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진우스님(眞愚, 1934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7일 (화) 20:18 판 (참고자료)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의

진우(眞愚)스님은 윤호스님을 은사로 청룡사에서 출가하여 청룡사 주지를 역임하고 군인들을 위한 호국청룡사를 개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4 서울 출생
1947 광희국민학교 졸업
1948 청룡사에서 윤호(輪浩)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8 청룡사에서 보산(寶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0 수선 안거 이래 35 하안거 성만
1954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8 동학사 강원 사미니과 졸업
1960~1981 청룡사 총무 소임
1971 청룡사 사교과 졸업
1981 청룡사 주지 취임
1987 청룡유치원 개원
1999 호국청룡사(육군 9067부대) 개원
청룡사 주지
2019 입적
문중 법기문중(法起)
생활신조 쉼 없는 정진
상훈 총무원장상 수상(1990) 외 다수
취미 독경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천. 일여(一如)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계흔(桂昕, 5)→창수(昌守, 6)상근(祥根, 7)윤호(輪浩, 8)진우(眞愚, 9)→혜묵(慧黙, 10), 일여(一如, 10)

활동 및 공헌

출가

진우(眞愚)스님은 1934년 7월 19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에서 아버지 이제춘과 어머니 오아지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외딸인 스님을 데리고 수절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모녀가 함께 출가의 인연을 맺었다. 진우스님은 나이 15세 되던 1948년 청룡사에서 윤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그 해 스님은 청룡사에서 보산(寶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청룡사에서 지내던 중 6·25전쟁으로 어머니를 잃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 절집 법도를 익히느라 힘든 가운데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울다가 야단을 맞은 적이 많았다.

교육과 수행, 청룡사 주지 역임

스님은 1954년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고, 1958년 동학사에서 사미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은사스님의 부름으로 청룡사에 와서 23세까지 공양주 소임을 살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1960년부터 20년가량 청룡사 총무소임을 살았고, 1971년에는 청룡사에서 사교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81년에 은사스님의 뒤를 이어서 청룡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청룡유치원 개원

1987년 진우스님은 청룡유치원을 개원하여 어린 불자들에게 착한 마음을 심어 주기 위한 가르침을 폈다. 처음 2~3년 동안은 무료로 운영하였으며 현재는 만덕사 정명스님이 유치원을 맡고 있다. 더 나은 교육과 유치원의 발전을 위해서 젊은 스님에게 운영을 맡겼는데 후배에게 큰 뜻을 펼칠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호국청룡사 개원

한편 진우스님은 군부대 포교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어서 1999년에는 육군 제9067 부대에 군법당 55평을 건립하여‘호국청룡사’를 개원하기도 하였다.

보시행과 후학양성의 당부

스님은 새벽3시에 예불을 거르지 않는 스님은 항상 무주상 보시를 강조하며 자신의 선행이 남에게 자랑으로 드러나는 일을 매우 싫어하였다.

1년에 영등포 보현회 집에 쌀 100 가마, 목동청소년회관에는 50가마씩 후원을 하고 있다고 주위 분이 귀뜸을 해주었지만 진우스님은 끝내 말씀도 없다. 요즈음은 ‘앞으로의 불교를 위하여 선지식을 키우는 장학불사가 중요하다.’며 후배를 키우는 일에 매진하였다.

청룡사는 단종왕비(정순왕후)가 16세에 들어와 80평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는 자주승방이라고 불렀다. 저고리 끝동과 고름을 자주색 물을 들여 내다 팔아서 사중 살림을 꾸려나가기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정순왕후가 단종이 계신 강원도 영월을 바라보면서 일생을 외롭게 살아서 ‘영리(永離)절’이라고도 불렀다.

청룡사에서는 매년 9월9일이면 정순왕후비각에 제를 지낸다. 제를 지내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진우스님은 유치원 개원을 준비하면서 구청에 서류를 제출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좀처럼 유치원 개원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일을 고심하고 있던 차에 정순왕후 비각에 지극한 정성으로 제를 지냈는데 곧바로 허가가 났고, 그 후 지금까지 제를 지내게 되었다. 현 심검당 건립을 위해 불기 2991년(1964)서병석 거사가 목재를, 진한득 거사가 석재를 보시하였고 김용주 거사가 불상을 조성하였다.

