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묘엄스님(妙嚴, 1931生, 비구니)

biguni
Rsuit25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29일 (수) 22:1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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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스님은 대한민국 최초 명사품계를 받은 스님으로서 청도 운문사에 한국 최초 비구니 강원을, 수원 봉녕사에 세계 최초 비구니 율원을 개원하여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1 경남 진주 출생
1945 월혜(月慧)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5 대승사에서 성철(性徹)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48 결사에 동참,
1948~1951 해인사 국일암, 봉암사, 묘관음사에서 수선안거
1956 동학사 사교과 수료(경봉스님으로부터 전강)
1957 통도사 대교과 수료(운허스님으로부터 전강)
1957~1967 화운사, 운문사 강사 역임
1958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연꽃 향기로 오신 묘엄 스님』에는 1961년으로 되어 있어 확인 바랍니다.

1966 불교학과 졸업, 운문사 강주 취임
1974 봉녕사 강원 개원 후 강사 역임
1979 봉녕사 주지 및 강주

※ 『연꽃 향기로 오신 묘엄 스님』에는 1977년으로 되어 있어 확인 바랍니다.

1980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계사

(별소계단 2, 3, 4, 5, 6, 7, 8, 9, 10, 11, 12, 13, 비구니 특2회 갈마아사리, 16회 교수아사리) ※ 『연꽃 향기로 오신 묘엄 스님』에는 1981년으로 되어 있어 확인 바랍니다.

1985 전국비구니회 기획실장
1987 학장 취임
1992 대한불교 조계종 제10대 종회의원
1994 BBS(라디오) 경전공부 강의
1995 산림 비구니 전계 화상(14.15 니화상(尼和尙)
1999 비구니 금강율원 개원 및 초대 율원장 취임
2002 자서전 『회색고무신』 출판
2007 전계대화상 활산 성수 스님으로부터 율주 임명

독일 함부르크대학 개최 국제회의에서 논문 발표 주강 50주년 기념 논총 봉행

2007.10.23. 명사품계 품서
2008 자서전 『향성(香聲)』 출판
2011.12. 2. 입적(법납 67세, 세납 80세)

인적사항

문중 수정( )
수행지침 탐(貪)·진(眞)·치(癡) 벗겨내니 원래 완벽하게 갖추어진 자성광명(自性光明) 절로 드러나네.
생활신조 최선을 다하자.
상훈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제4회)
수계제자 일운(一耘)·진상(眞常)·도명(道明)·현우(玄牛)·상률(常律)·자연(自然)·상광(常光)·시문(始間)·설오(說吾) 외 6명

인적사항

문중
수행지침
생활신조
상훈
특기
취미
수계제자

활동 및 공헌

청담스님 둘째 딸로 출생

이 시대 비구니계의 대강백인 세주(世主) 묘엄(妙嚴)스님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있던 1931년 1월 17일 경남 진주시 수정동 54번지 장새미 골목의 석류나무집에서 청담스님과 차점이 보살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이며, 이름은 이인순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청담 순호(淳浩)스님은 묘엄스님이 태어날 당시에 이미 노모와 아내, 큰딸 인자와 세속의 인연을 끊고 삭발출가했다.

출가 전 이름이 인순이인 스님은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호적문제로 진학을 하지 못하게 되자 상심이 컸다. 마침 전쟁이 극에 달해 처녀들을 정신대에 강제로 끌려갈 때였다. 스님은 어머니의 편지를 가지고 아버지 청담스님이 계시는 문경 사불산 대승사로 찾아갔다. 그 편지는 어린 인순이를 모쪼록 훌륭한 스님으로 만들어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성철스님과의 인연

청담스님은 인순을 성철스님에게 보냈다. 마침내 어린 인순은 1945년 윤필암에서 월혜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고, 같은 해 대승사에서 성철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이로써 묘엄스님은 성철 큰스님으로부터 계를 수지한 유일한 비구니가 되었다.

