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스님(智明, 1921生, 비구니)
지명(智明)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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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지명(智明) |
법호 | 월조(月照) |
속명 | 김효순 |
출생 | 1921.07.09. |
출가 | 1931년 |
입적 | 2013.12.04. (세수93세, 법랍 80세) |
사찰 |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 33-4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지명(智明)스님은 2대 화운사 주지를 맡아 대웅전 증개축, 강원(講院)과 선원(禪院) 설립하고 절 소유 전답의 확장, 농장 운영 등을 통해 화운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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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경기도 수원 출생 |
1931 | 수덕사에서 도덕(道德)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3 |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36 | 수덕사 견성암에서 정진 |
1938 | 수덕사 강원 사집과 수료 |
1942 | 석우(石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43~1945 | 쌍계사 국수암에서 안거 |
1946~1952 | 견성암에서 수선 안거 |
1952 | 서산 개심사 주지 |
1957 | 용인 화운사 주지 취임 화운사 강원 개설 |
1967 | 화운사 150평 규모 강원과 선원 신축 |
1973 | 화운사 대강당 준공, (재)능인선원, 서예학원 설립인가 이사장 |
1975~1985 | 전국비구니회 회장 역임 |
1988 | 능인선원 개원,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3 ・ 4 ・5회 존증아사리) |
1990 | 주지 퇴임 |
1991~2004 | 화운사 주석 |
2013.12.4. | 화운사에서 입적(세수93세, 법랍 80세) |
문중 | 실상(實相)문중 |
수행지침 | 性空復境寂 心月照十方 (성품도 공하고 경계도 공한데, 마음 달이 시방 세계를 비추네) |
생활신조 | 모든 것은 정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상훈 | 불교방송 사장 감사패 ・용인군수 감사패 |
저서 및 작품 | 달빛은 우주를 비추네』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혜준(慧俊)・혜인(慧仁)・혜범 ・혜림(慧林)・혜돈(慧頓)・혜완(慧完)・혜주(慧柱)・혜도(慧道)・혜설(慧說)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실상(實相, 1)→순동(順同, 2)→의선(義善, 3)→도덕(道德, 4)→지명(智明, 5)→혜준(慧俊, 6), 혜인(慧仁, 6), 효범(孝范, 6), 혜림(慧林, 6), 혜돈(慧頓, 6), 혜완(慧完, 6), 혜주(慧柱, 6), 혜도(慧道, 6), 혜설(慧設, 6) |
활동 및 공헌
출가
월조(月照) 지명(智明)스님은 1921년 7월 9일 수원 종로구 팔달로 2가 105번지에서 부친 김익배와 모친 안간난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효순이다. 스님은 11살 때 금강산 유점사 근처에서 암자를 얻어 수양을 하고 있던 이모님을 뵈러 유점사에 갔다가 당시 유점사 조실로 계신 만공 큰스님을 뵙게 되었다.
한 겨울에 40리 길을 걸어서 왔다는 말을 들으신 만공 스님께서“보통으론 못 오는 곳인데 어린 것이 인연이 깊어서 여기까지 왔구나. 참선을 한다면 견성할 수 있겠구나”하시는 말씀에 스님은 귀가 솔깃해졌다. 어린 효순은 참선이나 견성이 무슨 소리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막연하게나마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발심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스님의 이모님은 먼저 발심을 하여『법화경』7권을 모두 읽고 3년 동안 공부하신 뒤 출가하였다.
그 당시 유점사 선방에는 53분의 스님들이 모여 정진을 하고 있었다. 어린 효순도 신바람이 나서 스님들 흉내를 내며 앉아있게 되었다. 그때 만공 큰스님께서 어린 효순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라는 화두를 내려주시고 공부하도록 하였다. 스님들은 어린 효순을 귀여워해 주시고 때론 장난도 곧잘 치셨는데 어느 날“참선을 열심히 하면 쥐가 나온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쥐가 나온다는 그 말이 장애가 되어 자꾸 쥐만 생각하다 보니까 쥐가 막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생각을 안 하니까 쥐가 금세 없어져 버리는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어린 마음에도 무엇인가 느껴지는 듯해 고개를 끄덕거리곤 하였다.
이모님을 뵙기 위해 금강산에 가 있는 동안 아직 어린 아이인지라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 속가로 내려간 적이 있는데 산중의 그 거룩한 모습과 스님들의 수행생활이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만공 큰스님이 겨울철을 나신 후 수덕사로 옮겨가시면서 이모 역시 견성암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이에 효순도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수덕사로 향하게 되었는데 가는 길목의 풍경마다 점입가경인지라 더욱더 신심을 발하게 되었다.
