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스님(瑞庸, 1948生, 비구니)
서용(瑞庸)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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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서용(瑞庸) |
법호 | |
속명 | 김순자(金順子) |
출생 | 1948.10.18. |
출가 | 1966년 |
입적 | |
사찰 | 해인사 보현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21-1(치인리 1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서용(瑞庸)스님은 해인사 보현암을 건립하고 수행활동에 전념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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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경남 산청 출생 |
1966 | 석남사에서 혜춘(慧春)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68 |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9 | 운문사 강원 서장 수료,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0~1973 | 석남사 안거 성만 |
1972~1975 | 보현암 대웅전 및 선방 불사 |
1973~1974 | [화운사 강원에서 『능엄경』 수료 |
1977~1980 | 보현암 원주실, 객실, 장경각채 불사 |
1994~1998 | 제주 선덕사에 비구니 선원인 학전선원(鶴栴禪院)을 개원 |
1999~2002 | 보현암에서 수행 정진 |
2004 | 보현암 주석(한주) |
문중 | 청해문중(靑海) |
수계제자 | 일광(一光)·일탁(欥卓)·경후(俓厚)·진후(眞厚)·근후(根厚)·자유 |
활동 및 공헌
출생
서용(瑞庸)스님은 1948년 10월 18일 경남 산청군 차황면 장위리에서 아버지 용궁 김씨 김점용과 어머니 함안 이씨 이현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용궁이며, 이름은 김순자이다.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지극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할머니를 따라 절에 왕래하곤 하였다. 그 당시 할머니는 통도사 극락암에서 사부 대중이 모인 가운데 정진하셨다. 그러던 중 15세 때 고암 큰 스님, 구하 큰스님(월하스님의 은사스님), 경봉 큰스님을 뵐 기회를 맞으면서 불교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경봉스님과의 인연
그렇게 자연스럽게 불교와 접하면서 스님은 항상 출가하기를 바랐다. 집에 있어도 머릿속은 오로지 출가의 염원뿐인지라 한때는 가출할 생각마저 하는 바람에 집에서 이 사실을 알고 혼이 나기도 했다. 하루하루 출가의 염원이 깊이를 더해가던 어느 날 극락암의 경봉 노스님께서 스님을 불러 말씀하셨다.
“18세 될 때까지도 출가 의지가 변함이 없거든 그때 다시 오너라.”
스님은 경봉 노스님의 말씀을 부처님 말씀처럼 거룩하게 여겼고, 그 뜻을 따라 18세인 1966년 3월 6일 석남사로 출가하였다. 그 후 서용스님 외에 두 형제가 출가하였는데, 현주스님과 학균스님이다.
그 당시 스님의 속가 집에는 일광스님 등 비구니스님들이 자주 왕래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일광스님의 상좌가 되고자 간청을 드렸지만 일광스님은 자신보다 더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있다며 받아주지 않으셨다. 훗날 일광스님은 자신의 욕심을 앞세워 상좌를 삼기보다는 스님을 아끼는 마음이 너무나도 커서 더 나은 은사스님을 만나 훌륭한 수행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절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은사이신 혜춘스님과 인연
서용스님이 은사이신 혜춘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깊다. 당시 혜춘스님의 구도 정진의 열정은 제방에 다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는데 마침 선방을 직접 다니시던 할머니께서 그 소식을 접하고는 혜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길 원하셨던 것이다.
스님은 혜춘스님이 계신 곳을 수소문하여 해인사에 머물러 계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즈음 고암 큰스님이 부산 동래 포교당에서 가끔 법문을 여셨는데 그곳으로 찾아가 고암 큰스님께 혜춘스님을 은사스님으로 모실 수 있도록 편지를 써주시길 부탁드렸다.
당시 혜춘스님은 백련암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사람을 보내 서찰을 전하자 혜춘스님은 곧 고암 큰스님을 찾아왔다. 상좌 들이기를 권하시는 고암 큰스님의 말씀을 들은 혜춘스님은 선뜻 허락을 하지 않았다. 다만 ‘중노릇을 하려거든 석남사로 가라.’는 말씀만 남긴 채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그 말을 따라 스님은 바로 석남사에 가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기도를 마치신 혜춘스님이 석남사로 오셨다. 그때도 혜춘스님은 은사스님이 되는 것을 마뜩치 않게 여기며 ‘석남사 대중에 훌륭한 스님들이 많으니 은사를 정해서 중노릇을 하라.’는 말씀만 남기셨다. 서용스님은 이후 3년 동안 신심에 겨워 소임을 살고 시간이 나면 법당에 절을 올리며 삭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생활하였다. 혜춘스님은 마침내 인연을 받아들이고 삭발해주셨다.
스님은 혜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68년 7월 23일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고, 1969년 4월 13일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해인사 보현암 불사
그 후 1969년 운문사에 입학하였으나, 1970년도에 석남사 상선원에서 건강이 좋지 않으신 은사스님이 3년 결사를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학업을 중단한 채 3년을 하루같이 정성을 다해 공양을 지어 올렸다.
