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지우스님(至牛, 1935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6일 (월) 13: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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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지우(至牛)스님은 범어사 대성암에서 일광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김천 봉곡사를 중창하였다. 평생 바르고 곧은 마음으로 산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5 경남 김해 출생
1956 범어사 대성암에서 일광(一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7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0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운문사 강원 입학
1961~1967 김룡사 교무 역임
1968~1971 운문사 재무 역임
1978 김천 봉곡사 주지
1985 명부전 개축
1990 대웅전 증축
1994 사적비 건립
1999 요사채 명월료 완공
2004 봉곡사 주지
문중 일엽(一葉)문중
생활신조 바르고 곧은 마음으로 사는 것
상훈 직지사 가람수호 표창패(1986,1994)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원만(圓滿)・송원(松原)・태원(太源)・현문(炫門)・홍진(洪珍)・능현(能賢)・선일(禪一)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일엽(一葉, 1)일광(日光, 2)지우(至牛, 3)→원만(圓滿, 4), 송원(松原, 4), 태원(太源, 4), 현문(炫門, 4), 홍진(洪珍, 4), 능현(能賢, 4), 선일(禪一, 4)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460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468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469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468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467

청한(晴閒) 지우(至牛)스님은 1935년 3월 31일에 경남 김해시 내외동에서 아버지 허상달과 어머니 밀양 손씨 법우행 보살의 3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허영자이다. 스님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출가한 친척되는 무옹 큰스님이 계셨다. 1947년 김해 합성 국민학교를 거쳐 김해 여자 중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우연한 기회에 수인사에서 속가의 무옹 큰스님을 만나 뵙고 신심이 발하여 출가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스님의 이런 발심에, 이전부터 진중한 불연이 닿아있던 독실한 불교 집안의 부모님들은 기꺼이 허락을 하셔서 스님은 아무런 장애 없이 불문에 귀의할 수 있었다. 불심이 깊었던 가족들은 무옹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일체의 오신체를 금하였다. 또한 농사를 지어 처음 추수를 하면 먼저 부처님께 올리는 심부름을 스님이 도맡아 했다. 이렇게 하여 지우스님은 1956년 음력 3월 스님의 나이 22세에 범어사 대성암에서 일광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교육

출가한 다음 해인 1957년 3월 15일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다시 3년 뒤인 1960년 3월 15일에 범어사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그해 운문사에서 『서장』을 배우던 중 정화가 되는 바람에 그곳을 나와 김룡사에서 7년 동안 교무 소임을 맡았다. 김룡사와 운문사에서 재무소임을 맡다.

김룡사에서 생활할 때 유난히 손재주가 뛰어났던 스님은 그림 솜씨 또한 출중하여 16나한을 그리는데 직접 참여하여 얼굴 부분을 그리는 등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스님은 1968년부터 운문사에서 4년 간 재무 소임을 보았다.

봉곡사로 오다

봉곡사에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는 주지로 위촉되어 소임을 보다가 1981년에 주지에 정식 취임하였다. 스님이 봉곡사에 처음 왔을 때는 그 전까지 살던 대처승이 풀을 키워 염소를 먹이며 살았기 때문에 도량 전체가 온통 풀밭이었다. 또한 도량에 쌓여있던 낙엽은 이후 3년 8개월을 치워야 했다.

스님이 낙엽을 치우자고 신도들에게 부탁을 하고 설득을 하니, 오히려 되지도 않을 일을 시작하는 스님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정도로 도량은 황폐했었다.

현재의 마당은 그 당시 작은 야산이었는데 스님이 개간하여 마당으로 만들었다. 당시 신도들이 대웅전 옆으로 호랑이가 나올까봐 못 간다고 할 정도로 숲이 무성하였으나 스님의 지고지순한 불사의 원력으로 현재의 거룩한 도량을 이뤄냈다.

봉곡사 불사

불사의 과정을 살펴보면, 1985년 3월에 명부전 20평을 해체하고, 그해 음력 10월 개축을 하였으며, 1985년부터 쌓기 시작한 담장 공사는 1987년에 완성하였다. 또한 1990년에 24평의 대웅전 불사를 시작하여 1991년 음력 1월에 완공하였고, 1995년에는 대웅전 단청을 완성하였다. 1994년부터 5년간에 걸쳐 2,500만원의 경비를 들여 사적비를 세웠으며, 이후 1999년 3월 1일에 32평의 명월료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 5월 10일 완공하여 입주하였다. 현재 봉곡사의 전체 부지는 천 평이 넘는다. 스님의 노력과 결실의 열매가 청정도량의 모습으로 우뚝 선 것이다.

이와 같은 스님의 노고에 감사하는 뜻을 기려 1986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본사인 직지사로부터 가람 수호 표창패를 받았다.

2004년 지우스님은 김천 봉곡사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수계 제자로는 원만(圓滿)·송원(松原)·태원(太源)·현문(炫門)·홍진(洪珍)·능현(能賢)·선일(禪一)스님 등이 있다.

봉곡사

[봉곡사 대웅전] 사진출처 :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3316

홈페이지: https://blog.naver.com/bonggoksa

봉곡사는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 2리 880에 위치하고 있다. 전래하는 ‘봉곡사중수사적비명’에 의하면, 신라시대 자장대덕이 도량을 개기하고 이어서 고려말기에 도선국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기록된 영휴 대사의 ‘봉곡사 사적’(1685년)에는 동상실 화재시(1717년) 습득한 상량문을 인용하여 ‘고려 태조 천수 5년(922년) 도선국사 개창’이라 하였으므로 그 개기에 혼란이 있다.

그러나 영휴대사는 사적을 편찬하고 나서 13년 후 사승 현윤 대사의 간청으로 사적기를 다시 재록하였는데, 자장 대덕의 개기 후 고려 초 도선국사에 의하여 개창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봉곡사 사적’에는 봉곡사가 가장 왕성하였던 1700년대만 하여도 18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을 위시하여 동산실과 2동의 요사만이 전해진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지우(至牛)스님 본항목 지우스님(至牛, 1935~) 至牛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지우스님(至牛, 1935生, 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지우스님(至牛) 일엽문중(一葉) ~의 일원이다
지우스님(至牛) 일광스님(一光) ~의 수계제자이다
지우스님(至牛) 범어사 대성암 ~에서 출가하다
지우스님(至牛)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지우스님(至牛) 김천 봉곡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지우스님(至牛) 김천 봉곡사 ~을(를) 중창하다

지도

  • 봉곡사 :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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