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일지스님(逸智, 1944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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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如如) 일지(逸智)스님은 1944년 8월 1일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서포리에서 아버지 김해안(金海眼)과 어머니 동래 정씨 정임념(鄭任念)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춘화이다.
 
여여(如如) 일지(逸智)스님은 1944년 8월 1일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서포리에서 아버지 김해안(金海眼)과 어머니 동래 정씨 정임념(鄭任念)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춘화이다.

2022년 7월 19일 (화) 16:26 판



정의

일지스님은 부안 지장암 주지로 지장암을 중창하고 자기 본성을 잃지 않고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4 전북 부안 출생
1964 이리 원광여상 졸업
지해스님을 은사로 출가
석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8 개심사 강원에서 능엄경 수학
1973 동학사 강원 졸업
1974 [[석암(昔岩)스님|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7 서울 전등선림 주지 역임
1980~1986 내원사 재무 소임
1986~1991 동학사 교무, 학감 역임
1987 지장암 주지
1991 지장암 중창 불사(대웅전, 나한전, 요사채, 정랑 등)
2022 현재 지장암 주지

기타사항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행지침 언제 어디서나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지 말고 수행 정진해야 한다.
생활신조 항상 감사하고, 검소하게 살자
취미 우리 꽃 가꾸기
수계제자 진공(眞空)·정헌(正憲)·성훈·선문(善門)·수형(修亭)·현공(玄空)·진정(眞正)

활동 및 공헌

출생

일지스님, 사진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하) p.230.
지장암,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해안스님 가르침 담은 '심인탑'앞, 사진출처: 불교신문
일지스님, 사진 출처: 법보신문
지장암 석등, 사진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하) p.225.

여여(如如) 일지(逸智)스님은 1944년 8월 1일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서포리에서 아버지 김해안(金海眼)과 어머니 동래 정씨 정임념(鄭任念)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춘화이다.

출가동기

아들이 워낙 귀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일구월심으로 백일기도를 하여 낳은 자식이 바로 일지스님이었다. 하지만 딸을 낳았다는 실망도 잠시뿐 할머니와 어머니는 스님을 다른 형제보다 유독 아끼고 예뻐하셨다. 스님은 이미 출생과 함께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두 살 때 고모가 먹인 약간의 고기 국물로 스님의 입안이 썩어 들어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잠자리에 누우면 호랑이가 자꾸 일지스님을 데려가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산신기도를 해서 낳은 자식이라 부정을 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정성을 다하여 나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마침내 스님의 상처를 다 낫게 하셨다.

그런 일을 겪고 난 뒤 어머니는 딸이 장차 스님이 될 것이라 여기고 영단에 올린 음식이나 남의 집 음식 및 부정한 음식은 일지스님에게 먹이지 않고 키우셨다.

월불교 계통 원광여자상업고등 졸업

그 당시 스님의 아버지 해안스님는 이미 출가하여 수행하고 계셨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스님은 어려서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은 털끝만큼도 한 적이 없었다. 자선사업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며 살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 스님은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원불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스님은 원불교 대종사님의 수양딸로 들어가 많은 총애와 사랑을 받으며 이리 원광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원광대에 들어가 정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스님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미 『금강경』을 비롯하여 『관심론』과 『혈맥론』 등 아버지를 통하여 거룩한 부처님 말씀을 접한 뒤였기에 원불교의 교전에 발심을 못하였다.

출가와 행자시절

3년간 원불교 계열의 학교에 다니며 배운 빚은 있지만 스님이 되어 중노릇 잘하는 것으로 갚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학교를 졸업한 후 1964년 충남 보덕사 지해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하였다.

스님이 출가하기 전 어머니는 보덕사에 잠시 머물며 딸의 출가에 대한 원을 세웠고 몇 년 동안 날마다 보덕사 쪽을 바라보면서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독송하셨다.

스님은 보덕사에서 생활하면서 현재 강화도에 계신 무정스님을 따라 상가리로 탁발을 다녔는데 힘든 탁발 생활이 그저 재미있고 신이 나서 좀 더 일찍 스님이 되지 않은 걸 후회하였다.

개심사 강원 시절에는 땔감이 부족했던 시기라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해가지 못하도록 산을 지키곤 하였다. 매일 몇 사람씩 조를 짜서 불침번을 서며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고, 구석구석에 밭이 많아 하루 종일 일해도 못 다하여 밤이 되면 남폿불을 켜고 밭을 매기도 했다. 또 그 당시는 국민 학교에서 소풍을 오면 절에서 밥을 다 해주었는데, 커다란 가마솥에 쌀 8가마 분량을 무려 10번 씩 밥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 대신 학생들은 소풍을 올 때 쌀을 한 되씩 가져왔다. 밥을 해주고 남은 쌀은 나중에 절의 양식으로 활용하였다. 이렇듯 가난하고 일이 많은 개심사였지만, 모든 게 재미있고 신이 나던 시절이었다.