성철 큰스님은 스님의 출가에 직접적인 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대승사에 보름동안 계시면서 다양한 비유를 들어 불교에 대한 근본 뜻을 가르쳐주시는 등 묘엄스님이 승려생활을 하는 내내 정신적인 가르침과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출가 후 스님의 힘든 행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스님의 은사이신 월혜스님은 당시 윤필암의 입승으로 성격이 대쪽 같은 분이었다. 어린 묘엄스님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호된 질책이 뒤따랐다. 누구나 그렇듯이 행자 생활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빡빡하고 힘에 겨웠다. 더군다나 묘엄스님은 큰절인 대승사에서 성철 큰스님에게 경을 공부하고, 다시 윤필암으로 올라와 고된 행자 생활을 하느라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성철 큰스님은 스님에게 업장과 수행에 좋다며 '능엄주’ 염송을 권했다. 처음에는 생소한 단 어라 따라 읽기도 힘들었지만 얼마나 열심히 독송을 했는지 일주일 만에 '능엄주'를 완전히 외우게 되었다. 스승인 성철 큰스님도 깜짝 놀라며 “아무래도 전생의 스님이 다시 환생하였는가 보다.”하며 묘엄스님을 칭찬하고 능엄주를 하루에 108독씩 무조건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묘엄스님은 능엄주를 외우느라 잠시도 한 눈을 팔 틈이 없었다. 또한 청담 큰스님께서도 당신과 성철 큰스님의 배경을 믿고 어린 딸이 행여 수행에 소홀할까봐 수행자로서 언행을 조심하라는 주의와 따끔한 충고를 누누이 아끼지 않았다. 은사인 월혜스님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은사 월혜스님의 깊은 뜻

윤필암에 간혹 무슨 일이 생기면 사사건건 상좌인 묘엄스님을 몰아붙이며 심하게 꾸지람했다.

어느 날 누군가 쌀을 씻다가 몇 톨 흘린 것을 본 은사스님은 어린 묘엄스님을 불러다놓고 호된 질책을 했다. 윤필암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묘엄스님 밖에 없다는 말씀이셨다. 한 번은 누군가 신던 양말을 벗어 방구석에 처박아 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묘엄스님에게 봉녕사 초창기 제자들과 함께 잘못을 추궁했다.

묘엄스님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자꾸만 꾸중을 듣게 되자 억울한 마음이 들어 하루는 성철 큰스님께 윤필암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투정삼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청담 큰스님의 손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묘엄스님의 뺨을 세차게 때리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어디서 비구니스님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큰절에 와서 고자질하느냐?" 그러면서 앞으로 어른스님들이 꾸중을 하면 설사 자신이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달게 받고 절대로 변명하지 말라고 했다.

묘엄스님이 채공을 살 때의 일이다. 시금치를 삶아 무치라는 어른스님의 말씀에 시금치를 어떻게 삶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묘엄스님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시금치를 부어놓고 밭으로 상추를 뜯으러 갔다. 얼마 후 상추를 뜯어 가지고 와보니 시금치는 너무 삶아져서 곤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어른스님이 그냥 보아 넘길 리 만무했다. 곧이어 불호령이 떨어졌고, 자신의 하나 뿐인 상좌가 잘못을 하여 다른 스님에게 혼이 나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던 은사스님은 한숨을 쉬며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러자 당시 윤필암 조실스님이 선뜻 나서서 묘엄스님을 감싸주며 친절하게 시금치 삶는 법은 물론 나물을 무치는 법까지 자세히 일러주셨다.

그 후로도 은사이신 월혜스님의 경책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은사스님이 자신에 대해 칭찬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묘엄스님은 그제서야 스님에게 올곧은 수행자가 되도록 지도하여 대중이나 속인으로 하여금 대선사 청담스님의 딸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게 하려는 은사스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그동안 원망했던 마음을 뉘우쳤다고 한다.


경학공부

1949년 봉암사에서 성철 큰스님, 청담 큰스님과 함께 3년간 안거를 난 묘엄스님은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성철 큰스님께 자신의 의사를 말씀드렸다.

