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혜원스님(慧圓, 851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27일 (월) 09:57 판 (생애)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인물정보 |표제 = 혜원(慧圓)스님 |사진 = |법명 = 혜원(慧圓) |법호 = |속명 = 김씨(金氏) |본관 = |출생 = 851년 (비구니) |출가 = 875년 |입적 = 938년(고려태조 21년) |주소 = 청룡사(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17-1) |}

정의

혜원(慧圓)스님은 후삼국으로 분열된 시기에 고려로 통일되도록 염원하여 국태민안에 기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851 출생
875 세달사(世達寺, 북한 경기도 풍덕군(豊德郡)에서 허담스님을 은사로 출가
906 궁예(弓裔, 신라 龍德왕자)의 청으로 철원 화개산 도피안사 주석
922 왕건이 청룡사를 창건하여 주지 소임(고려 태조 5년)
938 청량사에서 입적(세수 88세, 법랍 64)(고려 태조 21년)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원(慧圓)스님은 851년(신라 문성왕 13년)에 계림부(鷄林府)에서 아버지 금성태수(金城太守) 김융(金融)과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18세에 화랑도(花郞徒) 예흔랑(譽昕郞)에게 시집을 갔으나, 20세 되던 해에 예흔랑이 국선(國仙)(화랑)으로 금강산에 들어간 뒤 소식이 없자 친정아버지 김융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스님의 아버지는 신라 제48대 임금 경문왕(景文王)이 승하(昇遐)하여 궁중으로 들어가는 길에 경문왕의 제3비(第三妃)의 소생 용덕왕자(龍德王子)(궁예(弓裔))가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다가 위홍(魏弘) 등에게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역적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산이 탕진되고 집안이 적몰하는 바람에 혜원스님은 875년 나이 25세에 태백산 세달사(世達寺)(경기풍덕(京畿豊德)에 있던 흥교사(興敎寺))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허담화상에게 계를 받고 출가하게 되었다.

궁예와 법형제 인연

몇 년 뒤 용덕왕자 궁예는 우연히 세달사에 왔다가 허담스님의 상좌가 되었는데, 이렇게 하여 혜원스님과 용덕왕자는 법형제가 되었다. 용덕왕자를 구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김융의 딸과 불문에서 법형제가 된 것이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세달사에 머무는 동안 혜원스님은 용덕왕자인 태허스님을 극진히 아끼고 보호하였다. 891년(신라 진성여왕 5년)에 태허스님은 나라가 어지럽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절을 떠나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이어 양길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우고 894년 명주(溟州)(강릉(江陵))와 철원(鐵圓)(철원(鐵原))을 함락한 뒤 독립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이듬해 강원도 일대를 세력권 아래에 두어 나라의 규모를 갖추었다.

도피안사 주석

1901년(신라 효공왕 5년)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옛날의 정을 잊지 못하여 세달사에 있는 혜원스님을 자주 찾아다녔다고 한다. 혜원스님은 나이 57세 되던 해에 궁예왕의 청을 받고 철원 화개산에 있는 도피안사(到被岸寺)에 주석하게 되었는데, 궁예왕은 종종 스님을 궁중으로 불러 연석(宴席)을 배설하고 공양(供養)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때 혜원스님은 난영(蘭英) 왕비와 친밀하게 지내던 중 왕비의 소개로 궁예왕의 신하 왕건을 만났다. 그 뒤 궁예왕이 죽자 918년에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고, 고려 태조가 되었다. 그리고 922년(태조 5년) 청룡사를 창건하고 도피안사의 혜원스님에게 청하여 제1세 주지를 맡게 하였다. 혜원스님의 세수 72세였다. 당시 한반도의 형세를 살펴보면, 신라는 제54대 경명왕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고, 후백제(後百濟)는 견훤(甄萱)이 27년간 왕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통일 고려 염원

혜원스님은 좁은 땅덩어리가 세족으로 나뉜 것이 몹시 마땅치 않고 안타까워서 마음속에 늘 간절한 통일의 염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1478년(태조 17년) 1월 1일 혜원스님은 왕명을 받들어 청룡사에서 삼한통일(三韓統一) 위축 천일기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6월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에 항복을 하였고, 그해 10월 신라의 경순왕은 군신회의(會議)(화백회의(和白會議))를 열어 국토의 전부를 고려에 양부(讓附)하였다. 또 그 다음해 9월에는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마저 고려에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왕건은 936년 즉위 19년 만에 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는데, 이는 혜원스님이 통일 위축 기도를 시작한 지 2년만의 일이었다. 태조 왕건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 모두 불보살(佛菩薩)의 가피력(加被力)이라고 믿었다. 또한 청룡사 주지 혜원스님이 기도 정진한 힘과 청룡사 도량의 영험이 크다고 여겨 청룡사에 후상(厚賞)을 하사(下賜)하였으며, 이후 나라의 큰 위축 기도를 청룡사에서 올리도록 하였다.

입적

왕건의 명을 받들어 청룡사에 들어와 16년 동안 주석하던 혜원스님은 삼국이 통일된 지 3년째 되던 938년 세수 88세, 법랍 64세로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 청룡사지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