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운스님(法雲, 192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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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0일 (일) 16:07 판
법운(法雲)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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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px | |
법명 | |
법호 | 금정(錦亭) |
속명 | 김인숙 |
출생 | 1937.1.9. |
출가 | |
입적 | |
사찰 | 청룡사 (경기도 광명시 광명3동 32-11) |
특이사항 |
정의
금정(錦亭) 법운(法雲)스님은 경기도 광명시에 청룡사를 창건하시고, 음성포교 및 교정교화 포교 등 포교활동에 전념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37 | 평북 희천 출생 |
1966 | 원효사에서 벽산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70 | 송담(松潭)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7 | 구산(九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경기도 청룡사 창건 |
1982 | 대원불교대학 졸업 |
1990 | 대한불교 교정교화협의회 이사 |
1991 |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 위원 |
1993 | 미얀마 정부 종교성 철학박사 취득 |
1995 | 대만 임제종 제44대 전법받음 |
1996 | 재단법인 선학원 감사 |
1997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수료 |
2002 | 청룡사 주지 스리랑카 스리자예와르데나푸나 종합대학교 총장 혜치아라치 박사로부터 철학박사 학위수여 |
2004 | 현재 청룡사 주지 |
활동및 공헌
출가
금정(錦亭) 법운(法雲)스님은 1937년 1월 9일 평북 희천군 남면에서 아버지 김춘섭과 어머니 이성길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인숙이다.
스님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할머니와 외롭게 살다가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사후퇴 때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때문에 스님은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난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체험했고 인생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다.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악조건 속에서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돕기 위해서였다.
청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25세에 스님에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심각한 의문과 갈등이 질풍노도처럼 밀려들면서 종교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스님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기독교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기독교가 반드시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다닌 어설픈 신자였기에 진지하게 종교 문제를 되짚어보았던 것이다. 스님은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대자연의 순리를 역행하며 사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고, 일체 만물의 존재성과 여여한 진리의 모습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곧 불교 사상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의 집안이 원래 불교 집안이었기에 그동안 알게 모르게 귀동냥으로 들었던 것도 있었던 터라 부쩍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만 갔다.
그러다가 관음사 스님과 잦은 대화 시간을 갖게 되었고, 스님한테서 발원문을 항상 지송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또 상원사 비구스님을 만나 뵙게 되었을 때는 출가 권유를 받기도 하였다. 스님은 ‘출가’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하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님에게는 어렸을 때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된 영험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8살 되던 어느 날 할머니 댁에 다니러 갔는데, 그때 스님은 학질(말라리아)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할머니는 학질에 효험이 있다는 약을 주면서 비록 쓰더라도 참고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러나 약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어린 스님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할머니 몰래 변소에 약을 버리고는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님은 갑자기 심한 오열과 어지럼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때 비몽사몽간에 ‘저쪽에서 흰 옷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더니 주문(스님은 나중에 그것이 경의 한 구절이었음을 알았다고 한다)을 거듭 되풀이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스님은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아프던 증상이 거짓말처럼 싹 가셔버린 것이다. 스님은 그때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첫 영험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은연중에 잠재해 있던 이 첫 영험이 불연을 맺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스님은 출가를 결심하고 며칠 동안 마땅한 귀의처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신도가 스님의 뜻을 알고는 도인이신 벽산스님을 찾아가 뵈라며 소개해주었다. 이렇게 불연을 따라 저벅저벅 걸어 찾아간 곳이 벽산스님의 수행처인 도봉산 원효사였다. 동굴 같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신 큰스님의 자태에서 ‘아, 바로 이분이다!’ 하는 확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기척을 느낀 벽산스님은 잠시 후 선정에 드셨던 수행을 마무리하고는 방문객을 맞이하셨다.
“어쩐 일인고?”
“출가하러 왔습니다.”
“그래? 왜 출가하려 하는고?"
“그 길이 저의 갈 길입니다.”
칼로 베듯이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박에 대답해버리는 스님이 몹시 미더웠지만 벽산 큰스님은 재고할 기회를 주셨다.
“정 그렇다면 8월 추석이 네 삭발 일이다. 그때 다시 오너라.”
“아닙니다. 스님, 오늘이 바로 9월 9일 중양절 제 삭발일입니다.”
“알겠다.”
벽산 큰스님은 스님의 굳은 발심 출가의 결심을 확인하고는 삭발을 허락하셨다.
