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춘스님(慧春, 1919生, 비구니)
혜춘(慧春)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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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혜춘(慧春) |
법호 | |
속명 | 유송죽(劉松竹) |
출생 | 1919.07.20. |
출가 | 1952년 |
입적 | 1998.11.06. (세수80세, 법랍48세) |
사찰 | 해인사 보현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21-1(치인리 1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혜춘(慧春)스님은 불굴의 구도정신으로 출가 수행한 진정한 수행자이며, 비구니 ‘청해문도회’를 태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지금의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비구니회’를 발전시킨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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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함남 북청 출생 |
1937 | 함남 함흥여고 졸업 |
1952 | 해인사 약수암에서 창호(彰浩)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2 | 인곡(麟谷) 창수(昌洙)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윤필암 사불선원, 석남사, 대성암 등 36안거 성만 | |
1954 |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 제2회 임시 종회시 종회의원 |
1960 |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2 | 해인사 보현암 창건, 비구니선원 개설 |
1985~1995 |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초대 회장 |
1988~1989 | 사회복지법인 목동청소년회관 관장 |
1998 | 1998.11.06. 해인사 보현암에서 입적(세수 80세, 법랍 48세) |
문중 | 청해(靑海)문중 |
수행지침 | 신시일입미(信施一粒米) 중여수미산(重如須彌山) 어차도불성(於此道不成) 피모재각환(被毛載角還) |
생활신조 | 최소의 생활로 최대의 노력을 하자 |
상훈 |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1988)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서용(瑞庸)·정안(正眼)·보현(普賢)·정명(正明)·현웅(玄雄)·법진(法眞)·현조(玄照)·종각(宗覺)·현응(玄應)·정지(正智)·정광(正光)·대현(大玄)·일운(一雲) |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춘(慧春)스님은 1919년 음력 4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에서 아버지 유태설과 어머니 이항금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며, 이름은 유송죽이다.
스님은 함경남도 함흥여고를 졸업하고 3년 후인 1940년에 남쪽으로 내려왔다. 나이 22세였다. 그 뒤 해방을 맞이하면서 인고에 사무친 현실의 무상과 인간의 욕망에 따라 변해 가는 세태를 보며 내면을 향해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6·25전쟁이 발발하여 스님은 다시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쓰디쓴 고통을 맛보았다.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절감하면서 철저히 혼자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이 즈음 불교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는데, 불갑사에서 지금의 해인사 방장이신 법전스님을 만난 것이다. 법전스님에게 출가를 권유받은 스님은 얼마 후 율사이신 자운(慈雲)스님의 『법망경』 법문을 듣게 되었다. '시간이 빠른 것은 달아나는 말과 같고, 생명이 급한 것은 산 위에서 물을 붓는 것과 같으며 줄어드는 물 속에 있는 고기와 같다.'
『법망경』 서문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 마치 스님 자신에게 하는 것 같고, 세상살이가 너무 부질없는 것 같아 중노릇 밖에 다른 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별다른 갈등 없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성철스님을 설득한 출가 의지
혜춘스님은 천제굴에 머물고 있는 성철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듣고는 출가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당시 그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고 있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출가의 결단을 내린 데는 성철스님의 영향이 컸다.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부친이 판사이고 시아버지가 도지사였다.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인생의 근본목적과 삶의 무상을 깊게 느낀 그가 불법에 귀의처를 찾게 되어 출가의 길에 들어서기를 작심하고 성철스님을 찾았으나 스님은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인홍스님은 어느 날 성철스님의 전갈을 받았다. ‘사람 하나 보내니 도량엔 받아들이되 선방엔 들이지 마시오’ 성주사에 있던 혜춘스님을 지도하는 성철스님의 말씀에 인홍스님은 그대로 따랐다. 혜춘스님은 삭발하지 못한 채 법당 추녀 밑에 거적을 깔고 앉아 화두를 들었다. 대중들이 법당에서 예불을 드릴 때도 들어갈 수 없었고 선방에서 입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법당과 선방은 추녀 밑 볕이 들지 않는 음습한 거적 위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출가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부엌에 앉아 꽁보리밥에 소금에 절인 김치조각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드디어 스님은 6·25전쟁 와중인 1952년 혹독하게 두어 달을 보내고 나자 성철스님은 혜춘스님의 출가를 허락했고 비로소 인홍스님께서 총림을 세운 창원 성주사에 계시는 창호(彰浩)스님을 은사로 해인사 약수암에서 출가득도 하기에 이른다. 이때 스님의 세수 34세였다. 같은 해 해인사에서 인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았다.