견성암에 당도하니 스님들이 돌아가신 부노장과 많이 닮았다면서‘부노장 부노장’하며 출가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어린 효순은 꼬박 사흘 밤낮을 고민한 끝에 견성을 해야겠다는 작심(作心)을 하고 머리를 깎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스님들이 '아직 어린 아이이니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속가에서의 인연이 쉬이 끊어지지 않아 어머니가 그립긴 하지만 발심이 가득 찬 어린아이는 견성을 하기 위해 참기로 마음 먹고 급한 마음에 삭발을 하였다. 그 때 스님의 나이 겨우 11세, 1931년의 일이었다. 도덕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지명(智明)'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민첩하고 영민하여 수행자로서 삶의 계획을 확고히 하였다. 1934년 14세 되던 해에 스님의 속연과 영민함을 일찍이 꿰뚫어 보신 만공 큰스님께서 견성암에서 제일 시봉하기 어려운 스님을 모시라고 하셨다. 당시 지명스님을 따라 화운사에서 재출가를 하여 마지막까지 함께 지내다가 입적한 스님도 있다고 한다.
전쟁 시 보살행과 수학=
그 후 6·25전쟁이 일어나 스님은 마곡사로 피난을 갔는데 이미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와 있는 상태였다. 이때 스님은 어려운 살림에 도움이 되고자 수행자로서 떡 장사와 엿 장사 등을 하면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였다.
행자시절부터 수행자는 대중 앞에서 감정을 내보임이 없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쉽게 화를 내지 않는 등 절제된 생활을 하였으며, 일에 게으름을 부리지 않아‘덕숭산의 보살’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그때는 일체 대중이 주경야독으로 밤잠을 아끼어 정진을 하던 때였다. 유독 신심을 다하여 공부였던 스님은 궂은 장소, 좋은 장소 가림이 없이 다락방에서 공부를 하며 수덕사 강원에서 사미니·사집『능엄경』을 보고난 후 사교입선을 하였다. 1940년 20세 되던 해에 처음 힘을 얻고 만공 큰스님의 지시로 1943년 23세부터는 도감 소임[1] 을 살면서 행주좌와에 힘을 써서 공부를 하였다.
수행과 가람수호
오랫동안 소임을 살고 난 후 2철 휴가를 얻게 되었는데, 이때 못다 한 참선(參禪)공부에 매진하려는 마음을 가득 실어 선방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스님의 구도 열정을 부처님이 살피신 것인지 대중 따라 공부하며 애를 쓰지 않아도 절로 공부가 되었다. 이에 스님께서는 잠도 잊고 그저 환희심에 젖은 정진으로 지견을 얻게 되어 만공 큰스님으로부터 잘했다는 말씀을 듣기도 하였다.
견성암에서 힘겨운 시절을 지낼 당시, 스님들은 5리가 넘는 곳에서 농사를 지어 등에 걸머지고 걸어와야만 했고, 사정이 어려운 스님들은 탁발을 하여 양식을 들여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대중 모두가 신심에 가득차 협력이 잘되어 모든 것을 수월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고, 자비로운 스님의 모습에 따르는 대중도 많아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살 수 있었다.
정화 후 토지분배가 이루어질 때 토지를 팔아 견성암에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토지분배를 해주지 않자, 어렵게 80마지기를 얻어 헐값으로 팔아 견성암에 12마지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셨다. 스님께서는 소임을 살면서도 공부에 방해가 되어 가급적 말을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교만하다고 지적하여 무조건 사람을 보면 빙그레 웃으시면서 공부를 하였다.
만공스님
스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만공 큰스님이다. 큰 스님께서는 항상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평등심이 강하셨고, 공부를 가르치는데 세밀하시고 자상하셨으며 평소 시중 공부를 주장하셨다. 스님은 이 시중 공부를 항상 염두에 두며 초발심자경문의‘평등성중(平等性中)에 무피차(無彼此)하고 대원경상(大圓鏡上)에 절친소(絶親疎)니라, 일인장락(一認長樂)이어늘 하불수재(何不修哉)리오.’라는 문구를 항상 애송하였다.
화운사와의 인연
스님이 이곳 화운사에 머문지는 40년이 넘는다. 출가하신 이모님이 경기도 백암에 가지고 있던 논 80마지기를 선학원에 등록해 놓고, 수확기 때 추수를 보기 위해 백암까지 왕래 하다가 우연히 화운사를 알게 되었다. 당시 화운사에는 비구니 스님이 주지로 계셨는데 이후 지명스님이 화운사를 인계 받았다. 스님은 그 곳에 포도나무 등 묘목을 심고 과수원을 만들어 새롭게 단장하였다. 한때 승가학원이기도 하였던 화운사는 그다지 높지 않은 멱조산(覓祖山) 한편에 고요히 자리한 도량으로 지금은 선원을 열어서 납자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다.
후학들에 대한 당부
지명스님는 학인들에게 특별히 몇가지 강조하는 바가 있다. 먼저 '발심을 해야 하며, 경을 보는 것도 선이기 때문에 신심을 갖고 '무엇이 경을 읽느냐?'하는 의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려로서 무슨 일을 하던지 피하지 말고, 지견을 얻겠다는 생각도 말고, 어떤 경계를 당하여도 화두로서 밀고 나가면 화두가 더 성성하여지니 정진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한다. 또한 '포교에 매진하거나 학교를 가는 젊은 학인들은 현시대에 응하여 생각을 조각내지 말고 무엇에 임하든‘무엇이 이렇게 하는가?’를 살피며 목적, 즉 본문(本分)을 마음에 담고 항상 여의지 않아 일용사(日用事)에 집착을 버리고 항상 꾸준히 정진할 것'을 강조한다. 덧붙여 '퇴굴심이 일어날 때면 신심껏 절을 하되‘무엇이 이렇게 하나’를 관하라.'고 일러주곤 한다.