스님의 말을 들은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며 운허스님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묘희스님, 묘영스님 두 사제와 함께 부산 동래 범어사로 운허스님을 찾아갔는데, 곧 동학사로 떠나신다는 말씀에 동학사로 따라가 비구니로는 최초로 경전을 배우게 되었다.

묘엄스님은 혜관스님께서 학비를 대주어 마음 놓고 공부에 전념하였고, 맹자, 논어를 거쳐 치문의 면학편을 배웠다. 그러는 한편 운허스님의 뜻에 따라 치문을 가르치며 동학사에서 사집을 수료하고, 한시를 배우기도 했다.

이후 운허스님이 동학사를 떠나 부산 금수사로 가시게 되자 스님은 묘희, 묘영스님과 함께 금수사 장군암에 방을 한 칸 얻어놓고 매일 금수사를 오가며 공부를 했다.

그러나 스승인 운허스님은 금수사에서 한 달 남짓 머물다가 다시 통도사로 가시게 되었고, 묘엄스님을 비롯한 두 스님도 스승을 따라 양산 통도사로 떠났다. 그리고 통도사 보타암에 거처를 정하고 황화각 강원에서 운허스님에게 능엄경을 배웠다.

당시 그곳에서 공부했던 스님은 묘엄, 묘희, 묘영스님을 비롯하여 지관, 해룡, 홍교스님 등 비구 학인 20여 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에 해룡스님은 운허스님의 상좌로서 훗날 월운스님이 되어 운허스님의 뒤를 이어 한글대장경 편찬에 평생을 바쳤다. 물질이 풍부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보리, 고추 등의 탁발을 하면서도 책을 보지 않고는 강講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울력이 많아 책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날은 사람들이 버린 깡통을 엎어놓고 긴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촛농 찌꺼기를 모아 초를 만들어 밤새 책을 읽고는 했다. 그러고 나면 얼굴과 콧구멍이 새 까맣게 변하여 새벽하늘 아래서 도반스님들과 산천이 떠나가도록 웃기도 했다.

1954년 3월 13일, 다시 걸망을 짊어지고 진주 연화사로 떠나시는 운허스님을 따라 묘엄스님도 진주로 향했다. 스님은 진주 도솔산 아래 도솔암에 방을 한 칸 얻어 머물면서 매일같이 연화사까지 도보로 왕래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님은 진주 연화사에서 1955년 3월부터 시작한 기신론 공부를 11월이 되어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운허스님은 또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리고 자리를 잡는 대로 곧 연락을 하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해인사로 떠나셨다. 그리 하여 묘엄스님은 은사 월혜스님이 계시는 김룡사에 머물면서 운허스님의 부름을 기다렸다. 그해 가을, 드디어 스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묘엄스님은 그 길로 스승을 찾아가 해인사 약수암에 방을 한 칸 얻어놓고 매일 해인사를 오가며 금강경과 원각경을 공부하였고, 효봉 큰스님의 법문도 열심히 들었다.

이후 스님은 머리도 식힐 겸 만행을 다녔는데, 어느 날 은사스님께서 입적 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곧바로 김룡사로 달려간 묘엄 스님은 은사스님의 49재를 정성껏 모셨고, 그 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동학사로 향했다. 당시 동학사는 정화운동 이후 비구니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었고, 최초의 비구니 강원이 개설되어 학인들이 40~50명이나 상주하고 있었다.

묘엄스님은 그곳에 계시는 경봉스님께 화엄경을 전강 받는 한편, 학인들에게 치문과 서장을 가르쳤다.

1956년 4월 5일, 묘엄스님은 동학사에서 경봉스님께 전강을 받고 강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공부가 미진하다고 느껴 그대로 안주할 수가 없었던 스님은 동학사 강사자리를 뒤로 하고 다시 운허스님을 찾아 통도사로 향했다.

