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법스님(敬法, 1922生, 비구니)
경법(敬法)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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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경법(敬法) |
법호 | |
속명 | 이천옥(李千玉) |
출생 | 1922.10.09. |
출가 | 1939년 |
입적 | |
사찰 | 금당사(전 동주사, 황룡사)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와리 532-22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경법(敬法)스님은 허름한 동주사를 일신하여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었으며, 오갈 데 없는 어린이 보육에 헌신하신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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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전북 익산 출생 |
1939 | 경남 해인사에서 혜운(慧雲)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9 | 광주 신광사에서 만암(曼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51 | 동주사 주석 |
1952 | 동주사 법당 불사 완공 |
1970 |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2004 현재 | 동주사 주석 |
문중 | 삼현문중(三賢) |
수계제자 | 일성·일수(一修) ) |
활동 및 공헌
출가
경법(敬法)스님은 1922년 10월 9일 전북 익산시 함열읍 와리에서 아버지 이봉환과 어머니 김이순 사이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인이며, 이름은 이천옥이다. 조부가 화동부사를 지냈을 정도로 덕망이 높았는데, 대를 이를 손자가 없어서 집안에 근심이 많았다. 이 때문에 스님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으려고 지리산으로 100일 기도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양친이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스님 세 분이 깨 한 걸망, 목화 한 걸망, 목탁과 죽비가 든 걸망 한 개를 윗목에 다 풀어놓고 잘 보관하라는 당부를 한 뒤 돌아갔다. 부모님은 훌륭한 아들을 낳을 거라는 태몽으로 여기고 잔뜩 기대했는데 딸로 태어났다. 이렇게 범상치 않은 태몽과 함께 태어난 스님은 세 살 되던 해에 “나는 해인사에 가서 머리 깎고 중이 될 거다.” 라는 말로 처음 말문을 텄다고 한다. 전생의 선근이 그대로 어린아이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스님은 안타깝게도 7세에 어머니를 잃었고, 속가에 사는 동안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병치레를 했다. 자라면서는 문 밖 출입도 하지 않고 16세까지 오로지 관음주력만 하며 지냈다. 매일 방안에 틀어박힌 채 절에 가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니 아버지는 점차 자신의 딸이 절에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스님의 아버지는 딸을 출가시킬 마땅한 절을 수소문하던 차에 인척을 통해 광주에 유명한 비구니스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스님은 1939년 나이 18세에 광주 신광사로 찾아가 혜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사미니계를 수계했다.
동주사 불사와 어린이 교육
집에서 일을 해본 적이 없던 스님은 절에 들어와 할 일도 많고 몸도 많이 아팠지만 이를 능히 참고 이겨내는 것이 중노릇을 잘하는 것이라 여기며 굳건히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게 절살림과 승려의 길을 하나씩 익혀가는 동안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백양사 영천굴에 가서 관음기도를 하며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서 영천굴에서 나오게 되었다. 정화 후 스님은 범어사 대성암 만성스님 회상에서 안거를 하다가 1951년 30세에 당시 피난민들의 집합지였던 동주사의 주지로 취임하게 되었다. 동주사는 속퇴한 비구니스님이 허름한 오두막에 부처님을 모시고 시작한 사찰로 행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스님이 동주사에 처음 왔을 때는 가난한 절살림과 허름한 환경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곧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법당에서 흰 노인이 나오면서, “지금 떠나고 나면 그 많은 빚을 어느 세월에 다 갚으려고 하느냐!” 하고 호통을 치시는 것이었다. 이에 스님은 “돈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노인은 “살다 보면 다 살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살아보아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여 스님은 동주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기로 했다. 이후 주변 토지를 매입하여 대웅전과 요사채의 불사를 수차례 진행시켰다. 한편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하나 둘 데려다 보듬어 키우기 시작했다. 상좌스님을 키워내는 것은 자신이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으며, 스님들은 대학교육이나 그 이상의 공부를 하기가 수월하지만 의지처가 없는 어린 아이들은 스님이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스님은 아이들을 30명 정도 키웠는데, 좀 더 넉넉한 환경에서 원하는 만큼 충분히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한 것이 늘 미안하고 안타까웠다고 한다.
경법스님의 수행지침
스님에게는 몇 가지 수행 지침이 있다. 첫째는 계행을 우주와 법으로 삼고 생활하는 것이다. 둘째는 항상 자성을 놓지 말고 화두를 챙기는 것이다. 언제든지 마음 가운데 화두를 챙겨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마음을 일순간으로 놓아버리면 화두 또한 놓아지니 일념을 세워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복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생각지 말고 사람을 보면 언제든지 큰스님을 대하듯 나를 낮추어 존경하며 극진히 대하여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이생에서 깨치지 못하면 내생에는 확철대오 해야 한다고 원력을 세워놓는 것이다. 스님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결심하기를 내 마음을 크게 깨칠 것 같으면 후생에 남의 몸을 빌리지 않을 것이니 저 바다에 가서 고기밥이 되리라.' 하고는 죽음도 그 무엇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의 그 마음을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공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여 깨달음을 얻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자신이 한심하고, '공부가 적고 도가 적은데 어떻게 고기밥이 될 자격을 얻을 수 있겠느냐.' 고 스스로를 경책하게 된다. 스님은 또한 '대오를 이루었다면 물을 보아도 무서움이 없을 것인데, 대오를 이루지 못하여 물이 두렵고 배타는 것이 싫다'며 지금까지의 공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린다. 스님의 겸손한 모습은 후학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경법스님은 무엇보다도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모두가 처음 발심했을 때의 마음을 잊지 말고 그 마음대로만 살라.”는 것이다. 스님은 2004년 현재 세수 83세, 법랍 66세로 동주사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일성·일수(一修)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450~45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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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법(敬法)스님 | 본항목 | 경법스님(敬法, 1922~) | 敬法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경법스님(敬法,_192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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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법(敬法)스님 | 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
경법(敬法)스님 | 혜운(慧雲)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경법(敬法)스님 | 광주 신광사(두암동) [1] | ~에서 출가하다 | |
경법(敬法)스님 | 만암(曼庵)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경법(敬法)스님 | 고암(古庵)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경법(敬法)스님 | 익산 동주사 | ~을(를) 중창하다 | |
경법(敬法)스님 | 익산 동주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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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금당사(전 동주사, 황룡사) :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와리 532-22
주석
- ↑ 1991년에 지산동에서 두암동으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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