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옥스님(慧玉, 1901生, 비구니)
혜옥(慧玉)스님 | |
---|---|
법명 | 혜옥(慧玉) |
법호 | 정암(晶岩) |
속명 | 박두림(朴斗林) |
출생 | 1901. 1. 18. |
출가 | 1903년 |
입적 | 1969년(세수 69세, 법납 66세) |
사찰 | 김천 대휴사(경북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385)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혜옥스님은 근대 이후 한국불교에서 ‘대강백(大講佰)’의 칭호를 받으며 비구니 교육의 선도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걸어다니는 대장경’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1901 | 경북 금릉 출생 |
1903 | 삼선암에서 문오(文悟)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11 | 밀양 심상소학교 졸업 |
1914 | 해인사 삼선암에서 문오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19 | 해인사에서 호월(湖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29 | 청암사 극락전 강원 사미과수료 |
해인사 국일암 강원 사집, 사교과 수료 | |
법주사 수정암 강원 대교 수료 | |
1946 | 대구 실달사 학원 강사 |
1947 | 대구 실달사 주지 |
1954 | 한국불교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
1956 | 정화이후 김천 청암사 초대 주지 |
표충사, 삼선암 등 안거 성만 | |
1968 | 김천 대휴사 주석 |
1969 | 대휴사에서 입적(세수 69세, 법납 66세) |
문중 | 계민(戒珉)문중 |
수행지침 | 승가오칙을 철저히 수행 |
수계제자 | 정헌(正憲)・인완(仁完)・정봉(正夆) |
활동 및 공헌
출가
정암(晶岩) 혜옥(慧玉)스님은 1901년 1월 18일 경북 금릉군 대덕면 추양리에서 아버지 박동재와 어머니 김혜순 사이의 세 자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두림이다. 스님의 나이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직접 해인사 삼선암으로 스님을 데려가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자승으로 밀양 심상소학교를 마친 스님은 1914년에 나이 14세에 삼선암에서 대비당(大悲堂) 문오(文悟)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이후 초발심자경문과‘구시화문(口是禍門)’을 교훈삼아 김천 청암사 극락전에서 사미과를 수료하였는데, 이미 이때부터 강백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은사 문오스님 '오부전 스님'
은사 문오스님은 사미니 때부터 예불을 익혀 30여 년 동안 법당과 전각의 조석 예불을 지성으로 드렸기 때문에 삼선암 스님들뿐 아니라 해인사 모든 사중의 스님들이 문오스님을 ‘삼선암 부전’으로 불렀다. 법명의 문오에서 '오'자를 따다가 '오부전'이라고 했는데, 산내에 오부전을 모르는 스님이 없었다. 스님은 철저한 예불과 엄격한 수행을 거듭하셨고, 입적한 뒤에는 오색 영롱한 사리 3과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비구니는 부도를 모시지 못한다는 불무율이 있었으나, 평생 알여하게 수행하고 베푸신 덕화로 삼선암 앞길 옆에 부도를 모시게 되었다.
문오스님은 제자들에게 불교의 율(律)과 선(禪)은 두 버팀목이지만 특히 율은 얇은 유리그릇과 같아서 깨지기 쉽고 깨지면 결국 선(禪)과 교(敎)를 담을 수 없으니 자신에게는 계율로써 청정함을 견지하고 여기에 선과 교를 담아라"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또 계율을 지킬 때에는 '내가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한 걸음 늦추면서 앞일을 처리함이 올바른 지계정신'임을 강조하셨다.
수행
은사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혜옥스님은 길을 가다가 고기 굽는 냄새가 나면 '아이고, 송장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하는 등 일생 동안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며 살았다. 스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해인사 국일암에서 사집과를 수료하고, 법주사 수정암에서 대교과를 마치는 등 배움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물자가 귀한 시대였던 만큼 풍족한 여건 속에서 배움의 장을 마련하지 못하자, 칡 잎이나 모래 위에 글을 써가며 공부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다. 독경할 때는 목소리가 너무도 낭랑하여 독경소리만으로도 온 도량이 극락세계에 와 있는 것처럼 환희심으로 충만했다.
