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스님(眞觀, 1928生, 비구니)
진관(眞觀)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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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진관(眞觀) |
법호 | 은공(恩空) |
속명 | 최은화(崔銀花) |
출생 | 1928. 9. 20 (비구니) |
출가 | 1948년 |
입적 | 2016. 7. 3. |
사찰 | 진관사(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354)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은공(恩空) 진관(眞觀)스님은 6·25 전쟁으로 소실된 진관사의 중창복원 불사로 옛모습을 복원하고 진관사를 템플스테이와 사찰음식으로 전세계에 잘 알려지도록 만든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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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 경기 평택 출생 |
1948 | 강원도 월정사에서 인홍(仁弘)스님을 은사로 출가 |
강원도 월정사에서 탄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
1948~1950 | 성능스님과 탄허스님께 사교과 수료 |
1950~1960 | 쌍계사 국사암, 대성암, 견성암, 승가사 등에서 안거 성만 |
1960 |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63 | 진관사 주지 취임 |
1963~1980 | 진관사 수차례 중창 불사 |
1980~2004 | 전국비구니회 수석부회장 역임 |
1984~1994 | 조계종 제8, 9, 10대 종회의원 |
1996 | 진관사 부설 포교당 보현정사 및 코끼리 유치원 설립 |
2004 | 현재 진관사 주지 |
전국비구니회 원로위원 및 직할사암 상임위원
활동 및 공헌출가진관(眞觀)스님은 1928년 9월 20일 경기도 평택에서 아버지 수성 최씨 최웅순과 어머니 박태순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성이며, 이름은 최은화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불심 있는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부처님 오신 날, 정월, 칠석 등 특별한 날이면 할머니와 함께 도선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녔고, 여학교 시절에는 선학원에서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웠다.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p38
행자시절스님이 행자를 살던 그 시절은 규율도 엄했고, 모든 물건이 귀했다. 은사 인홍스님은 자비와 엄격함을 함께 갖춘 분이셨다. "승려는 편한 것을 바라면 안 된다.”며 진관스님이 베고 있던 베개를 툭 치고는 나무 목침을 가져다주는 등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주셨다. 온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산중 사정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어쩌다 산중에 대중공양으로 양말을 받으면 뒤꿈치에 먼저 천을 대고 꿰매어 신었다. 채공 소임을 살 때는 너무 힘이 들어 '세세생생 채공을 살지 않겠다.'는 발원을 하기도 했다. 행자 생활을 통해 스님은 엄격함과 검소함을 배웠다. 거기에 천성적인 자비심을 더해 훗날 진관사에 주석하는 동안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법함과 자비심을 베풀 수 있었다. 수계와 진관사 주지 소임그해 1948년 9월 20일 지관스님은 인홍스님을 은사로, 탄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은 불교가 무엇이며 수행이 무엇인지, 중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익혔다. 당시 성능스님과 탄허스님께 수학하였는데, 탄허스님께서는 “진관이는 글을 잘 배우면 앞으로 일대 강사가 되겠구나!” 하며 영특함을 칭찬하셨다. 하지만 스님은 한암 노스님께서 평소 강조하신 ‘부처님의 제자로서 참선을 잘 하면 팔만대장경을 안 봐도 된다.'는 말씀에 경전 공부보다는 참선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간절하였다.
