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수진스님(守珍, 191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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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견성암에서 [[효성스님(曉星, 1898生, 비구니)|효성(曉星)스님]]을 은사로 출가, </br>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3247 보덕사]에서 보산(普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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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http://www.beomeo.kr/ 범어사]에서 [http://www.beomeo.kr/idt/idt03_2.php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2022년 8월 20일 (토) 15:19 판



정의

수진(守珍)스님은 견성암에서 효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선원에서 안거를 지내고 경주 금련선원에서 정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6 강원 양양 출생
1957 견성암에서 효성(曉星)스님을 은사로 출가,
보덕사에서 보산(普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0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1 오대산 사고사에서 정진,
대성암 안거 3년, 윤필암 5안거 성만, 보덕사, 내원사, 간월암, 해인사에서 각 3년 안거 성만,
삼선암, 약수암 극락전에서 각 1년 안거 성만, 경주 흥륜사 선원 10안거 성만 등
2004 경주 금련선원에서 수행 정진
문중 실상(實相)문중
수계제자 선오(禪伍)·대현(大玄)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23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24

수진(守珍)스님은 1916년 2월 6일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임천리 172번지에서 아버지 박기주와 어머니 김봉덕 사이의 1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동녀이다.

출가하기 전 서울에 살던 스님은 삼각산 문수암에 기도를 드리러 다녔다. 스님들의 염불소리를 들으며 신심을 키워가던 스님은 마침 문수암에 다니러 오신 자우스님을 따라 전라도 선암사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불교정화의 시기로 선암사는 비구와 대처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실망을 느낀 스님에게 누군가 견성암으로 가라고 일러주어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스님은 비로소 견성암에서 효성스님을 은사로 입산을 하게 되었다. 1957년 스님의 나이 42세인 늦깍이 출가였다.

그때 스님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출가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출가하고 얼마 안 있어 행자 생활을 하면서 공양주를 살게 되었는데 스님이 공양주 사는 것을 보고 은사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 비록 깨진 부뚜막에 흙 바르고, 꽁보리밥을 짓는 것이 전부인 공양주였지만 스님은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만성스님이 대성암에 계실 적에 3년간 채공[1] 소임을 지냈으며, 보덕사에서도 공양주 소임을 살았다.

원경 노스님은 스님이 공양주를 살 적에 누룽지를 가져다드리면 사중 것은 가져오면 안 된다고 단호히 물리셨다. 수진스님은 보덕사에서 보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지만 자세한 수계년도는 기억하지 못한다.

오대산 사고사

46세 되던 해인 1961년 여름, 오대산 사고사에서 살 적에는 아침저녁으로 죽을 먹고, 점심에는 깡조밥으로 공양해야 했다. 당시 사고사 대중으로는 자우스님, 혜은스님, 자훈스님 등이 계셨다.

오대산 사고사에서 해제를 한 뒤 스님은 속초와 주문진에서 탁발을 하며 대구로 내려갔다.

은사이신 효성스님

은사스님이신 효성(曉星)스님은 지장보살의 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덕이 높은 분이셨다. 항상 형편이 어려운 절과 수좌들 돕기를 즐겨하셨고, 나일론 양말이 나왔을 때 그것을 사는 것은 사치라고 하시면서 양말을 안 신으셔서 발이 말발굽처럼 새까맣게 되기도 하였다.

은사스님은 잠시 동학사 주지와 간월암 주지를 지냈다. 노스님이신 원경스님(만공 큰스님 어머니 상좌)과 함께 2개월 정도 지냈는데, 은사스님은 평소에 주무시다가도 “화두를 챙겨 죽어야지.” 하는 말씀을 자주 할 정도로 구도에 대한 간절한 열정이 강하셨다.

수옥스님이 계신 내원사에서 지내다

스님은 수옥스님이 내원사에 계실 때 그곳에 오래 머물렀는데 대중이 많을 때는 70여 명에 가까웠다. 사중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 대중스님들은 공양을 못 드신 적도 있었다. 수옥스님은 마치 은사스님처럼 잘 대해주셨으며, 수진스님은 50세 전후 쯤에 내원사를 나왔다.

여러 곳에서 안거를 지내다

그 후 스님은 해인사에서 3년을 살았다. 삼선암에서 1년을 보내고, 약수암에서 1년, 그리고 극락전에서 1년을 살았는데, 극락전에서 지낼 때는 입적하신 석남사 철마스님과 보현암 혜춘스님과 함께 살았다.

그 뒤로도 문경 윤필암에서 4~5철 안거를 났고, 경주 흥륜사에서는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동화사 부도암, 양진암, 내원암에서도 안거를 났는데 백양사 조실 서옹 큰스님께서 결제와 해제 법문을 해주셨다.

아유명주일과(我有明珠一顆)
구피진노관소(久被塵勞關銷)
금조진진광생(今朝塵塵光生)
조파산하만경(照破山河萬境)
내게 반짝이는 구슬이 한개 있나니
오랫동안 먼지에 쌓여 있었네.
오늘 먼지를 닦아 제 빛을 발하게 하니
온갖 산하를 두루 비치게 한다.

2004년 수진스님은 금련선원에 주석하면서 수행 정진 중이다. 지금 살고 있는 금련선원의 처소는 자제정사 경덕스님이 마련해주셨으며, 수진스님은 경덕스님이 주신 도움에 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선오(禪伍)스님과 대현(大玄)스님이 있다.

경주 금련선원

[금련선원 전경]사진출처: 출처 :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397

경북 경주 현곡면에 위치한 금련사(주지 법운스님·사진)는 비구니 스님 80여 명이 함께 사는 사찰이다. 사찰이 창건된 건 30여 년 전,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재학 중인 사미니 스님들을 위해 부산 금련회에서 기탁한 기숙사였다. 이후 동국대에 기숙사가 건립되면서 비구니 선원으로 탈바꿈됐다. 그런데 선원에서 수행하는 비구니스님 가운데 몸이 불편한 스님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스님들에게 방사를 한 칸 한 칸 내어주다 보니 어느새 80여 명으로 늘어났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수진(守珍)스님 본항목 수진스님(守珍, 1916) 守珍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守珍,_191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수진(守珍)스님 실상(實相)문중 ~의 일원이다
수진(守珍)스님 효성(曉星)스님 ~의 제자이다
수진(守珍)스님 수덕사 견성암 ~에서 출가하다
수진(守珍)스님 보산(普山)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수진(守珍)스님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지도

  • 금련선원 (경북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354-57)



주석

  1. 반찬을 만드는 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