강설을 시작하다
그렇게 공부에 열중하던 어느 날 청암사에 원인 모를 불이 났다. 당시 주지 김대운(金大雲) 화상은 청암사를 중창한다는 취지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하게 되었다. 스님은 아직 배움이 미흡하다며 사양의 뜻을 비쳤으나, 청암사 대중의 간곡한 청으로 법상에 올랐다. 1915년, 나이 불과 15세 때의 일이다. 사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도 법상에 올라 초발심자경문을 강설하니, 대중들이 크게 감명받고 스님께 큰 절을 올렸다. 이때부터 스님은 비구니로서 큰스님 대접을 받았다.
지금도 불교계는‘비구니팔경계법(比丘尼八警戒法)’을 들어 비구니가 법상에 오르거나 주장자를 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비구 율사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 당시 비구니로서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나이 19세 때인 1919년 4월에 해인사에서 호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고 ‘정암당(晶岩堂)’이란 당호를 받았다. 모름지기 출가자로서의 구비 조건을 완비하게 된 시기가 이때다. 밀양 표충사에서 수선안거 3하(夏)를 성만하는 등 강백이면서 선 수행정진에 모범적인 표상이 된 것도 이즈음이다.
보살행
특히 스님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실천에 남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객승이든 신도든 찾아오면 가리지 않고 갖고 있던 것을 나눠주어서, 시봉자는 의복을 마련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곤욕을 치렀다. 어느 해는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치고 나니 수중에 쌀 한 가마 살 돈 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대중이 걱정을 하자, ‘재물을 쌓아 놓고 살면 탐욕이 생기니 기도나 열심히 하라.’며 일의일발(一衣一鉢) 납자의 본분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결국 그 해에는 양식이 부족해 발우를 들고 탁발을 나갔는데, 이 때도 ‘일곱 집만 얻어 오라.’는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 한다. 뿐만이 아니었다.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수행자들이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스님도 납자의 본분을 수지하며 선교겸전(禪敎兼全)은 물론 제반 불사 등에도 소홀함이 없는 역량을 발휘하였다.
청암사 백련암에 주석
청암사 백련암에 주석할 때 단청 불사를 원만히 회향하셨고, 1936년 청암사가 수해로 큰 피해를 당했을 때에는 사찰 복구와 석탑을 세우기 위한 대중의 결집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대구 실달사 주지 역임
1947년부터는 대구불교 부인 연합회의 초청에 의해 실달사를 맡아 운영하면서 일주문 쪽으로는 유치원을 개설하고, 후문 쪽으로는 강당을 신축하여 강설을 통한 포교에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새싹 불자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7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 원생기도와 유치원 보조 협력에 전력을 기울이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유치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자 이를 매각하여 대구시 중리동에 양로원을 개설하고 노인복지에 힘을 쏟기도 하셨다.
전도행각
제자리에 앉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곳곳을 찾아다니며 전법 행각으로 일생을 보냈던 스님은 부처님의 길에서의 전도 행각을 본분사로 삼아 언제 어느 곳이든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주석하던 사찰로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면 삼귀의(三歸依)라도 알고 가라며 그 자리에서 법문을 설했으며, 혹시나 신도들이 잡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 크게 호통을 치며 ‘부처를 찾아라.’고 법문을 하였다. 또한‘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 一朝塵)’이라는 자경문의 경구를 애송하면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는 무상게(無常偈)를 교훈삼아 스스로는 가행 정진하고, 후학들을 독려하였다. 평소에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예경을 마치면 어김없이 보현행원품을 독경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였고, 일요일에는 김천포교당과 교도소, 양로원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법문을 설하는 등 전법 활동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것이 아니다
펼쳐 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다.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방광
1947년 스님의 나이 47세 때, 대구 실달사 주지로 부임하여 머물던 때의 일이다. 지장기도회를 조직해 일주일씩 법문을 하게 된 어느 여름 날, 법을 설하는 스님이나 이를 듣는 대중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환희심으로 충만해지던 즈음 하나의 기적이 발생했다. 스님이 법문에 들어가면서 앞에 제시한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전개무일자 상방대광명’이라는 게송을 읊자마자 세 차례나 방광(放光)이 일었고, 폭염의 더위마저 극락정토로 변해가는 이적(異跡)에 대중의 환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산림법회
또한 마야부인회 주최로 금룡, 수옥스님과 함께 서울 개운사에서 법화산림을 설할 때의 일화는 비구니계에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비구니 3대 강백이 한 자리에서 너무나 유창하고 진실한 법문으로 대중에게 크나큰 발심을 불러일으켰던 당시의 산림법회를 후학들은 비구니 설단(說壇)의 전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때 마야부인회는 법회를 회향하는 자리에서 세 스님들에게 은으로 만든 법륜마크(가사고리)를 증정했다.
