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혜안스님(慧眼, 1912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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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2일 (월) 10:07 판



정의

혜안(慧眼)스님은 한 평생을 청정한 계행으로 산 혜안스님은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의 제4대 종정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2 경북 청도 출생
1925 정혜사에서 영명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5 정혜사에서 운곡(雲谷)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37 보문사 신축불사 및 중수에 동참
1939 원통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3 보문사 강원 졸업
1981 대한불교 보문종 4・5・6대 총무원장
1985~2000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 고문
1990~2005 대한불교 보문종 7・8・9대 종정 역임
2005 보문사에서 입적(세수 94세, 법랍 79세)
문중 계민(戒珉)문중
생활신조 신심(信心)껏 열심히 공부하라.
상훈
수계제자 지연(智蓮)・지택(智澤)・지윤(智輪)・지민(智珉)・지복(智福)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40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41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42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43


청원(淸源) 혜안(慧眼)은 1912년 8월 1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서 불심이 강한 아버지 천시운 거사와 어머니 엄우연 보살님의 9남매 중 4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이고, 이름은 천만순이다. (일조스님과 혜안스님과 자매인데 일조스님 편에서는 어머니의 이름이 ‘엄우영’으로 나온다.)

혜안스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사찰에 가서 어른들 틈에 끼여 절도 하고 청소를 하는 사이 ‘나도 언제쯤이면 스님들처럼 삭발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탁발을 해서 걸망을 지고 집 앞을 지나가는 스님들의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때로는 치렁치렁하게 땋아 내린 애꿎은 머리만 잡아당기며 스님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곤 하였다.

청도 운문사 건너편에 스님의 속가 집이 있었는데 9살 무렵에는 운문사 쪽을 바라볼 때마다 항상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아 절을 하곤 했다. 동생의 이런 모습을 본 큰 오라버니가 ‘그렇게 절이 좋으면 스님이 되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과 스님의 큰 오라버니는 형제지간을 맺었는데, 주지스님 또한 어린 혜안스님을 보고 스님이 되라고 권하였다.

그 후 14세 되던 해 스님은 청신암에서 오신 금광 노스님을 따라 출가하고, 5월 13일 삭발을 하였다. 이상하게도 스님은 염불을 외우거나 경(經)을 볼 때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고 한다.

전주 정혜사에서 영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혜안스님은 1935년 정혜사에서 운곡스님께 사미니계를 수지하였으며, 1939년 비구니계를 두 차례 받았다. 한번은 원통사에서 동산 큰스님께, 또 한번은 한영 큰스님께 받았는데 하동산스님은 혜안스님에게 돌을 선물로 주셨다. 그런데 그것을 잘 간직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바람에 오랜 시일이 지난 때까지 스님에게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비구니계를 받을 당시 스님은 몸이 아파 고생을 많이 하였다.

정혜사에서 수행

당시 정혜사는 강원과 선방이 있어서 선(禪)과 교(敎)의 수행정신이 맹렬한 불꽃처럼 살아 있을 때였다. 때문에 도량은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 학인들의 간경(看經)소리에 불법이 충만하였고, ‘이 한 목숨 내걸고 일대사(一大事)를 직하(直下)에 일도양단(一刀兩斷)하리라.’는 선객들의 기세 또한 의기 충만했다. 그러므로 이제 막 입산한 초학자인 스님의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한 환희심으로 가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양주, 채공 등 대중 소임을 사는 가운데서도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절박한 일이라는 것을 느낀 스님은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으로 생사를 해결하기 위해 밤낮을 잊으기도 했다.

서울 보문사로 오다

이렇게 오직 마음의 부처자리를 찾고자 일념으로 정진하시니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났다. 1929년에 시작한 스님의 행자생활은 1939년에 이르러 끝이 나고 서울 보문종에 자리를 잡았다. 1914부터 1937년에 이르는 동안 안거를 하며 정진라는 중에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보문사에 입방을 하게 된 것이다.

스님께서는 한평생 오직 청정한 계행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계는 천상에 이르는 사다리요, 계를 지킴으로 정(定)을 낳게 하고, 정으로써 혜(慧)에 이르는 불교의 덕목인 삼학과 육바라밀을 몸소 행한 것이다. 또한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하다못해 마루를 닦을 때에도 저 멀리 가서 확인해 보고 자국이 있으면 닦고 또 다시 닦았다. 스님은 이렇게 철두철미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성품 때문에 별명도 많았다고 한다.

스님이 1939년 서울 보문사로 왔을 당시 보문사는 비구니 사찰로서 최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대처승과 돌아가신 노스님이 무려 6년 동안 재판을 하였고, 또보문사 불사를 할 때 당시 공사를 맡았던 목수가 견적서를 빼앗아 간 일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오직 정진과 기도로써 원(願)을 세워 오늘의 보문사를 만들었다.

혜안스님은 보문사에 온 후 할아버지(정원명 거사, 은사인 영명스님의 아버지)께 화엄경을 배웠는데 큰마음을 가지고 임했으며, 어른스님들께도 글을 배웠다. 스님께서는 평생 오신채가 들어간 음식은 물론 심지어 빵과 과자류조차 계란이 들어갈까 입에 대지 않았다.

은사이신 영명스님

한번은 은사스님과 혜안스님이 인분 거름으로 기른 채소를 드시고 채독에 감염되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는데, 배가 부풀어 오르는 등 고생이 심하셨다. 결국 강사를 하시던 은사스님은 법랍 30세에 입적하시고, 혜안스님은 완쾌되었다. 은사스님은 세 살에 해인사로 동진 출가하여 많은 일을 이루셨으며, 혜안스님은 늘 은사스님처럼 살아가기를 바랐다. 특히 은사스님의 화통하고 대담한 성격과 법당 잘 짓는 일을 본받아 계승하고 싶어했다.

