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수인스님(守仁, 1779生, 비구니)
수인(守仁)스님 | |
---|---|
[[파일:|240px]] | |
법명 | 수인(守仁) |
법호 | |
속명 | |
출생 | 1779년 (비구니, 조선시대) |
출가 | 1784년 |
입적 | 1838년 |
사찰 | 청룡사(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수인스님은 조선의 비구니로, 삼각산 청룡사 제8 중창주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779 | (정조 3년) 서울 동소문 출생 |
1784 | 청룡사 각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
1813 | 청룡사 화재 |
1814 | (순조 14년) 청룡사 법당, 요사채 불사 |
1823 | 순원왕후의 환후 쾌차 기도 삼칠일 봉행 |
1838 | (헌종 4년) 세수 60세, 법랍 54세로 입적 |
활동 및 공헌
묘담스님과 합심하여 이뤄낸 중창불사
수인스님은 1779년 서울 동소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1784년 5살에 청룡사 각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청룡사에 있던 묘담스님과 의가 좋아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1813년 청룡사가 화재를 당해 폐허가 되자 묘담스님과 합심하여 중창 불사를 발원하였고, 시주자와 조정의 관리들을 찾아 불사를 모연하였다. 마침내 1814년(순조 14년) 11월 15일, 1년만에 법당과 요사채 10여칸을 상량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 상황에서 이뤄낸 큰 성취였다. 또한 1823년 영의정 김조순의 주청으로 딸인 순원왕후의 환후 쾌차 기도를 삼칠일간 봉행하여, 채단 10필과 대동목 20필, 백미 20석을 사사 받았다. 이에 김조순은 1771년(영조 47년)이후 ‘정업원’이라 불리던 절 이름을 ‘청룡사’로 환원하길 왕에게 청하여 이 해에 사명이 공식 환원되었다.
입적
이후 수인스님은 1838년(헌종 4년) 세수 60세, 법랍 54세로 청룡사에서 입적하였는데, 묘담스님이 입적한지 1년 만이라 당시 사람들은 사이가 좋던 두 스님이 ‘동왕극락(同往極樂)’한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청룡사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46~47)
- 『영조실록』, 한국고전DB
- 『순조실록』, 한국고전DB
- 『안동김씨 세보』, 1926
- 청룡사, 『청룡사지』, 197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수인(守仁)스님 | 본항목 | 수인스님(守仁, 1779-1838) | 守仁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인스님(守仁,_177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
수인(守仁)스님 | 각성스님 | ~의 제자이다 |
수인(守仁)스님 | 청룡사 | ~에서 출가하다 |
수인(守仁)스님 | 청룡사 | ~을 중창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