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혜돈(慧頓)
|법명 = 혜돈 (慧頓) |법호 =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 |출생 = 1949. 5. 15 |입적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 }}
생애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 1949 경북 상주 출생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
- 1999~ 2000 화운사 주지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활동 및 공헌
- 문 중 : 실상(實相)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
출 가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지다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살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했다. 외지로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임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일이있으면 집안을 돕도록하였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어 절어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스님은 열여덟살이되던 해,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다.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사름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 도착할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고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찿아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
행 자 생 활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