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성스님(法性, 1914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8월 23일 (화) 18:11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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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성(法性)스님은 수덕사에서 일엽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성라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4 서울 출생
1961 수덕사에서 일엽(一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2 성라암에서 경산(京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2~1998 성라암 주지
1970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수덕사에서 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5 통도사 내원암 동안거 성만
1976 성라대학 이사장 취임
1980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포교사 자격증 취득
1985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포교사 자격증 취득
1986 전국비구니회 이사
1990 성라원 이사장 취임
제17회 세계불교도 자문위원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사 자격증 취득
성라암에서 경산스님을 모시고 3년간 율학(律學)을 수학
1991 신미술대전 추천작가
2004 성라암 주석
문중 일엽(一葉)문중
수행지침 언제나 가슴을 적시는 그 말씀으로 살겠네.
저서 및 작품 자서전 『마음 한 번 돌리니 극락이 예 있구나』, 고려미디어, 1993.
『언제나 가슴을 적시는 그 말씀대로 살겠네』, 지혜의 나무, 2000.
『첫 마음을 잊지 말아야 깨달음을 이룬다』, 지혜의나무, 2000.,외 다수
상훈 조계종 종정 표창장 외 다수
특기 그림, 원예
수계제자 흥륜(興輪)·흥민(興珉)·흥주(興珠)·흥석(興石) 외 11명

활동 및 공헌

출생

법성(法性)스님은 1914년 12월 8일 서울에서 아버지 권오봉(權五鳳)과 어머니 신규(申圭) 사이의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며, 이름은 권갑순이다. 스님이 태어난 해가 갑인년이라 이름을 갑순으로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출가로 큰 충격을 받다

아버지는 충청북도 괴산 분으로, 스님은 5살 때부터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아버지 밑에서 한문 교육을 받았으며 남달리 총명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들을 낳지 못해 아버지가 소실을 두고 따로 생활하였기에 스님은 외로운 성장기를 보내야 했고, 기독교 재단의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철저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갈등을 겪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고 출가를 결심한 어머니는 딸들이 학교를 다니며 어느 정도 컸다고 생각하자 도정이란 법명을 받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셨다.

어머니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신 것이 기독교인이었던 스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충격으로 무서운 고열에 시달리며 병이 들어 7년을 앓아눕게 되었다.

스님이 되신 어머니가 딸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속세의 삶이란 무상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고(苦)를 안고 산단다. 그래서 업연(業緣)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며 정진하는 것이란다.” 하며 불법을 전해주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스님이 되신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이렇게 병이 들었는데 저까지 불법을 따르라고 하지 마세요.”라며 스님은 듣지 않았다.

“그러면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지만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을 항상 염(念)하거라.”

“관세음보살님을 제 앞에 데려오면 믿을게요.”

어머니 도정스님

어머니는 스님을 출가로 이끈 특별한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 도정스님에게 머물 곳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절을 지을 만한 곳을 찾던 끝에 대지 180평에 건평 20평인 집을 어렵게 마련하여 어머니 스님을 모시고자 하였지만 도정스님은 매정하게 거절하고 선방으로 떠나셨다. 서운한 딸의 마음을 읽으셨을까? 도정스님은 해제 후 다시 찾아와 도량을 살피고는 부처님을 모시고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게 백일기도를 드리자고 하셨다.

희방사로 가다

스님은 어머니께 반항하고 저항하였다. 그런데 날이 가도 병은 차도가 없었으며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같이 교회에 다니던 교우들의 간절한 기도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어머니 스님의 사제인 덕준스님이 찾아오셨다. 덕준스님은 7년가량을 죽은 송장처럼 앓아누운 딸을 걱정하는 사형스님의 안타까움을 덜어 드리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죽기를 기다리는 법성스님에게 “죽을 길을 가르쳐 주마. 끝내는 방법을 일러줄 테니 희방사를 찾아와라!” 하고 말했다.

끝내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이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이 몸서리쳐졌기에 스님은 겨우 몸을 일으켜 충북 단양의 희방사를 찾게 되었다. 지게꾼에 업혀 찾은 희방사는 첩첩산골로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곳에 있었다. 덕준스님은 자상하게 기도하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혼자서는 서고 걷는 것조차도 힘든 상황에서 다기를 직접 모시고 기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사투였다. 마당에 거적을 깔고 기어가다시피 하여 계곡으로 가서 다기를 모셨다. 땅에 내려놓으면 안 된다 하여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한 손으로는 다기를 들고 법당에 당도하면 다기물은 절반이 비어 있었다. 그렇게 살 방법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고 ‘관세음보살님’을 찾았다.

출가

그것이 업장소멸의 길이었다. 어느 순간 몇 년을 그토록 괴롭히던 신부전증과 신장병 등 온갖 병마를 다 짊어진 종합병원 같은 몸뚱이가 맑은 희방사 계곡물에 씻긴 듯이 거짓말처럼 나았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은 오직 감사할 뿐이었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스님은 그때까지 부정해왔던 불법에 비로소 귀의하였다. 그리고 오랜 방황과 우매함을 떨치고, 1961년 수덕사에서 일엽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드디어 출가를 하였다.