진관사 주지 부임1963년에 서운스님의 권유를 받고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진관사 주지로 부임하게 되었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1011년(현종 2년)에 창건한 사찰로 일찍이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심원사라고 하여 한양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진관사는 고려시대에 역대 왕들이 자주 왕래하면서 크게 융성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수륙재의 근본 도량으로 국가적 수륙재가 개설되는 사찰이었다. 수륙재진관사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수륙재의 근본 도량답게 스님이 54세 되던 1981년에 자운 율사스님을 모시고 칠일칠야 수륙재를 봉행함으로써 수륙재를 다시 부흥시켰고, 현재는 윤달이 있는 해마다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다. 윤달이 깃든 해에 지속적으로 설행되며 2013년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제126호로 지정되며 또 하나의 불교무형문화재 탄생을 기록했다. 봄가을에는 자운 율사스님께서 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 칠일칠야기도와 유가 시식을 직접 집전하셨다. 어린이법회 창립 코끼리 유치원 건립진관스님은 한국 불교의 미래를 가늠하는 중요한 일은 어린이 포교, 청소년 포교, 대학생 포교, 군포교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에 1980년 53세에 진관사 어린이법회를 창립하였고, 1985년에 청소년법회를 창립하였다. 또한 제방의 군법당 건립 및 경찰 법당의 부처님 모시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1996년 69세에는 고양시 행신동에 진관사 부설 포교당 보현정사와 코끼리유치원을 건립하였고, 어린이 포교와 교육 분야에서 지역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종회의원 및 전국비구니회 수석 부회장 역임스님은 1984년부터 조계종 제 8, 9, 10대 종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진관사 중창 불사뿐만 아니라 종단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종단의 심부름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전국비구니회가 창립되면서 지난 2003년까지 전국비구니회 수석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오늘의 전국비구니회관 건립 및 비구니 위상 정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전국비구니회 원로의원, 직할사암 상임위원의 소임을 맡았다.
미국 세컨드 레이디 질 바이든 여사의 사찰음식 체험조 바이든 미국 세컨드 레이디(부통령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2015년 7월 18일 진관사를 방문 한국의 사찰음식을 체험하고 간 적이 있다. 당시 질 바이든 여사는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과 총무 법해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사찰 곳곳을 둘러봤으며, 라운딩 후에는 녹차와 떡, 과일을 들면서 여성교육을 주제로 차담을 나눴다.
수계제자진관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재호(在毫)·영우(英雨)·현주(玄珠)·계호(戒昊)·서혜(書慧)·연욱(兗旭)·정호(淨皓)·법성(法性)·수경(壽竟)·정문(正門)·법륜(法輪)·상법(尙法)·법해(法海)·도희(道喜)·성진(成眞)·효성(孝性)·각성(覺性)·지호(志昊)·해원(海圓)·무애(無碍)·지수·혜진(慧珍)스님 등이 있다. 입적진관스님은 2016년7월3일 진관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68년, 세수 89세이다. 영결·다비식은 2016년 7월 5일 진관사에서 행했다.
진관사진관사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54번지에 위치한 한국의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 말사로써 북한산 진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에 처음 지었다는 유래가 있기는 하지만 이 사찰이 거의 창건 수준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었다. 고려 초 이곳은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목종이 즉위한 뒤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대량원군 순을 강제로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절에 승려로 보내버렸다. 액면상으로는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적자를 제외한 서자들은 출가해 승려가 되는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출가해 승려가 된 뒤에도 대량원군 순은 몇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당했다. 신혈사로 출가한 뒤 신혈소군(神穴小君)이라 불리며 반(半) 연금 상태에 빠진 그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왕순이 채충순에게 편지를 보내어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안타까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목종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훼방을 놓았으며, 신혈사의 주지인 승려 진관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수미단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가 고려 8대 황제 현종으로, 즉위 이후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승려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이다.[6] 그 뒤 진관사는 고려 왕조 내내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선종 7년(1090년)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숙종 4년(1099년)과 예종 5년(1110년)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진관사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사찰임과 동시에 사찰에서 6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수륙대재 덕분이기도 한데, 땅 위, 물속의 모든 의지할 곳 없는 영혼들과 아귀(餓鬼)를 위하여 법요를 열고 음식을 공양하는 행사인 수륙재는 진관사의 경우 조선 태조가 몸소 국가행사로 명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이 태조의 명으로 지은 진관사수륙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따르면 태조 6년(1397년) 태조가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수륙재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본받아 태종도 태종 13년(1413년) 이 절에서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를 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진관사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음력 9월에 거행되고 있다. 그 뒤 세조 9년(146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성종 1년(1470년)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철종 5년(1854년)과 철종 7년(1858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6년(1879년)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호,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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