수계제자

수계 제자로는 혜천·일여스님이 있다.(‘한국의 비구니 문중’에는 혜묵(慧黙)・일여(一如)라고 나온다.)

청룡사

[청룡사 대웅전]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171
[청룡사 일주문]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171
[정업원구기(비석)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hsykms.tistory.com/1212

청룡사는 예로부터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어머니)가 기도처로 삼기도 하였으며, 특히 상근(祥根) 노스님을 통해 민 중전(민비)과 후궁에 대한 일화도 전해져오고 있다. 당시 광화당 항아님이 잉태를 하여 법륜사 뒷채에 몰래 숨어 지냈는데, 나한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에 꿈에 초립동을 만났다고 한다. 기도 덕분인지 하루는 궁에서 가마를 보내 항아님을 데려 오게 하였다. 항아님은 민비의 해(害)를 입을까봐 두려웠지만 나한님의 가피로 결국 왕자를 생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청룡사는 922년(고려 태조 5년)에 도선(道詵)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지어졌으며,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에 지어져서 청룡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스님의 수행 도량이었다. 1036년(고려 정종 2년)에 만선(萬善)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고려 의종 12년)에 회정(懷正) 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때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時) 창건 이후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 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고려 충렬왕 25년)에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스님이 중창하였고, 그 뒤 조선시대에 와서는 1405년(태종 5년)에 무학(無學)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또 1512년(중종 7년)과 1624년(인조 2년)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1771년(영조 47년)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定順)왕후가 머물렀다고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라는 글을 내려서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이 잠시 ‘정업원(淨業院)’으로 바뀌었다. 1813년(순조 1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스님과 수인(守仁)스님이 다시 중창하였고, 1923년(순조 23년)에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02년(고종 6년)에 정기(正基)스님과 창수(昌洙)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祥根)스님이 중창하였다. 1954년에서 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스님이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이룩하였고, 1973년에 대웅전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고려말의 명신(名臣)인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청룡사에 거주하였고,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기도 하였다.

세조에 의해서 폐위된 후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은 단종은 유배를 갈 때 단종비(端宗妃) 정순왕후 송씨와 청룡사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고, 왕비는 스님이 되어 영월 방향의 동쪽 언덕에 올라서 단종의 무사 귀환과 넋을 달랬다고 한다. 그 장소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한다. 동망봉은 청룡사 동쪽 앞에 우뚝 솟은 바위산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현재 숭인공원(일명 동망산공원)이 있다. 숭인동과 보문동의 경계가 되는 동망산 서쪽 부분은 일제 때부터 광복 이후까지 채석장으로 쓰여 산의 반쪽이 사라져 절벽이 되었다.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과 이별을 한 후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成智) 세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 암자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송씨는 아침저녁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으나 세조 3년(1457년) 10월 4일 헤어진 지 4개월 만에 영월에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이 후부터 송씨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고혼(孤魂)이 헤매는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영조 47년(1711년), 영조는 창덕궁에 갔다가 현재 동대문구 숭인동인 연미정동(燕尾汀洞)의 정업원을 들러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물어보았다. 이때 전 참판(參判)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 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영조는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친히 청룡사 자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 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는 동망봉 정상 주변까지 주택이 밀집하여 바위산 봉우리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는데, 정순왕후가 단종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곳에는 동망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이 산신각은 언제 누가 세웠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5세기경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인명과 가축의 피해가 심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산제(山祭)를 지내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이면 이 산신각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46-49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진우(眞愚)스님 본항목 진우스님(眞愚, 1934~) 眞愚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진우스님(眞愚,_193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진우스님(眞愚)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진우스님(眞愚) 윤호스님(輪浩) ~의 수계제자이다
진우스님(眞愚) 서울 청룡사 ~에서 출가하다
진우스님(眞愚) 보산스님(寶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진우스님(眞愚)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진우스님(眞愚) 서울 청룡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진우스님(眞愚) 청룡유치원 ~을(를) 건립하다
진우스님(眞愚) 강원고성 호국청룡사 ~을(를) 창건하다
진우스님(眞愚) 안거 ~을(를) 성만하다 제방선원

지도

  • 청룡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