일스님은 1904년 음력 8월 23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아버지 김유찬과 어머니 전영순사이의 2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교육

일제시대 부유하고 개화된 집안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최고의 명문인 경기여고를 거쳐 1925년 동덕여고를 졸업하였다.

출가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기 위해서 진주에 있는 외가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뜻하신 바가 있어 1927년 진주 식산 은행에 취직을 하여 십년 동안을 근무하였다. 인척인 직장 상사와 대원사에 다니던 중 대원사에 주석하시던 비구니 문성(文成)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그 후 법일스님은 출가자의 힘든 수행과정을 존경하게 되면서 문득‘속세의 살림살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출가하여 구도자로 살아가는 것만은 못하지 않겠는가?’란 생각을 하게 되고, 곧바로 출가를 단행하였다. 1936년 9월 15일 문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되니 이때 스님의 나이는 33세였다.

[법일스님의 모습]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74

수행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가게 된 스님은 1937년 9월 9일 영암映岩화상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40년에는 강원(講院)에서 사교(四敎)를 수료하였다.

그 후 쌍계사 국사암에서 견성암 대중 30여명과 당시의 대비구선사 만공, 고봉스님 회상에서 각각 3년씩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후에도 각 선방에서 용맹 정진을 거듭하신 스님은 1950년 4월 8일 해인사 효봉(曉峯)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조계종 종회의원이 되다

1953년 동화사 비구니총림과 1954년 운문사 비구니 강원 교무국장을 역임하신 스님은 1953년 9월에는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피선되어 수년 동안 비구니 승가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진주 대원사 중창

1955년 9월 5일 주지로 부임한 대원사는 완전 폐허가 된 절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대작불사(大作佛事)의 원력을 세우고 그 면모를 일신하기까지 스님의 삶은 원력보살의 삶 그 자체였다. 스님이 부임하신 후에 도량을 일군 첫 번째 결실은 현재 선방으로 사용되는 탑전의 불사였다. 그 당시는 비구-대처승간의 치열한 시비가 있었던 터라 기득권을 가진 대처승의 방해로 인하여 불사가 쉽지 않았다. 결국 대원사 소유권 분쟁은 법정에까지 이어졌고, 불행 중 다행으로 1959년 고등법원에서 법일스님 측이 승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기쁨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시주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가호호 방문을 하기 시작했다. 시대적으로 모두가 어려웠던 민큼 그 자체가 바로 고행(苦行)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스님의 깊고 지극한 신심에 감복한 신도들의 시주금으로 30년에 걸쳐 조금씩 불사를 이어갔다. 1957년 사리전 선원을 증축을 시작으로 그 다음 해에는 대웅전과 천광전, 사무실을 신축하고, 그 이듬해인 1960년에는 객실을 신축하셨다. 스님의 불사에 대한 원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63년 원통보전(관음전) 및 산신각을 신축하고, 1968년 봉상루와 범종각을 신축하고 범종 불사를 하였다.

 다시 1981년 명부전을 신축하고 창고를 건립하였으며, 후문을 신축하였다. 30여 년 동안 계속된 불사에 스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 1986년 대원사는 17여 동의 건물로 장엄한 사격을 갖추게 되었다.
[상좌들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75

청빈납자로서 후학의 모범이 되다

평생을 참선정진으로 일관하시면서도 가람과 대중수호를 원만히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원력 속에 항시 관음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대중 속에 처함에 있어 둥글둥글 원만해야지, 모가 나면 아니 된다.”고 말씀하면서 우리 모두가 불이不二 의 인격체임을 일깨워 주었다. “도에는 성냄이 으뜸으로 해가 되니, 참고 참는 가운데 도가 성숙해짐”을 거듭거듭 당부하였다. 법일스님은 종종 “이제는 아무 생각도 기억도 없다”며 이처럼 텅-비인 느낌을 오래 전부터 체험하였다고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더함 없는 원력으로 살았으면서도 끝내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구 사양하는 겸허한 수행자였다. 스님은 아랫사람 보기를 천진불 보듯, 보살 대하듯 항시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며 그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다. 스님의 이러한 청빈한 납자의 삶은 후학의 모범이 되고도 남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대원사에 여걸이 계시니 가서 만나보라.󰡓 대원사 앞마당은 스님을 만나 뵈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스님에게 경배를 올리는 이들은 사부대중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스님도 법일스님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여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다.