무심도인
1956년 청암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에도 김천 수도사(지금은 폐사찰임)와 대구 부인사 경산포교당 등지에서 강설의 의지를 멈추지 않았으며, 다시 청암사 백련암에서 정진 수행한 후 입적 한 해 전인 1968년 68세에 김천 대휴사로 거처를 옮겼다. 평소 시래깃국, 된장찌개, 보리밥 등을 좋아했으며, 상좌들이 공양을 챙겨 드리면 드시고, 미쳐 못 챙기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무심도인이었다. 평상시 세 분 상좌스님들의 시봉이 눈물겹도록 극진하였으며, 관세음보살 주력으로 병마를 이겨 나갔다. 맏상좌 인완스님은 몸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가행정진의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은사스님을 자주 회고한다. 가신 지 오래인 지금도 자신의 수행에 은사의 한평생 삶이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생의 업보인지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선지식으로 우뚝 선 은사스님이 한없이 부럽기도 한 까닭이기도 하다.
입적
미인은 박복하고 나라의 큰 재목은 단명한다고 했던가, 좀더 오랜 시간 사바세계에 남아 반목과 질시 그리고 고통에서 헤매는 중생들을 제도해야 했던 혜옥스님은 평소 신명을 다 바쳤던 ‘중생교화’라는 큰 원력을 유언으로 남긴 채, 1969년 5월 26일 새벽 3시 김천 대휴사에서 사바(裟婆)의 행보를 마감하였다. 세수 69세요, 법랍 66세였다.
스님의 문하에 인완(仁完)·정헌(正憲)·정봉(正夆)스님 등이 있으며 그 밖의 큰 뜻을 이어받은 많은 제자들이 오늘도 전국 각지에서 불법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 운문회보 발취, 불기 2529년 (1985년 5월 1일) 제12호
대휴사
대휴선원의 전신은 은적암이다. 문의산에 위치한 은적암은 신라 헌강왕 당시 도선국사가 초창하여 은적암이라 이름 짓고 그 후 수백 성상을 이어져 내려오다가 일제시대 한 일본인이 절터에서 양질규석을 뱔견하여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가 이조말엽인 1910년이었다. 옛터(지금의 광산자리)시절 마지막에 봉찬스님이 계시다가 사임하고, 현재의 자리로 내려와 2차, 3차로 복원했고 1945년 해방 후 상봉스님이 다시 복원하여 암자명을 대휴사로 개명하고 주석하시다가 입적하였다. 요사채만 3칸만 남은 채 폐허가 된 대휴사에 덕순스님이 인법당 삼아 주석하시면서 대중을 초청하여 오게 하였고 여기에 신축불사 원력을 세워 정진하고 대웅전, 요사채를 세워서 선학원에 등록해서 선학원 재단이 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88~92.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52.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225~274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141.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195~205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혜옥(慧玉)스님 | 본항목 | 혜옥스님(慧玉,1901~ 1969) | 慧玉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옥스님(慧玉,_190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
혜옥(慧玉)스님 | 계민(戒珉)문중 | ~의 일원이다 |
혜옥(慧玉)스님 | 문오(文悟)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혜옥(慧玉)스님 | 해인사 삼선암 | ~에서 출가하다 |
혜옥(慧玉)스님 | 문오(文悟)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혜옥(慧玉)스님 | 호월(湖月)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혜옥(慧玉)스님 | 대구 실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 |
혜옥(慧玉)스님 | 김천 청암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 |
지도
- 대휴사(☎ 054-434-4161):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