1957년 12월, 마침내 통도사에서 천하의 대강백 운허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을 전강 받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나라 불교계 비구니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 이듬해인 1958년에는 통도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절집에서의 경전공부를 어느 정도 마치고 학문의 시야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산 대학교 불교학과를 수료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2학년에 편입하여 3년 과정을 마쳤다.


비구니 강원의 효시

1966년 청도 운문사로 내려가 처음으로 강원을 개설하고 강주를 역임함으로써 비구니 강백이 주도하는 비구니 강원의 효시가 되었다.

스님이 운문사에 당도해보니 80여 명이나 되는 사중 식구와 학인들이 살기에는 재정이 너무나 빈약했다.

그런데 운문사에 속해 있는 사리암에 본사인 운문사보다 시주금이 더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니 사리암에 모신 나반존자가 영험이 있다고 하여 신도들이 운문사보다 사 리암에 가서 불공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묘엄스님과 운문사 주지 묘전스님은 사리암 원주를 불러 사리암에 들어오는 시주금을 운문사로 내려보낼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대은 노스님을 사리암 원주겸 도감으로 임명하고 학인들을 올려 보내 기도와 살림을 하면서 재정을 관리했다. 이렇게 하여 사리암의 수입이 전액 운문사 큰절로 내려오게 되었고, 사찰 재정이 확보되면서 여유가 생겨 더 많은 학인들을 받을 수 있었다.

스님은 먼저 운문사 강원의 규칙부터 정하고 모든 학인들이 예외 없이 지키도록 했다. 특히 적연, 도혜 제자스님들과 함께 허가를 받지 않고 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산문출송 시킨다고 했다. 동학사 강원 시절에 규율이 잡히지 않아 학인들을 통솔하기 힘들었던 점을 감안한 조치였다.

처음에는 40명에 불과했던 학인들이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늘어나 어느덧 100여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참선을 하며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1970년 10월 운문사 강사 자리를 미련 없이 내놓고 경주 근처에 있는 죽림사로 일단 거처를 옮겼다.


봉녕사 시대

1971년 4월 9일, 묘엄스님 일행 30여 명이 논길을 걸어 봉녕사에 도착했다. 마침 전에 살던 비구스님이 트럭에 짐을 싣고 떠나려다가 큰 대중을 보고 걱정이 되었는지 트럭에 실었던 쌀 두 가마 중 한 가마를 풀어 한 끼 저녁 공양이라도 지어드시라며 한 말 정도를 덜어주고 갔다.

봉녕사의 주지는 묘전스님이 맡았다. 다음 날부터 30여 명의 대중은 절 안팎의 도량 가꾸기에 전념했다. 그러나 지리도 잘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터라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 보살님이 찾아와 5천원을 내놓으며 친정어머니 삼칠재를 지내달라고 부탁을 해왔고, 이것을 시작으로 점차 신도들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1971년 11월 15일 청담 큰스님이 입적에 드셨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후 신도들의 도움으로 봉녕사 진입로를 확장하고 사찰이 점차 제 모습을 갖추게 되자 스님은 강원을 개설할 목적으로 20평의 건물을 신축하고 신입생 모집공고를 했다. 정원은 30명이었는데 무려 50여 명의 학인들이 지원을 했다.

그러던 중 주지 묘전스님이 대구에 작은 토굴 '반야정사'를 지어 내려가게 되어 1974년 3월 5일에 묘엄스님이 봉녕사 주지 겸 비구니 강원 학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 년 뒤인 1975년 3월 15일, 스님은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윤고암 큰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속가 어머니의 머리를 직접 깎아드리니 이 분이 바로 대도스님이다.


세계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 개원

스님이 봉녕사에 온 지도 30여 년이 흘렀다. 초창기만 해도 봉녕사는 약사전 건물과 요사채 한 동 밖에 없는 작은 도량이었고 주변은 모두 논밭이었다. 그곳을 매립해서 선방을 만들고 강당을 짓는 동안 무수한 고생을 하였으나 지금은 108평의 웅장한 대웅전과 건평 300여 평이 넘는 대형 건물이 네 채나 들어선 대가람이 되었다.