스님의 치열한 구도여정

198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단일 구족계단 비구니 증명사를 역임한 스님은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수행자이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출가 전에 외상으로 약을 사고 그 값을 치르지 못한 채 출가한 것을 기억해 내시고, 그 약값을 치르기 위해 찾아가니 주인은 이미 命을 다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그 약값을 영전에 놓고 제사를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 질 정도다. 스님은 가람수호 원력 이면에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그대로 간직하시고, 출가 후 입적에 이르실 때까지 스님의 청빈한 삶과 불타는 구도열정은 후대 수행자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입적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남긴 유품으로는 2평 남짓한 방 한 칸에 있는 골동품 같은 나무책상 한 개와 철로 된 책상 그리고 철로 된 옷장이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가 스님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1950년 비구니계 수지 이후 무려 30하(夏)를 성취하신 스님의 치열한 구도열정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수행력으로 기억될 것이다. 오로지 앉으나 서나 밤낮없이 대원사를 염려하셨던 大비구니 법일스님은 납자로서의 길을 따라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챙기던 어느 날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를 들으며 홀연히 세속의 인연을 마감하였다. 세수 88세요, 법랍은 55세였다. 스님이 입적에 들던 1991년 음력 10월 10일, 지리산은 온통 스님을 기리고 찬탄하는 불제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도들은 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4월󰡐지리산 대원사 중창 사적비명󰡑를 건립하여 대원사의 창건과 중건의 역사는 물론 법일스님의 가람수호 원력의 업적을 만고(萬古)에 전하고 있다. 이러한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대원사에는 매년 수많은 눈 푸른 비구니 납자들이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진주 대원사

대원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9년(548년) 연기조사가 창건할 당시 이름은 평원사 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그 뒤 숙종 11년(1685) 운권선사가 대원암을 짓기 시작했고, 고종 27년(1890) 혜흔선사가 크게 중수하여 이름도 대원사로 바꾸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대원사는 1955년 이후로 법일스님이 꾸준히 복구사업을 벌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원사 동국제일선원은 수덕사 견성암 선원, 가지산 석남사 선원과 함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1898년 구하스님은 이곳에서 박영호朴永湖 강백으로부터 대교를 배웠는데, 당시 대원사에는 수백 명의 학인들이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28년 서래각(西來閣) 선원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1935년 무렵 성철(性徹)스님이 재가불자의 신분으로 대원사에서 참선 정진하였다. 당시 성철스님은 정진에 든 지 42일 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한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대원사의 모든 전각이 불타기 전까지 이곳에는 ‘상판’과 ‘하판’이라는 선방이 있었는데, 이 두 선방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같은 대원사 대중이면서도 진주 시내에서 만나면 어느 절에서 왔냐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경봉(鏡峰), 전강(田岡)스님등 역대 큰스님 중에서 대원사 선방을 거쳐 가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로 선원이 융성하였다. 대원사에 여법한 비구니 선원이 개원된 것은 1957년의 일이다. 가람은 대웅전(大雄殿), 원통전(圓通殿), 응향각(凝香閣), 산왕각(山王閣), 봉익루(鳳翊樓),천왕문(天王門), 명부전(冥府殿), 천광전(千光殿), 염화실(拈花室), 범종각(梵鐘閣), 백인당(百忍堂 후원), 주지실, 큰방, 객실,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의 측면 뒤편에 선원 건물인 사리전이 자리 잡고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 1112호인 다층 석탑이 있다. 산세와 위치에 어울리는 아담한 규모로 지어져 전혀 어색함을 느낄 수 없다. 비구니들의 청정도량으로 조용하면서도 고즈넉한 경내가 인상적이다. 경내에 높이 6.6m의 9층 석탑(경남 유형문화재 30호)이 있는데, 신라시대의 화강암 석탑으로서 조선시대의 재건을 거쳐 현재의 모습은 1972년 보수한 것이다. 방장산 대원사는 견성암, 내원사, 석남사, 윤필암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대원사가 비구니 선원으로 거듭나기까지 법일스님의 대원력이 없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출처: 운문회보 제22호(불기 2531년, 1987년 11월 25일)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74~380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356
  • 사진출처 : 산청 대원사 2017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원사(大源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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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일(法一)스님 본항목 법일(法一, 1904~1991) 法一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일스님(法一,_190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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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1 항목2 관계
[[법일스님(法一, 1904生, 비구니 | 법일(法一)스님)] 계민(戒珉)문중 ~의 일원이다
[[법일스님(法一, 1904生, 비구니 | 법일(法一)스님)] 문성(文成)스님 ~의 법계제자이다
법일(法一)스님 [[진주 대원사] ~에서 출가하다
법일(法一)스님 영암(暎岩)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법일(法一)스님 효봉(曉峰)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법일(法一)스님 진주 대원사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법일(法一)스님 종회의원 ~을 역임하다
[[법일스님(法一, 1904生, 비구니 | 법일(法一)스님)] 진주 내원사 ~를 중창하다

지도

  • 진주 대원사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