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스님(道準, 1900生, 비구니)
도준(道準)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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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도준(道準) |
법호 | |
속명 | 서병경(徐丙庚) |
출생 | 1900.12.26. |
출가 | 1940년 |
입적 | 1993.09.12.(음7.26) (세수94세, 법랍48세) |
사찰 | 회룡사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도준스님은 한국전쟁(6·25)으로 소실된 경기 의정부 회룡사의 중창불사를 주도했으며, 선풍을 진작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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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경기 양주 출생 |
1919 | 서울 정신여학교 졸업 |
1940 | 청룡사에서 보성(寶成)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45 | 중앙선원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7 |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서울 도봉산에 불교양로원성도원 설립 | |
1953 | 의정부 회룡사 중창 |
1959~1980 | 회룡사 주지 |
1978 | 비구니 선원 개설 |
1993 | 1993.9.12.(음7.26) 회룡사에서 입적(세수 94세, 법랍 48세) |
문 중 | 법기문중(法起) |
수행지침 | 인욕(남의 뜻을 잘 맞추는 것) |
저서 및 작품 | 불음 홍보를 위한 팸플릿 1천부 매월 발행. |
의정부교도소 매월 2회 법회 | |
상 훈 | 봉선사 감사패(1973) |
수계제자 | 혜주스님(慧珠)·혜수(慧修)·혜장(慧藏)·혜상(慧相) |
활동 및 공헌
출가
도준(道準)스님은 1900년12월26일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이며, 이름은 서병경이다. 스님은 한때 기독교 신자로 살며 일본에서 전도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해방 후 귀국 길에 '참으로 나의 자성(自性)을 찾는 커다란 깨우침은 불교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보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얼마 후 서울 청룡사로 와서 구족계를 받고 이 후에는 도봉동에서 '성도원' 이라는 양로원을 운영했다.
회룡사 중창불사
6·25전쟁 때는 손수 도토리를 주워다 노인들을 봉양했는데 당시 안타까운 경험을 많이 했다. 양로원 사정이 안정되자 다른 이에게 맡기고, 전쟁으로 거의 폐허가 된 회룡사로 왔다. 회룡사는 신라 때 의상조사께서 창건하신 법성사(法性寺)였는데, 도준스님의 7차에 걸친 중창으로 오늘과 같은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선풍진작
회룡사 주지 혜주스님은 스님의 쉼 없는 정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님께서는 아무리 힘겹고 바쁜 나날이어도 항시 정진시간을 꼭 지켜오셨으며, 또한 타인을 수고롭게 하는 것을 싫어 하셔서 가능한 매사를 몸소 행하셨습니다. 또한 승(僧)의 행동거지에 있어 '대중과 더불어 지내되 윗사람을 잘 공경해드리고 아랫사람은 잘 섭수하며 인욕을 잘 해야 한다.' 고 강조하셨습니다. 더욱이 스님께서는 참선만 강조하지 않고 대중을 위한 것은 무엇이든 진정으로 배우되 그것을 회향하는 구도자적 보살상을 강조해오셨습니다. 모든 것은 다 선禪으로 통하게 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92년 음력 섣달 보름날이었다. 아침 6시에 발우 공양을 마친 스님이 시자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영문을 몰랐던 시자 스님은 목욕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가 마침 공양을 마친 대중은 모두 울력에 들어갔다. 스님은 아침 7시에 목욕과 삭발을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때가 곧 생과 사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스님, 아직 가실 때가 아닙니다.” 안타까워하는 상좌의 말에 스님이 답했다. “생사가 어디 따로 있더냐.” 스님은 7개월을 더 이승에 머물렀고 적정열반(寂靜涅樂)의 구경(究竟)에 이르기를 자청했다. 혜주스님은 은사스님의 뜻이 거기에 있음을 알고 다비(茶毘)를 준비했다.
입적
도준스님은 1993년 음력 7월 26일 아침,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 자리에서 홀연히 입적에 드니, 이때 스님의 세수 94세요, 법랍 48세였다. 도준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수계제자 혜주(慧珠)·혜수(慧修)·혜장(慧藏)·혜상(慧相)스님이 있다.
회룡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681년(신문왕 1)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하였다. 936년(경순왕 10)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중창하였으며, 1070년(문종 24)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삼창하였다.
회룡사로 불리게 된 것은 1384년(우왕 10)에 무학(無學)이 중창을 한 뒤이며, 여기에는 이성계(李成桂)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1384년 이성계는 무학과 함께 이 절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태조는 지금의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선 가까이에 있는 무학굴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하였는데,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무학을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1403년(태종 3) 태조가 끈질긴 함흥차사(咸興差使)들의 노력에 의하여 노여움을 풀고 귀경한 뒤, 이 절로 무학을 찾아왔으므로 무학이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하여 회룡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1630년(인조 8)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4년부터 비구니 도준(道準)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삼성각·선실(禪室)·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과 수조(水槽)와 떡돌, 반파된 석탑 등이 있다. 이 중 오층석탑은 이 절의 창건주로 전하는 의상의 사리 1과가 봉안되었다고 전하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높이 3.2m이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속 암자인 석굴암은 출입구가 절 아래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독립된 암자로서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선방(禪房)·요사채 등을 갖추고 있으며, 이곳에 새겨진 글씨들은 김구(金九)의 휘호이다. 그리고 옛날 무학이 이성계의 창업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무학굴은 현재 찾을 수가 없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486~490)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91)
- 불교신문,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9> 의정부 회룡사 (2020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071
- 월간 해인, 불교의 미래를 깨운다, 회룡사 회룡선원 (2022년) http://haeinji.org/contents/cl.php?pgv=v&cno=7555&cnum=232&page=5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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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준(道準)스님 | 본항목 | 도준스님(道準, 1900~ ) | 道準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도준스님(道準,_1900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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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준(道準)스님 | 법기문중(法起) | ~의 일원이다 | |
도준(道準)스님 | 보성스님(寶成) | ~의 수계제자이다 | |
도준(道準)스님 | 서울 청룡사 | ~에서 출가하다 | |
도준(道準)스님 | 한암스님(漢岩)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도준(道準)스님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도준(道準)스님 | 의정부 회룡사 | ~을(를) 설립(건립)하다 | 불교양로원 성도원 |
도준(道準)스님 | 의정부 회룡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도준(道準)스님 | 의정부 회룡사 | ~을(를) 설립(건립)하다 | 비구니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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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회룡사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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