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희스님(順姬, 1917生, 비구니)
순희(順姬)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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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순희(順姬) |
법호 | |
속명 | 이중경(李重瓊) |
출생 | 1917.11.28. |
출가 | 1946년 |
입적 | |
사찰 | 동작동 보문사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102-54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순희(順姬)스님은 후학들에게 '부처님 법은 참선밖에 없다.'고 강조하며 참선수행정진에 매진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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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경기 화성 출생 |
1946 | 마곡사 영은암에서 인숙(印肅)스님을 은사로 출가, 법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영은암, 견성암, 대성암, 대원사, 윤필암, 오대산 남대 지장암 등 전국 선원에서 수선 안거 |
1961 | 동규스님[1]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2004 | 동작동 보문사 주석 |
문중 | 육화문중(六和) |
수계제자 | 진우·정연 |
활동 및 공헌
출가
순희(順姬)스님은 1917년 11월 28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길성리에서 아버지 이건수와 어머니 최금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창이며, 이름은 이중경이다. 철이 들면서 늘 출가의 꿈을 꾸었던 스님은 공주 마곡사가 유명하다는 소리를 들은 뒤부터는 그곳에 가서 중이 되길 소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마곡사를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났다. 그런데 보따리를 품에 안고 마곡사를 향해 가는 도중에 '나는 너무 무식하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정말 중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걸어가는데, 어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밭을 매는 모습이 보였다. 순희스님은 궁금한 마음에 다가가 “스님, 나 같은 사람도 스님이 될 수 있을까요?”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매우 반가워하며 순희스님의 보따리를 받아 안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절 집이 아주 작고 초라했다.
“나는 꼭 절에서 살고 싶었지만, 집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우리 집에서 나를 보러 오면 이런 집에서 산다고 혹시 흉이나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지요. 하지만 기왕에 승려가 되고 싶어 여기까지 왔으니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스님은 차려주는 보리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 절이 영은암이다. 당시 은사스님인 인숙(印肅)스님은 아홉 살 먹은 아이 하나를 키우면서 상좌 없이 지내고 계셨다. 출가하고 싶어 하는 순희스님을 그렇게 반갑게 맞아들였던 것은 상좌로 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참선수행
“영은암은 선방이 아니라 사판(事判)이었는데, 모두 열두 집이었어요. 각자가 따로 밥을 끓여먹고 살았지요.” 영은암에서 지내던 순희스님은 어느 날 세수 70세의 봉 노스님으로부터 '예산 덕숭산의 견성암에는 스님네들이 모여 참선을 공부하는데, 우리도 그곳으로 공부하러 가자.'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견성암에서 공부를 하려면 양식값을 따로 준비해야 했는데, 순희스님은 수중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양식거리가 있어야 되는데, 제가 어떻게 가겠습니까?"
“예산에 서두리방문(서들(西野)평야)이라는 넓은 들이 있다. 나하고 둘이 거기서 한 일주일 탁발을 하면 아마 한 철 양식값은 만들 수 있을 게다.” 그렇게 하여 순희스님은 예산에 도착하여 열흘 동안 탁발을 했고, 마침내 견성암에 양식값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견성암에는 고봉 큰스님과 덕산 큰스님, 용음 큰스님이 계셨다. 만공스님(덕숭산 큰스님)은 용음스님과 고봉스님 두 분 가운데 누구에게 법을 전해야 할지 고심을 했는데, 고봉스님보다 법은 조금 못하지만 자비심이 많아 중생제도를 잘 하는 용음스님께 법을 전했다고 한다. 그 뒤 만공 큰스님은 열반을 하셨고, 순희스님이 견성암에 도착한 때는 대상(大祥; 입적한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무렵이었다. 대상을 지내고 10월 20날 결제에 들었다.
순희스님은 그때 용음 큰스님께 화두를 탔다. 그런데 이 뭣고’ 화두를 처음 탄 스님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대중스님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며 한 철을 났다고 한다.
“큰스님은 '이 뭣고’ 화두를 주시고 그냥 의심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야 공부하는 것도 발달이 되어서 호흡은 어떻게 하는 건지, 좌대는 어떻게 앉는 건지 등등 가르쳐주는 게 많지만 옛날에는 화두만 던져주고 다른 것을 따로 지도하지는 않았어요. 큰스님은 절대로 신(信)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해제를 한 뒤 순희스님은 ‘우리 영은암도 더 이상 사판으로 살 게 아니라 이렇게 다 모여서 선방을 만들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젊은 스님 몇 사람과 의견을 모아 노스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노스님은 ‘사중에다 살림을 놓고 살 수 없다. 자유가 없어서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선방을 만드는 데 동의하는 스님들만 따로 모여 살게 되었다. 영은암으로 출가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마곡사의 수입이 너무 적어서 선방을 운영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몇 년을 지내는 동안 스님들이 점차 흩어지고 대중이 줄어들어 결국 선방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순희스님은 견성암, 대성암, 대원사, 윤필암, 오대산 지장암 등 제방 선원을 다니며 참선 정진했다.