1992년 5월에는 도서관 개관식과 아울러 일연, 성학, 혜정, 대우, 일운스님에게 전강식을 거행함으로써 운허스님의 강맥을 잇게 하였으며, 교단 내에서 교학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묘엄스님은 항상 출가자들은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부처님 말씀을 믿고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생활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구니 구족계 산림 때에는 교수아사리, 갈마아사리와 비구니 전계화상을 역임하였고, 1999년 6월에 세계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개원함으로써 지계정신이 점점 엷어져가는 이 시대에 한국 승가의 수행풍토를 위해 새로운 장을 마련했다.

부처님 말씀을 배우기란 어려운 일이며, 실천하기도 어렵고 가르치는 일 또한 어려운 일인데 스님은 50여 성상을 후학들을 위해 아낌없이 가르치고, 몸소 솔선수범하여 지행합일의 경지에서 유유자적하니 진정 참다운 수행인이요, 발심 수행자들의 큰 스승이다.


명사품계 품서

2007년 10월 23일 묘엄스님은 혜운스님, 정화스님, 광우스님, 정훈스님, 지원스님, 명성스님과 함께 조계종단 사상 처음으로 비구니 스님의 최고 지위인 명사법계의 서품을 받았다. 이날 법전 종정예하는 오전11시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사부대중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불교조계종 명사 법계 품서식’을 열고 7명의 비구니 스님에게 법계증과 25조 가사를 전달했다.

명종 5타로 시작된 품서식은 법계위원장 보성대종사의 고불문 낭독, 품수자 헌화, 서원 등의 순으로 이어졌고 법전 종정예하는 7명의 스님들에게 직접 법계증을 전달했다.

법계증 품서 후 법전 종정예하는 주장자를 높이 들어 “법계(法階)는 구경각(究境覺)에 이르는 차제(次第)가 아니라 선종(善種)을 심는 일이요, 이 선종(善種)은 훗날 인천(人天)의 복전(福田)을 이루는 근본(根本)이 될 것”이라고 법어했다.


법전 종정예하로부터 명사품계의 법계증을 받는 장면

  • 내용 및 사진 출처 : 불교신문 인터넷 2007.10.23.(제152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625)


입적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큰 어른인 봉녕사 승가대학장이자 금강율원 율주 세주당(世主堂) 묘엄명사(妙嚴明師)가 2011년12월2일 오전9시5분경 수원 봉녕사에서 법납 67년, 세수 80세로 입적했다. 묘엄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은 12월6일 11시 봉녕사 우화궁에서 전국비구니회장으로 봉행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도림 법전대종사는 영결식에서 원로의원 진제스님이 대독한 법어를 통해 “오늘 명사는 적멸을 통해 해탈의 자유를 얻어 임운자재하게 되었습니다.”며 “이제 근진을 벗어났으니 가는 곳 마다 원통자재하셨던 그 주인옹으로 사중득활의 소식을 일기일경으로 한 번 나투십시오.”라고 추모했다.

수계제자로는 일운(一耘)·진상(眞常)·도명(道明)·현우(玄牛)·상률(常律)·자연(自然)·상광(常光)·시문(始間)·설오(說吾) 외 6명이 있다.


세주당 묘엄 명사스님 영결식

세주당 묘엄 명사스님 다비장면

4. 묘엄스님에 관한 논문 및 저서


1) [버지니아 대학교 논문 번역서] 『한계를 넘어서: 묘엄 스님 생애와 한국 비구니 승단』

스님에 관한 저서로 『한계를 넘어서: 묘엄 스님 생애와 한국 비구니 승단』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저자 석담(石潭)스님(속명 정인영)이 2009년 5월에 버지니아대학 종교학과에서 “Crossing over the Gender Boundary in a Gray Robe: The Life of MyoOm, a Korean Buddhist Nun”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논문이다.