혜안스님의 노스님을 향한 효심

6·25 전쟁 때의 일이다. 서울이 함락되어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했는데, 스님이 가지고 간 것은 달랑 이불 한채뿐이었다. 스님은 이때 노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매우 고생을 하였다. 매서운 한겨울에 노스님이 행여 추우실까봐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낯선 보살님의 도움을 얻기도 하였다. 그 때 혜안스님은 자신의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스님이 추우실까봐 노심초사하며 애를 많이 썼다. 얼마나 지극한 효행으로 시봉하셨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피난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하여 스님은 결국 눈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혜안스님의 수행과 가람수호

스님은 국태민안과 불국정토 발원 기도를 하면서‘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고?’라고 안으로 반조하고, 밖으로는‘죽을 얻어 축원해도 그 참뜻을 모른다면 단월시주에게 부끄럽지 아니한가.’하며 지극 정성으로 축원하였다.

20여년 계속된 불사에 사찰 재정 형편은 말할 수 없이 핍박해졌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늘 배고팠던 시절, 온 대중이 혼연일체가 되어 화합과 단결로 ‘이 한 몸 희생하더라도 불법수호와 불국토 정립을 반드시 이루리라.’ 원력으로 탁발을 하고, 몸소 담을 쌓고, 마을의 인분을 걷어 직접 어깨에 메고 밭에 뿌렸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종각, 시왕전, 보광전 등을 차례로 중창했다. 석굴암 불사 도중 형편이 너무 어려워 힘들어하실 때, 꿈에 큰 새가 날아와 얼굴을 위로 향하는 부처님의 상호를 부리로 조성하는 것을 보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여기고 기꺼이 불사에 동참하였다.

보문종 총무원장과 보문종4대 종정 역임

혜안스님은 1981년 보문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여 10년 동안 부채탕감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현재에 이르렀다. 1990년 대한불교 보문종 4대 종정으로 취임한 이후, 2005년까지 역임하였다. 스님께서는 무려 반세기도 넘는 56년 동안 보문사에 주석하면서 보이지 않는 힘으로 대중들을 외호하였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예불을 하고, 법당의 문을 가장 먼저 들어서는 신도들을 반기며 부지런함을 보여주던 혜안스님은 ‘행주좌와 머묵동정 어느 것 하나도 도(道)가 아님이 없다.’며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아침마다 대승경전인 원각경, 금강경, 아미타경 등을 독송하였다.

입적

신심껏 열심히 공부하자는 신조를 갖고 수행 정진하던 스님은 2005년 10월1일 보문사에서 세수94세, 법럽81세로 세연을 접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지연(智蓮)・지택(智澤)・지윤(智輪)・지민(智珉)・지복(智福) 등이 있다.

보문사

[보문사 대웅전] 사진출처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search/%EB%B3%B4%EB%AC%B8%EC%82%AC?page=3
[보문사 석굴암] 사진출처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search/%EB%B3%B4%EB%AC%B8%EC%82%AC?page=3]

홈페이지: http://www.bomunsa.or.kr/

보문사는 인근 미타사와 같이 탑골(塔洞)에 있었으므로 ‘탑골 승방’ 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조계종 소속 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대한 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몸 전체의 온갖 덕(德)을 보(普)라 하고, 쓰임을 나타내는 곳을 문(門)이라고 하는데, ‘보문(普門)’은 보살이 일체 성덕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기회와 시기를 따라 그 효용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만여 평의 대지 위에 대가람의 규모를 갖추고 있는 보문사는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조용한 암자이다. 보문사는 처음 1115(고려 예종 10)에 담진(曇眞)스님 즉, 혜조국사(慧照國師)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전해져 온다.

조선 후기 1692년 (숙종 18년)에 묘첨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757년 (영조 33년)에 보찬스님과 유봉스님이 대웅전을 수축하였다, 1826년 (순조 26년)에 정운(正雲)스님이 좌우승당(左右僧堂)을 개축하였으며, 1842년(헌종 8년)에 영전 스님이 또 다시 대웅전을 수축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광복과 함께 주지 송은영(宋恩榮)스님이 취임하면서 30여 년간을 불사의 중흥과 건물 중창에 전심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송은영 주지스님은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새롭게 짓고, 보문종 이라는 독립된 종단을 설립함으로써 비구니들만의 고유한 수행 풍토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1972년 대한불교 보문종으로 등록한 후 이 해 6월 16일, 경주의 신라 석굴암을 본떠 사찰 뒤쪽의 보문산 돌산에 석굴암을 조성하였다. 1970년 8월부터 23개월간 진행된 이 불사에는 약 4,500여명에 이르는 조각가와 석공이 투입되었고, 2,400톤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는데, 이 것은 보문사의 대표적인 불사가 되었다.

1996년 보문사의 대웅전 영산회상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8호로, 대웅전 신중도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장보살도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한편 석굴암 앞의 팔각 9층 석탑은 1978년 오대산 월정사의 탑을 본떠 조성하였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내부에 봉안하였다. 보문사 스님들의 범패(梵唄)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소중한 무형자산이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혜안(慧眼)스님 본항목 혜안스님(慧眼, 1912~2005) 慧眼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안스님(慧眼,_191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혜안(慧眼)스님 계민(戒珉)문중 ~의 일원이다
혜안(慧眼)스님 영명스님 ~의 제자이다
혜안(慧眼)스님 전주 정혜사 ~에서 출가하다
혜안(慧眼)스님 운곡(雲谷)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혜안(慧眼)스님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지도

  • 보문사 (서울 성북구 보문동 3가 16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