덕숭산에서 납월 팔일 3일 동안 장좌기도를 할 때였다. 당시 전혀 잠을 자지 않고 기도를 했는데, 서서 하기도 하고 앉아서 하기도 했다. 납월 팔일이 끝나면 여기저기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한번은 큰스님께서 밖을 살피시는데 공양주 행자가 잠에 취한 채 나와서 석가모니'를 찾는 게 아니라 '보리밥 한 솥지기이여, 보리밥 한 솥지기!' 하고 정근을 하여서 큰스님께 야단을 들었다. 공양주의 마음속에는 오직 공양 짓는 것이 화두였던 것이다. 또 흔들거리는 시계추를 뚝 떼어 목탁자루라며 치고 돌아다니는 스님도 있었다고 한다.
순희스님은 견성암 응민스님이 항상 존경스러웠다. 일타 큰스님의 큰누나였던 응민스님은 성품이 원만하여서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좋아하는 스님이셨다. 모든 이들에게 원만하게 마음을 썼던 스님은 공주대학을 마치셨고, 글이 유명하셨다. 순희스님이 아직 한문을 잘 모를 때 육조 스님의 행적을 한글로 직접 써서 주기도 한 자상한 분이셨다. 순희스님은 그 글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전국의 선방을 두루 다니면서도 무슨 인연인지 순희스님은 그 어느 곳을 가도 마곡사가 가장 좋아 보였고, 늘 영은암이 그리웠다.
은사 인숙스님 시봉
스님은 처음 출가의 길로 인도해준 은사 인숙스님을 마음껏 시봉하지 못한 것이 마음 깊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은사스님은 입적하기 3년 전부터 해소 때문에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앉아 계셨다. 그러나 순희스님은 선방에서 공부를 하느라 소임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은사스님의 시봉도 잘 못했다. 그저 공양을 따로 갖다 드리는 게 전부였다.
은사스님이 입적하실 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때는 정월 보름날이라 은적암, 영은암, 대원암 세 절의 스님들이 모두 모여서 밤새 윷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명 노스님이 순희스님을 불렀다.
“스님이 뭔가 이상하시다. 방을 치우고 정리도 좀 해야겠다."
그동안 입적하는 스님들을 많이 봐온 노스님인지라 순희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은 그 말씀에 따라 바삐 움직였다. 순희스님이 방을 치우자 은사스님께서 “나 안 죽어.” 라고 하셨다. 그런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뭔가 이상한 기미를 보이셨다. 은사스님은 그날 밤 열반하셨다. 은사스님의 다비는 마곡사 산중에서 거행되었다.
부처님 법은 참선밖에 없다
오랜 세월 선방을 두루 다니며 수행 정진했던 순희스님은 후학들에게 '부처님 법은 참선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스님이 발심을 한 것도 '부처님 법을 배워서 참선을 해야 된다.' 는 만공 큰 스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저는 마음속에 참선수행을 해야만 옳은 중이 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중이 된 게 아니다. 다음 생, 또 그 다음 생에도 참선하는 스님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때는 남자로 태어나서 글을 잘 배워 으뜸가는 큰스님이 되겠다.'는 원이 있습니다. 스님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세상사람 들과 접촉하고 포교를 하려면 부처님 법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라도 더 일러줄 수 있고, 체계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중생제도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육조스님은 글을 몰라도 참선으로 무불통제 활연개오해서 중생제도를 하셨지만 근기 낮은 우리들은 배워야 합니다.”
수계제자로는 진우·정연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37~641.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17.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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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희(順姬)스님 | 본항목 | 순희스님(順姬, 1917~) | 順姬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순희스님(順姬,_1917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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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희스님(順姬) | 육화문중(六和) | ~의 일원이다 | |
순희스님(順姬) | 인숙스님(印肅) | ~의 수계제자이다 | |
순희스님(順姬) | 마곡사 영은암 | ~에서 출가하다 | |
순희스님(順姬) | 법해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순희스님(順姬)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순희스님(順姬) | 서울 보문사(동작동)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순희스님(順姬)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공주 마곡사 영은암, 예산 수덕사 견성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산청 대원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평창 월정사 지장암(오대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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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동작동 보문사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102-54
주석
- ↑ 동산혜일(東山慧日)스님의 속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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