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암종헌(曼庵宗憲)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14일 (목) 06: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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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만암종헌(曼庵宗憲,1876~1956)
  • 생애·업적  :

해방 이후 정광중학교 교장, 대한불교조계종 제2대 종정 등을 역임한 승려.성은 송씨(宋氏). 법호는 만암(曼庵). 전라북도 고창 출신. 목양산인(牧羊山人)이라고도 한다.
4세에 아버지가 죽고 8세에 서당에 들어가서 글을 배우다가 11세에 어머니가 죽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백양사(白羊寺)로 출가하여 취운화상(翠雲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16세에 구암사(龜巖寺) 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박한영(朴漢永) 강백에게 수학하고 다시 운문암(雲門庵)의 환응(幻應) 강백에게 수학하여 불교경전을 익혔다.
23세에 환응 강백에게서 전강(傳講)을 받아 개강(開講)하였으며, 1905년 이후에는 청류암(靑流庵)·백련암(白蓮庵)·천진암(天眞庵)·해인사 강원 등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항상 100여 명의 승려들이 그의 밑에서 공부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1910년에 나라를 잃게 되자 다시 백양사로 돌아와서 시대와 인심에 부합하는 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부근의 사찰과 협의, 백양사 안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설립하고 이전의 강원제도를 혁신하였다.
당시에 그는 100여 명의 학승들에게 불경뿐만 아니라 외전(外典:불교 이외의 경전)도 함께 배우게 했으며,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던 교재인 국사(國史)와 지리, 기타 민족정신을 심어 줄 수 있는 모든 교과목을 지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양사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출입하게 되었으며, 단순한 사찰의 기능을 넘어선 민족정신 함양 도량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1911년에 백양사에서 대오견성(大悟見性)하여 수백 명의 수좌(首座)들에게 선을 지도하였다. 1914년에 처음 백양사의 주지로 취임했을 때는 수칸의 요사채밖에 없는 황폐한 사찰이었다. 그는 학승과 수좌들을 지도하면서 철두철미한 자급자족 정신을 제창하였다. 젊은 승려들에게 양봉기술을 익히게 하고 각종 필수품을 제조, 판매하여 생활을 돕게 하였으며, 사찰 토지를 승려들이 직접 경작하게 하였다.
특히, 반선반농제도(半禪半農制度:하루의 반은 참선하고 반은 농사를 짓는 제도)를 확립하여 선가(禪家)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의 가풍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또한, 이와 같이 하여 얻은 수입은 절대로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하고 사중(寺中) 재산으로 취합하게 한 결과 처음 40석을 추수하는 데 불과했던 백양사 재산을 약 800석까지 올려 놓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1928년부터 3년 동안 현재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에는 광주에 정광중학교(淨光中學校)를 설립하여 7년 동안 교장직을 역임하는 한편, 호남고불총림(湖南古佛叢林)을 결성하여 불교정화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대한불교조계종 정화불사(淨化佛事)의 효시를 이루게 되었다.
그 뒤 1952년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5년 동안 재직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대다수의 승려들이 처를 거느리게 되어 승적(僧籍)을 교적(敎籍)으로 고쳤던 것을 다시 승적부(僧籍簿)로 고쳐 출가승 본위의 종단 출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삼보사찰(三寶寺刹)을 비롯한 전국의 중요 사찰을 비구승에게 돌려 줄 것을 강조하였고, 대처승에게는 본사의 주지는 물론 삼직(三職) 등도 맡기지 말도록 하였다.
또한, 태고 보우(太古普愚)를 한국불교의 종조(宗祖)라고 역설하여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종조로 내세우는 주장에 반대하였다. 항상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시대에 부합하는 사원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평생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로 일관하였다. 1956년 12월 16일에 나이 81세, 법랍 71세로 입적하였다. 화장 후 사리 8과를 수합하였는데 오색광채가 영롱했으며, 탑을 백양사에 건립하였다.
정혜(定慧:수행과 지혜)를 함께 갖춘 일대 종사로서 태고선(太古禪)의 중흥에도 크게 공헌했던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