수학과 비구니계 수계

출가한 지 3년 후인 1969년 26세 때 일지스님은 개심사 강원에서 선지(禪志)가 밝으셨던 성능스님께 『능엄경』을 배우게 되었다. 성능스님은 공부 중에 참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권고하여 해안(海眼) 큰스님과 지장암에서 참선하면서 『원각경』을 보았다. 그 뒤 스님은 동학사 강원에서 대교를 졸업하였고,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큰스님께서는 단기 정진을 항상 말씀하셨다. 아무리 정진력이 강하다 해도 3개월 동안 계속 긴장하며 화두를 놓치지 않기란 힘들다면서 경(經)과 선(禪), 주력 등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치게 지도하지 않고 골고루 겸하여 정진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러면 아무리 미련한 사람도 일주일이면 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큰스님은 사계절 지방을 순회하며 단기 정진을 실행하셨다.

6·25전쟁 당시 월명선원은 낮에는 군인이나 경찰이 오고, 밤이 되면 공산당원이 몰려오는 바람에 혼란스러웠다. 큰스님은 월명암에 계시다가 지장암으로 내려오셨다.


구도 정진

당시 지장암에는 구도 정진에 열정을 가진 눈 푸른 납자가 많았다. 그래서 겨우 밥알 몇 개 띄워진 우거지죽을 먹으며 오두막집에서 사부대중 모두가 함께 공부를 하였다.

큰스님과 함께 한 단기 정진은 처음 3일간은 업장 기도를 하고, 예불을 모실 때는 항상 『금강경』을 독송하며, 관음예찬으로 공양을 올리고, 저녁에는 『원각경』 보안장을 읽는 등 3시간 남짓 자면서 정진하는 것이었다.

또한 큰스님은 날마다 개별적으로 문답을 함으로써 공부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셨다. 그리고 엄격한 문답 후에 밥을 제대로 먹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모두가 울면서 큰스님의 경책을 계기 삼아 더욱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때는 지장암에 방부를 들이려면 스님이든 속인이든 『금강경』을 외워야만 했다. 이후 3년간 일지스님이 뒤를 이어 지장암에서 사부대중과 함께 정진하였고, 큰스님께서 서울에 불교 전등회를 설립한 뒤 정진하려는 불자 모임을 구성하심에 따라 4년간 전등회 지부를 운영하였다.


지장암 불사

일지스님은 전등회 지부를 정리해 놓고 지장암 불사를 시작하였다. 먼저 터만 닦아 놓은 후 동학사에 가서 5년 6개월 간 소임을 살고 1987년에 대웅전, 나한전, 요사채, 정랑 등 중창 불사를 다시 시작하셨다. 스님이 불사를 하겠다는 원력을 세워 놓은 후에는 막힘이 없는 원만한 불사를 이룰 수 있었다. 그 뒤 스님은 내원사에서 두 철을 정진한 후 7년 동안 재무 소임을 살기도 하였다.


편지 쓰는 것이 취미

큰스님께서는 편지 쓰는 것이 취미셨다. 누구한테서나 편지가 오면 반드시 답장을 해주셨다. 답장을 안 하는 것은 인사를 받고도 답례를 안 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기에 아침이 되면 전날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을 손수 써서 보내곤 하셨다.

큰스님과 마찬가지로 스님은 요즈음 편지 쓰는 것이 취미이다. 큰스님을 기리는 스님의 마음은 지극하고 늘 한결같다. 지금도 큰스님의 기일인 3월 1일부터 7일까지 40~50명 정도가 용맹정진을 하고 제사를 지낸다.


본성을 잃지 않고 깨어 있는 삶

스님은 언제 어느 때나 자기 본성을 잃지 않고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스스로가 원력을 가지고 한 가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 한 가지는 이루어지기 마련이므로, 인과를 믿고 매사에 절약하고 복을 지으며 살면서 원력을 성취하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일지스님은 2022년 현재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서포리 지장암 주지로 정진 중이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진공(眞空)·정헌(正憲)·성훈·선문(善門)·수형(修亭)·현공(玄空)·진정(眞正)스님 등이 있다.


지장암

내소사 입구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 중간쯤에서 오른편 길로 접어들면 자그마한 암자를 볼 수 있다. 이 암자가 바로 지장암이다. 옛날의 은적암(隱寂庵) 터에 세운 내소사의 부속암자이다.

이 암자의 역사는 매우 길어서 내소사와 같은 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동안 여러 차례의 중창이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1940년대에 해안대사(海眼大師)에 의해 세워졌고, 1996년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 063-584-9387 |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0-1




참고자료

[출처] 지장암(地藏庵)_내소사(來蘇寺) 산내암자|작성자 엽토5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일지(逸智)스님 본항목 일지스님(逸智, 1944~) 逸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일지스님(逸智,_194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일지(逸智)스님 전북부안 ~에서 태어나다
일지(逸智)스님 지해(智海)스님 ~을 은사로 출가하다
일지(逸智)스님 석암(昔岩)스님 ~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다
일지(逸智)스님 개심사 ~에서 능엄경을 수학하다
일지(逸智)스님 동학사 ~에서 강원을 졸업하다
일지(逸智)스님 석암(昔岩)스님 ~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다
일지(逸智)스님 전등선림 ~에서 주지를 역임하다
일지(逸智)스님 동학사 ~에서 학감을 역임하다
일지(逸智)스님 지장암 ~에서 주지를 역임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