지명스님의 상좌스님들은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스님을 뵈면 안 좋던 마음이 가라앉고 뵙기만 해도 환희심이 난다고 한다. 스님은 성품이 착해서 큰소리를 안 내고 법대로 대중 공사를 통하여 해결하였다. 상좌들을 경책할 때는 산으로 모아 야단을 치는데 회초리를 해오라 해서 법대로 몇 차례 경책하고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ㄹ하였다. 또 살면서 크게 소리치거나 화를 내는 법이 없고, 이기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무슨 일이 일어도 당신의 정진력이 흐트러짐이 없다고 상좌스님은 이야기한다.
만공스님은 '서구의 물질문명이 동양으로 건너오고 동양의 정신문화가 서양으로 건너가리라.'고 이미 오래 전에 예견하셨다. 지명스님은 여기에 더하여 물질과 과학은 한계가 있으나 불교는 인생 철학을 더욱더 승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정신 문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생멸증감에 흔들리지 않는 불교의 미래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선방을 짓는 불사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로 7천 염(念)씩 정근하고 또 시주 은혜를 생각하시며 늘 축원으로 하루 시작하였다. 가끔 건강을 묻는 학인을 향해 그냥 그대로 산다고 답하였다. '어떻든 정진 속에서 무엇이든 하되, 사회사업도 빠뜨리지 말고 하라.'며 비구니 총림을 주장한 스님은 칠십에 가까운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젊은 학인 못지않은 정진력으로 정진하였다.
입적
스님은 2013년 12월 4일 화운사에서 입적했다. 스님의 저서로는 『달빛은 우주를 비추네』가 있으며, 수계제자로는 혜준(慧俊)・혜인(慧仁)・혜범 ・혜림(慧林)・혜돈(慧頓)・혜완(慧完)・혜주(慧柱)・혜도(慧道)・혜설(慧說)스님이 있다.
용인 화운사
화운사는 용주사의 말사로 멱조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38년 우암 차재윤재거사가 창건하고 이화응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1957년 3월, 비구니 지명(당시 개심사 주지)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48평 규모의 강원을 마련하고 개심사에서 지도하던 학인 15명과 성능스님을 강사로 개강하였다. 1962년 대은(大隱)스님이 강사로 취임하였고 그해 10월에 조계종단에 사찰등록을 하였다.
1974년 10월 강원 명칭을 능인승가학원으로 개칭한 이후 1985년 9월 대교과 17명이 졸업하고 그해 10월에 화운승가학원의 문을 닫았다.
화사 능인선원은 1987년 3월에 선원 104평을 중창하여 1988년 4월 원담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개원하였다. 1975년 지명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뒤 법당 옆에 건평 22평의 선방을 지어 납자들의 참선 공간을 마련하였다. 1967년 1백 50평 규모의 강원과 선원을 지었으나 이때 선원이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1972년에는 일하면서 공부하는 '용인선농예(龍仁禪農藝)학원'이 세워졌다.
본격적으로 선원을 개원한 것은 1987년 3월 선원 104평 중창하여 이듬해 1988년 4월 원담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대중들이 정진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9년에는 건평 112평 (1층88평, 지하24평)의 선원체를 증축하였다. 수용 인원이 20명 정도 되는 화사 능인선원은 대웅전을 향하여 좌측에 들어서 있으며, 정면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25평 규모의 큰방과 지대방, 그리고 다각실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295~302.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 457.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432.
- 네이버 지식백과 –디지털용인문화대전 –화운사 출처
- 『용인군지』 (용인군지편찬위원회, 1990)
- 『용인시사』 6 ( 용인시사 편찬위원회, 2006)
- 현대불교신문, 화운사 능인선원 선원장 지명 스님(2005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597
- 불교신문, 전국비구니회 회장 역임했던 지명스님 입적 (2013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035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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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智明)스님 | 본항목 | 지명스님(智明, 1921~2013) | 智明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지명스님(智明,_192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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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스님(智明) | 실상문중(實相) | ~의 일원이다 | |
지명스님(智明) | 도덕스님(道德) | ~의 수계제자이다 | |
지명스님(智明) | 예산 수덕사 | ~에서 출가하다 | |
지명스님(智明) | 만공스님(滿空)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지명스님(智明) | 석우스님(石友)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지명스님(智明) | 서산 개심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지명스님(智明) | 용인 화운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지명스님(智明) | 용인 화운사 | ~을(를) 중창하다 | |
지명스님(智明)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하동 쌍계사 국수암, 예산 수덕사 견성암 |
지명스님(智明) | 계단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3-5회 존증아사리) |
지도
- 화운사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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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