역자 이향순은 1980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1985년 미국 노스이스턴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19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1998년에 조지아대학에서 언어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현재까지 조지아대학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비구니와 한국 문학』(예문서원, 2008), 『Welcome to Korean!』(부북스, 2010, 공저)이 있고, 한국 비구니 승가, 한국 문학 및 영화, 아일랜드 문학에 대해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이향순이 번역하여 2012년 05월 10일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의  『Crossing over the Gender Boundary in a Gray Robe: The Life of MyoOm, a Korean Buddhist Nun』 소개


출판사 서평 (동국대학교 출판부)

묘엄 스님의 삶과 수행, 한국 비구니 승가공동체에 대한 생명력 넘치는 기록

최근에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던 몇 분의 큰스님이 입적하였다. 그중에서도 법정 스님, 지관 스님과 함께 비구니계의 큰 어른 묘엄(妙嚴) 스님이 주목을 받았다. 묘엄 스님은 뛰어난 율사(律師)이며 대강백(大講伯)으로 한국의 비구니 승단을 재건하는 데 앞장 선 분이다.

현재 한국 비구니 승단은 과거 어느 시기보다 교단의 인적 구성이나 역할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역사가들에게 비구니들은 ‘은둔의 소수집단’으로서 소외된 존재였다. 비구니의 삶과 수행에 대한 기록은 오늘날까지도 한국불교사에 빈자리로 남아 있다. 그 결과 한국불교사 해석은 주로 남성 출가자인 ‘비구’를 대상으로 남성 위주의 시각에서 편향적으로 조명되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비구니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묘엄 스님의 일대기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한국 비구니 승단의 재건과 정체성 확립 등을 조명하고 있다. 고명한 스님들의 행장기 특유의 미사여구를 피하고 문헌연구와 현장연구를 병행한 응용불교학의 방법론으로 한국 비구니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비구니로 살아온 한 개인이 내린 선택과 결정이 어떤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를 구명하기 위해 저자는 역사의 주역이나 관찰자의 증언 또는 회고와 같은 구술을 바탕으로 진실을 밝히는 구술사 연구방법을 도입하여 생생한 다큐멘터리를 제공한다.

먹물 옷을 입고 출가자의 길을 선택한 한 사람이 그를 겹겹이 둘러싼 가족과 승가공동체와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에 어떻게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어서 이러한 방법론은 매우 유용하다. 나아가 식민수탈과 전쟁으로 가난하고 혼돈스러웠던 시기에 한국 비구니 승가가 어떻게 강력한 교육체제를 수립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통을 재정비할 수 있었는지 설득력 있게 재구성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비구니의 삶이 색채 잃은 신화나 전설로 증류되어 버리기 전에 생명력 넘치는 사바세계의 역사로 기록된 감동적인 서사를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삶은 서사 자체이고, 따라서 서사로서 구현되지 않은 삶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청담 스님의 친딸, 성철 스님의 유일한 비구니 제자’라는 서사의 메타포

묘엄 스님의 입적이 특히 세간의 눈길을 끈 데에는 조계종 2대 종정 청담 대종사의 친딸이며, 성철 스님의 유일한 비구니 제자라는 사실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여성의 출가’가 한 개인의 범상치 않은 가족사를 내포한 극단적 선택의 메타포로 읽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논지는 “묘엄의 출생을 곧 청담의 파계의 결과로 인식하는 태도”라는 ‘특별한 상황’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펼쳐진다. 묘엄 스님의 제자인 저자 석담 스님(속명 정인영)은 비구니 승가의 일원이면서도 연구자로서의 객관적 성찰과 냉정한 관점을 놀랍도록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승단 내부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비구들에게 ‘버림받은’ 부모나 부인 혹은 자녀들에 관해 조명”하거나, “한국의 불교계가 성문제와 관련된 파계에 대해 비구나 비구니에게 보여주는 차별적 태도”를 논할 수 있게 한다.