1972년부터는 보현암을 건립하는 불사를 시작하였는데 일단 뼈대만 세워 올린 후 본격적으로 들어와 은사스님을 도와 장애 없는 불사를 이루기 위하여 기도와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원래 보현암 터는 [일타 큰스님 등 여러 큰스님들이 서로 마음에 들어 하고 애착을 가진 절터였던지라 합의하에 욕심을 갖지 말고 절도 짓지 않기로 결의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해인사에 큰일이 있었는데 혜춘스님이 그 일을 마무리함으로써 일이 잘 해결되자 해인사 주지였던 봉주스님이 무척 고마워하며 어떻게든 보답하기를 원했다. 혜춘스님은 ‘달리 바라는 것은 없으니 그저 기도 정진할 수 있는 작은 토굴 자리 하나만 마련해달라.’고 청하셨다. 그러자 봉주스님이 혜춘스님에게 보현암 터에 절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이 밭으로 이용하고 있던 그 절터에 선방을 짓는 게 평생 소원이었던 혜춘스님의 바람대로 불사를 시작하였다.
선방 위주로 불사를 하였기에 법당은 그 규모가 비교적 작아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원주실과 객실, 장경각 등도 지었는데 모두 다 두 번 손을 거쳐야 할 만큼 중건 중수를 거듭하였다. 20년간 불사를 하면서 살아생전에 하고 싶은 만큼의 불사는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스님은 이제 불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말한다.
불사할 당시를 돌이켜보면, 채공간에 가기 전까지는 은사스님과 함께 정진을 하고 그 사이사이 공양을 짓는 등 불사의 무장무애를 위하여 절 기도와 정진을 쉼 없이 거듭하였다. 이렇듯 불사의 원만한 성공을 위한 기도정진 노력의 결실로 큰 사고 없이 부처님의 가피 속에서 불사를 이끌어올 수 있었다.
지금의 보현암이 존재하는 데는 많은 스님들의 노고가 있었다. 서용스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 또한 없다. 은사스님이신 혜춘스님은 외부에서 시주금을 모으고 서용스님은 불사 현장을 감독하며 열정을 쏟았다.
보현암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모두 은사스님의 공덕 때문이라고 말하는 서용스님은 ‘불사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하고 신심이 가정 먼저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유훈인 ‘보현암 선방에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수행자는 공부하는 마음을 놓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씀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보현암 불사를 마치고 제주도 서귀포의 선덕사로 가서 제주도 유일의 비구니 선원인 학전선원(鶴栴禪院)을 개원하여 비구니 스님들의 선수행(禪修行) 도량을 만들기도 한 서용스님은, 2004년 보현암에 머물면서 사중의 소임을 맡아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 일광(一光)·일탁(欥卓)·경후(俓厚)·진후(眞厚)·근후(根厚)·자유스님 등이 있다.
해인사 보현암
보현암(普賢庵)은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 가야산 자락에 폭 안겨 있는 아늑한 비구니 도량이며, 해인사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혜춘스님이 1972년 봄부터 보현암 옛터에 불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보현암 요사를 짓고, 그 뒤 대웅전, 심검당, 향적당(香積堂) 순으로 절집을 신축하여 1984년에 마무리 지었다. 보현암의 역사가 곧 선원의 역사일 만큼 보현암은 선 도량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창건 이후 줄곧 비구니 납승들이 참선 수행을 해왔으나 보현암 선원이 공식적으로 개원된 해는 1977년이다. 이후 많은 비구니 납자들이 보현암 선원에서 수선 안거를 하였고, 오늘날까지 높푸른 선풍을 과시하며 비구니 선원으로서의 위치를 굳게 다져가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331~335.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45.
- 월간 해인, 구법의 도량 해인사 보현암선원 (2014년) http://haein.or.kr/contents/?pgv=p&wno=405&ckey=1
- 불교신문, [伽藍과 뫼] ⑪ 가야산 해인사와 암자(2020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48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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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瑞庸)스님 | 본항목 | 서용스님(瑞庸, 1948~19) | 瑞庸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서용스님(瑞庸,_1948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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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瑞庸)스님 | 청해문중(靑海) | ~의 일원이다 | |
서용(瑞庸)스님 | 혜춘스님(慧春) | ~의 수계제자이다 | |
서용(瑞庸)스님 | 울산울주 석남사 | ~에서 출가하다 | |
서용(瑞庸)스님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서용(瑞庸)스님 | 월하스님(月下)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서용(瑞庸)스님 | 해인사 보현암 | ~을(를) 창건하다 | |
서용(瑞庸)스님 | [[선덕사_비구니선원] | ~을(를) 설립(건립)하다 | |
서용(瑞庸)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울산울주 석남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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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해인사 보현암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21-1(치인리 1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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