- 출처: 불교신문 2012.1.26.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930
물러남이 없는 구도 의지
출가 이듬해 대승사 윤필암의 사불선원에서 첫 안거를 마치고, 제방 선원에서 수선 안거에 전념하면서 용맹정진을 거듭하였다. 성철 큰스님이 구도 정진 중이던 경남 통영의 안정사 천제굴을 찾은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혜춘스님은 성철 큰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수행하겠다는 마음으로 천제굴을 찾았으나, 성철 큰스님은 인사만 받고 해질 무렵 스님에게 암자를 떠나라는 눈치를 주셨다. 스님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으나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잠시 사색에 잠겼던 혜춘스님은 다시 천제굴을 찾아 행자에게 큰스님 뵙기를 청했다. 그러나 큰스님은 매정하고 단호했다. 암자가 있는 계곡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기온도 뚝 떨어져서 매서우리만치 추웠다. 그래도 혜춘스님은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큰스님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세숫대야에 찬물을 가득 담아 스님에게 다가서더니 그만 확 끼얹어버리는 것이었다. 때는 엄동설한이었다.
혜춘스님은 물에 젖은 승복을 그대로 입은 채 곧바로 소나무 아래에서 결제에 들어갔다.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추운 겨울 꽁꽁 언 주먹밥을 개울물에 녹여 먹고 밤이면 소나무 아래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거듭하며 큰스님의 가르침을 구하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혜춘스님은 마침내 '성주사로 가서 십만배를 하고 돌아오면 받아 주겠다고 전하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 길로 마산 성주사로 떠난 혜춘스님은 일주일 만에 십만 배를 마치고 돌아왔다.
마침내 스님은 그렇게도 원했던 큰스님으로부터 법음을 들을 수 있었다. 혜춘스님과 성철 큰스님의 법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그 후 스님은 평생 동안 성철 큰스님의 영향을 받으며 선지를 익혔다.
멸빈암 결사
스님은 젊은 시절 도반 13명이 각자 30만 원씩 탁발을 하여 성주사에 농막을 하나 구입했다. 농막 이름을 '멸빈암' 이라 짓고, 13명의 스님들은 결사에 들어갔다. 당시 멸빈암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여기서 공부 성취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그 추운 겨울에 물속에 들어가 앉아 있는 등 혹독한 고행을 감수하였다. 당시 입승은 성우스님이 보셨는데, 공부 중에 누군가 졸기라도 하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 “여기가 어딘데 졸고 있느냐.”며 호통을 치고 발로 차기도 하며 경책을 하였다.
불교정화운동 동참
그토록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혜춘스님은 촌음도 화두를 놓지 않은 비구니 선객이었다. 1954년 종단 정화불사가 마치 요원처럼 불타오르던 때에는 부처님의 정법 혜명을 바르게 이어가려는 수행자인 비구니들도 '자신의 안심입명만을 위해 좌시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여러 도반들과 함께 분연히 정화운동 불사에 동참하였다.
지칠 줄 모르는 구도열
그 후 석남사에서 입승[1] 을 살면서 수선 안거를 하고 1961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그로부터 석남사 상선원에서 10여 년 동안 입승을 산 것 역시 스님의 구도력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듯 청정한 계행과 불퇴전의 수행력으로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사부대중의 귀감이 되었던 스님은 석남사 입승 소임을 끝마친 후,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인홍, 장일, 성우스님과 함께 3년 결사를 나기에 이른다. 1970년 스님의 세수 52세 때의 일이었다. 혜춘스님의 지칠 줄 모르는 구도열에 납자들의 칭송이 제방 선원을 오르내렸다.
3년 결사를 해제한 스님은 1972년 가야산 산록에 비구니 선원을 창건, 개설하였으니 지금의 보현암이 바로 그것이다. 뒤이어 납자를 제접하고, 수행하는 납자들의 외호에 전력하였다.
제방의 납자들이 스님의 회상에서 안거를 성만하고자 다투었지만, 스님은 세수 50세가 넘을 때까지 상좌를 두지 않았다. 상좌를 두면 공부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저 제방 납자들과 도반이 되어 공부하고자 스스로 다짐할 뿐이었다. 스님이 석남사 입승 당시 서용스님이 상좌가 되기를 청했으나 “나보다 더 훌륭한 은사를 만나서 공부하라.”고 이르고는 걸망을 메고 운수 행각을 떠나버렸다. 그렇지만 서용스님은 3년 동안을 기다렸다.
스님이 상좌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보현암을 창건한 후부터였다. 상좌 되기를 희망하는 많은 니승들의 간청과 도반들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후학들은 혜춘스님을 이르기를 ‘한 생을 푸른 눈으로 수행한 무욕의 납자요, 또 진리를 보지 못하는 뭇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고 진리를 깨우쳐주는 지혜와 자비의 화신으로 살아가기를 갈망하고 구현했던 대비구니’로 칭송하고 있다.
평소 스님이 즐겨 외우며 스스로를 경책하고 후학들에게 전했던 금언은 구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한마디로 전해준다.
신시일입미(信施一拉米)가
중여수미산(重如須彌山)이니
어차도불성(於此道不成)하면
피모대각환(被毛戴角還)이라
쌀 한 톨의 시주물이
수미산의 무게와 같으니
마땅히 도를 이루지 못한다면
짐승의 몸을 받을 것이다.
이 금언은 검박함과 시은(施恩) 그리고 출가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다. 스님은 이 금언처럼 일생 동안 무소유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고 지켰으며,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노구에도 마다하지 않고 원력을 세웠다.