1966년 스님은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북한산 원효사 마벽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1970년 송담선사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받았고, 1977년에는 송광사에서 구산 대선사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동국대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수료하였다.
청룡사 창건 및 마야 합창단 창설
스님은 마벽산 스님을 만나 생사 문제는 불법을 닦아 실천함으로써 해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생이 다하도록 보살행으로 이웃을 돕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할 수만 있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합창단과 같이 환한 웃음과 노래를 선사했다.
1977년 법운스님은 언제나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도심 속의 사찰 청룡사를 경기도 광명시에 건립하면서 마야 합창단을 창단하였다. 법회 의식을 찬불가로 진행하고, 합창단을 모집하여 찬불가로 도심 포교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스님은 마야 합창단과 함께 1981년 인천 소년교도소 선도 법회를 시작으로 광명 시민을 위한 청룡음악제 개최, 국군 장병 및 경로당 위문 등 꾸준한 활동을 벌여왔다. 더 나아가 미주 지역, 대만, 일본 등 해외로까지 발을 넓힌 합창단 포교 활동은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특히 1989년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한 제6회 청룡음악제에는 성악의 대가 오현명 씨와 김학남 씨가 특별 출연함으로써 사찰 합창제의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1996년 청룡마야합창단 창단 20주년 기념 공연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불밭에 핀 꽃’이란 타이틀로 지장보살찬을 노래한 것은 불교계의 큰 행사였으며 거룩한 음악제였다.
교정교화, 노인 포교 1982년 대원불교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1990년 대한불교 교정교화협의회 이사를, 1991년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93년에는 미얀마 정부 종교성으로부터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1995년 대만 임제종 제44대 전법을 수료하였으며, 1996년 재단법인 선학원 감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청룡사 염불회를 창립하여 타종교에 비해 소극적이라고 지적받고 있는 신도들의 길흉사, 병문안 등에 성심성의껏 참여함으로써 불자들의 신행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
법운스님이 초발심부터 지금까지 펴온 활동 중에서 특히 정성을 다한 것은 효행 사상의 실천으로 어르신들을 잘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매년 경로잔치를 주관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사단 법인 대한노인회 광명지회에서는 스님에게 ‘송덕비문’을 세워주기도 했다.
또한 스님이 역점을 두는 것은 교도소의 교화 활동이다. 그들에게 인과 법문을 통해 탐진치(貪眞癡) 삼독을 끊어버리고 부처님 제자가 될 것을 교화하고 있다.
방생법회 법운 스님은 40년 간 월 1회 방생을 한 번도 쉬지 않고 해왔다. 성지순례 나가서 사찰순례하면서도 계곡에서 행하고, 주기적으로 미사리 방생터에서 40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빼먹지 않고 해왔다. 방생은 불살생의 소극성을 넘어 생명을 적극적으로 살도록 해주는 일이다. 스님은 방생을 확대해 주위의 어려운 이웃과 고통을 나누며, 그들을 위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행하고 있어 수행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방생을 하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유도 있다.
그동안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쳐온 공덕으로 법운스님은 광명시장 표창(1982년, 1985년)을 비롯하여 법무부장관 표창(1986년), 경기도지사 공로패(1987년), 제1회 광명시 시민 대상(1989년), 새 질서 새 생활 부문 대통령 표창(1991년) 등 많은 상장과 표창장을 수상하였다. 광명 경실련 공동대표를 역임하기도 한 법운스님은 현재 청룡사 주지로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밖으로는 전법(傳法)으로 일신(一身)을 다하며 내면으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스스로의 수행을 놓지 않고 있다.
고월중천 자조만 (孤月中天 自照萬) 만물수분 득이익 (萬物隨分 得利益) 여수분별 돈무의 (與受分別 頓無意) 개사월경 무시비 (皆捨月境 無是非) 동방삼삼오불 (東方三三五佛) 북방대법좌 (北方大法坐)
[출처] 광명시민신문(http://www.kmtimes.net)
문중 | 백양사 |
수계제자 | 정원(定圓)·정혜(定慧)·정도(定道)·대월(大越) |
생활신조 | |
상훈 | 법무부장관 표창,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외 다수 |
참고문헌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24~330.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78. 광명시민신문 2004.8.30.일자 (인터넷,http://www.kmtimes.net/news/articleView.html?idxno=3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