한국 불교 전통에서는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의 영향을 받아 사미니가 비구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묘엄 스님은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성철, 자운, 운허 스님 등 당대의 비구 스승들로부터 교육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저자는 이러한 특권의 향유가 특별한 한 개인에게 베풀어진 혜택을 넘어선 것이라고 본다. 비구 선사들은 임제선 전통의 가르침을 받아 ‘모든 중생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서의 불성론(佛性論)을 체화한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묘엄 스님을 비롯한 소수의 비구니 제자들에게도 성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열린 자세로 비구와 동등하게 해탈의 길로 이끌기 위한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저자가 연기적 서사로서 재구성한 묘엄 스님의 삶에는 개인과 공동체, 여성과 남성, 보편과 특수의 씨줄과 날줄이 겹겹으로 엮여 있다. 승단 내에서의 성차별에 대해 치열하게 도전하고 비구니 승단의 정체성을 재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스님은 온 생애를 관통하는 수행자의 치열함으로 성의 한계를 넘어선다. 승가공동체에서 묘엄 스님이 ‘비구니 교육자’로서 ‘현대 한국 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상황’을 넘어서는 결연한 선택의 결과였다.


2) 회색고무신 (묘엄스님 자서전)

이 책은 2002년에 묘엄스님의 자서전으로 시공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묘엄스님이고 역자는 윤청광 작가이다.

청담 스님의 딸, 성철 스님의 제자인 묘엄 스님 이야기. 낡은 걸망 하나, 기워 입은 옷 한 벌, 그리고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진 것의 전부였던 시절. 이 책은 청담 스님의 딸, 성철 스님의 제자인 묘엄 스님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스님의 딸로 태어나 오늘날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큰 스승이 된 묘엄 스님은, 어쩌면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남긴 가장 큰 사리가 아닐까라고 생각이 든다.

※ 출처 : 교보문고 홈페이지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52717696&orderClick=LAG&Kc=)


3) 향성(香聲) (묘엄스님 자서전)

이책은 묘엄스님의 고희를 기념해 스님의 출가부터 당시까지의 출가행장을 녹취하여 기록한 녹취록.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측면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편찬하고, 구어체의 생생한 느낌을 살려내고 있다.

이 책의 엮은이는 김용환이며, 2008년 5월에 출간되었다.

※ 출처 : 교보문고 홈페이지(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691)


4) 연꽃 향기로 오신 묘엄 스님(상·하권)

스님에 관한 저서로 『연꽃 향기로 오신 묘엄 스님』이라는 만화책이 있다. 이 책은 각각 2016년과 2017년에 불광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저자 배종훈은 “이 책에서는 치열하게 공부하는 묘엄스님의 모습과 제자들을 길러내기 위한 스님의 온갖 노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통해 한국불교의 큰스승인 묘엄스님의 삶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일조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 출처 : 불교신문 2018.1.29.(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3669)


5) 世主妙嚴 主講五十年紀念論叢(세주묘엄 주강오십년기념논총)

2007년 봉녕사 저술하고 승가대학에서 발간한 책이다.

현대 비구니교육의 기틀을 다진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 묘엄스님의 주강(主講) 50주년을 기념한 논총 봉정식이 지난 14일(2007.9.14) 수원 봉녕사 대적광전에서 봉행됐다.

이날 ‘기념논총 봉정식’에서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법어를 통해 “묘엄스님은 50여년간 후학을 가르치며,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왔다”며 “직접 운력을 하며,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을 스스로 걸어온 묘엄스님의 끊임없는 정진이 오늘의 봉녕사와 비구니 교육의 토대를 세웠다”며 공로를 치하했다.

※ 출처 : 달마헌책방 홈페이지 (http://dharmabooks.co.kr/shop/item.php?it_id=1525275222)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83~600)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138)
  • 교보문고 홈페이지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52717696&orderClick=LAG&Kc=)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대은(大恩)스님 본항목 대은스님(大恩, 1951~2014) 大恩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은스님(大恩,_185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대은(大恩)스님 혜종(慧宗)스님 ~의 제자이다
지장암 ~에서 출가하다
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기린선원 ~을 중창하다
천진암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백암선원 ~을 창건하다

주석


3. 활동 및 공헌






5.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