청해문도회 발족
스님은 또 비구니 화합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취지로 1985년 10월 27일 해인사 약수암 등 비구니 암자와 김천 청암사 백련암, 동화사 내원암, 경기도 의정부 석림사, 경북 상주 용흥사의 장일, 상덕, 묘관, 보각, 성원, 용운스님 등 50여 명과 함께 ‘청해문도회(靑海門徒會)’를 발족하였으니, 비구니 청해문중의 태동이었다.
우담바라회에서 피어난 전국비구니회
만년의 대표적인 원력의 표징이 바로 자비 실천의 복지 활동과 전국비구니회관의 건립이었다. 스님은 1968년 1월에 발족한 최초의 비구니 모임인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비구니스님들도 도제를 양성하고 사회복지에 적극 동참하여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지금의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비구니회를 재조직하여 1985년 9월부터 1995년까지 초대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또한 스님은 1988년 서울 목동청소년회관에 대한 경영을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관장으로 재직하였다. 1992년에는 전국 스님들의 협조에 힘입어 서울 강남구 수서동 744번지에 약 13만 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전국비구니회관 건립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이 전국비구니회관은 1998년 9월 기공식을 갖고 2001년 11월 말 완공을 하였다.
불굴의 수행정진
스님은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도 비구니들이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래서 비구니회관 건립에 힘쓰고, 물러난 뒤에는 출가자의 본분사를 지키면서 윤필암, 석남사, 내원사, 대성암, 부도암, 범어사 등에서 무려 36안거를 성만하였다.
스님은 오랜 세월 참선수행에 전념해오면서 '일상 가운데 나를 찾는 것이 곧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座臥 語默動靜)'이라며,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백장청규 정신으로 하루 한 짐씩 땔나무를 해 오고 다섯 가지 곡식으로 밥을 지어 먹으면서 참으로 열심히 수행 정진을 하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정진한 스님은 '내가 정진하다 졸면 지옥은 내가 더 채울 것'이라 생각하며 수마를 항복받고자 추운 겨울에도 툇마루에 나가 앉아 밤을 지새워 가행정진을 거듭하였다.
혜춘스님 임종게
혜춘스님은 1998년 11월 6일 보현암에서 동틀 무렵 평소처럼 예불을 하고 여느 때처럼 아침 죽을 먹은 후에 대중에게 이런 게송을 남겼다.
여시래여래거(如是來如來去)
내거일여청풍만리(來去一如淸風萬里)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가는가.
오고 감이 한결 같은데 청풍은 만리로네.
입적
스님은 1998년“오늘 날씨가 좋지.” 하고는 채 여명이 밝기도 전에 고요히 입적하였다. 이때 스님의 세수 80세요, 법랍은 48세였다. 수계제자로는 서용(瑞庸)·정안(正眼)·보현(普賢)·정명(正明)·현웅(玄雄)·법진(法眞)·현조(玄照)·종각(宗覺)·현응(玄應)·정지(正智)·정광(正光)·대현(大玄)·일운(一雲)스님 등이 있다. 혜춘(慧春)스님이 1988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은 것은 스님의 자비 구현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또 하나의 징표였다.
해인사 보현암
보현암(普賢庵)은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 가야산 자락에 폭 안겨 있는 아늑한 비구니 도량이며, 해인사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혜춘스님이 1972년 봄부터 보현암 옛터에 불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보현암 요사를 짓고, 그 뒤 대웅전, 심검당, 향적당(香積堂) 순으로 절집을 신축하여 1984년에 마무리 지었다. 보현암의 역사가 곧 선원의 역사일 만큼 보현암은 선 도량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창건 이후 줄곧 비구니 납승들이 참선 수행을 해왔으나 보현암 선원이 공식적으로 개원된 해는 1977년이다. 이후 많은 비구니 납자들이 보현암 선원에서 수선 안거를 하였고, 오늘날까지 높푸른 선풍을 과시하며 비구니 선원으로서의 위치를 굳게 다져가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39~246.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73.
- 불교신문 2012.1.26.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93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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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춘(慧春)스님 | 본항목 | 혜춘스님(慧春, 1919~1998) | 慧春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춘스님(慧春,_191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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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춘스님(慧春) | 청해문중(靑海) | ~의 일원이다 | |
혜춘스님(慧春) | 창호스님(彰浩) | ~의 수계제자이다 | |
혜춘스님(慧春) | 해인사 약수암 | ~에서 출가하다 | |
혜춘스님(慧春) | 인곡스님(仁谷)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혜춘스님(慧春)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혜춘스님(慧春) | 해인사 보현암 | ~을(를) 창건하다 | |
혜춘스님(慧春) | 해인사 보현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혜춘스님(慧春) | 상훈(賞勳) | ~을(를) 수상하다 | 국민훈장 모란장 |
혜춘스님(慧春)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문경 대승사 윤필암 사불선원, 울주 석남사, 부산 법어사 대성암(청룡동)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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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해인사 보현암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21-1(치인리 10)
주석
- ↑ 사찰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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