수행

1995년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 수행관 준공법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91

1962년 6월 경산(京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수덕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면서 정진할 수 있었다. 평상시 생활 자체가 수행이었던 은사스님은 종종 만공 큰스님의 법문을 들려주곤 하셨다.
"그릇에 무엇이든 담겨 있으면 다른 것을 담지 못하는 법이다."
법성스님은 크게 깨달았다. ‘그렇다. 마음 비우기!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삶의 터전이어야 한다.’

성라암 불사

이때부터 스님의 마음속에는 ‘마음 비우기’가 깊이 각인되었다. 스님은 1962년부터 1998년까지 성라암 불사를 하였다. 우선 법당을 지어 부처님을 편안히 모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기에 새 법당과 신도회관을 짓기 시작해서 60년대 말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어렵게 지은 신도회관은 화재로 전소되었다. 늘어나는 신도들을 다 수용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스님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원력을 세우고 대웅전과 범종을 주조하여 가람 정비에 전력을 쏟았다. 스님의 마음속에 각인된 마음 비우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라암 선원 개원

그런 길고도 어려운 불사의 과정에서도 스님은 57세라는 나이로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시작으로 조계종 국제포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전국 비구니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78년에는 성라암 선원을 개원하여 20여 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응민스님을 입승으로 하안거를 났다.

성라암 비구니 승가학원

스님은 은사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성라암에 ‘전국 비구니 총본부’를 만들고 싶어 하였다. 특히 비구니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사를 위한 전시회를 열었다. 스님은 신심으로 스님을 돕고자 하는 일당 김태신 화백(일당스님)과 전국을 누비며 작품을 수집하여 운보 김기창, 산정 서세옥, 청강 김영기, 옥산 김옥진 화백 등 많은 분들의 작품을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성라암 비구니 승가학원’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비구니 승가학원은 스님이 이사장을 맡고 묘엄스님을 학장으로, 비구니회 회장에 지명스님을 모시면서 묘희, 보경, 광업, 진경스님 등 비구니계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스님들이 뜻을 모아 그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의욕에 비해 현실적인 여건이 너무 열악하여 최초로 입학했던 50명의 비구니를 끝으로 1회 졸업생을 배출시키고, 개운사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중앙승가대학교로 합병되면서 성라 비구니 승가학원은 문을 닫았다.

사회복지법인 성라원을 건립

‘불교는 중생제도를 위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 그 목표가 아니던가! 그렇다. 이 모든 것은 내 개인 재산이 아니며 신도와 불자들, 사부대중의 것이다. 원력을 세우고 중생제도에 힘쓰지 않는다면 복혜양족존(福慧兩足尊)을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동체대비를 실현하는 것이 본분이며,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아니었던가!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동체대비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내가 받은 것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스님은 이런 생각으로 임야와 대지 4,000평에 사회복지법인 성라원을 건립하였다. 성라원은 스님의 회향사상이 담긴 결과물로 무려 7년의 세월이 걸린 힘들고 험한 여정의 산물이다.

성라원은 첫 사업으로 무의탁 노인을 위한 양로원을 개원하였다. 가까운 이웃인 성북동 주민과 신도들의 반연에 의해 모인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경로잔치를 열고, 목욕비를 나눠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 만물이 윤회한다고 했습니다. 노인이라고 해서 이제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몸은 죽지만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지요. 몸은 영혼의 일시적인 옷일 뿐입니다.”

목마른 중생에게 감로수가 되고, 크나큰 고통을 받는 자들에게 지혜의 광명을 전하는 빛이 되고자 하는 스님에게 노인 극락을 염원하는 사회복지법인 성라원은 아직도 간절한 화두이다. 언제나 가슴을 적시는 부처님의 뜻을 좇아서 살고자 하기에 스님의 사회복지 발원이 가능한 것이리라.

스님은 수행의 일면을 틈틈이 글로 남겨 『마음 한번 돌리니 극락이 예 있구나』, 『자네도 부처님이 되시게』, 『언제나 가슴을 적시는 그 말씀대로 살겠네』를 집필하였다. 또한 그림과 원예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어 1991년에는 신미술대전 추천작가로 활동하였다.

2004년 성라암에 주석하고 있는 법성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흥륜(興輪)·흥민(興民)·흥주(興珠)·흥석(興石)스님 외에 11명이 있다.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

서울 성북구 성라사(암)

성라사
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njwooprat/10051738519

성북구 성북로31길 27(성북동 285)에 위치한 사찰이다. 성라암은 창건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 곳이 유명해진 것은 일제강점기 윤심덕,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 3인방으로 불리던 김일엽이 자전 소설 『청춘을 불사르고』를 쓴 곳이기 때문이다. 김일엽의 아들인 승려 일당(김태신, 1922~2014)도 성라암에 주석하다 입적했다. 또한, 성라암은 다양한 봉사활동을 벌이는 사회복지법인 성라원의 본산으로도 유명하다. 성라원을 만든 법성스님은 노인복지를 위하여 1990년 복지법인을 설립한 후 이듬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사찰 건물과 대지·임야 등 약 30억 원의 사재를 성라원에 기증하였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성(法性) 본항목 법성스님(法性, 1914~) 法性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성스님(法性,_191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법성(法性)스님 일엽스님 ~의 제자이다
법성(法性)스님 수덕사 ~에서 출가하다
법성(法性)스님 성라암 ~을 불사하다


사찰

  • 성라암(☎ 02-762-2788):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8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