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혜은스님(慧隱, 193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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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사리암)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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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93~599.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93~599.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59.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59.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58, 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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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58, 363, 364 .
 
* 동하스님, 『기도영험록』, 미래문화사, 2002
 
* 동하스님, 『기도영험록』, 미래문화사, 2002
 
* 김영옥, 『자귀나무에 분홍꽃 피면』, 오래된미래, 2007
 
* 김영옥, 『자귀나무에 분홍꽃 피면』, 오래된미래, 2007

2024년 9월 18일 (수) 06:15 기준 최신판



정의

혜은(慧隱)스님은 하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운문사 사리암을 중창하고 운문사 문수선원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7 충북 음성 출생
1958 마곡사 은적암에서 하연(河連)[1]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9 마곡사에서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2 서울 청룡사에서 명성스님으로부터 사교 수료
1965 내원사 동국제일선원 안거 성만
1965~1977 내원사 등 제방 선원에서 10 하안거 성만
1966~1967 내원사 재무
1968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7~1990 청도 운문사 사리암 원주
1985~1988 운문사 총무
1990~1996 달성 불은사 주지
1997~1998 운문사 부주지
1998~2000 운문사 주지
2003 운문사 문수선원 선원장
2015 2015.8.6. 운문사에서 입적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행지침 진실, 정직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보우(普雨)·경선(敬禪)·무공(無空)·설송(雪松)·현도(玄道)·평등(平等)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계흔(桂昕, 5)→창수(昌守, 6)→금하(錦河, 7)→하연(河蓮, 8)→혜은(慧隱, 9)→현소(賢昭, 10), 보우(普雨, 10), 경선(敬禪, 10), 무공(無空, 10), 여정(如靜, 10)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95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96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97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99

정장(淨藏) 혜은(慧隱)스님은 1937년 4월 15일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천이며, 이름은 송정희이다. 스님은 1958년 마곡사 은적암에서 하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마곡사에서 일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수학과 수행

1962년 서울 청룡사에서 명성스님으로부터 사교과를 수료하였으며, 1965년 양산 내원사 동국제일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한 이후 제방의 선방을 돌며 참학하던 중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내원사에서 재무를 보았다.

1968년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바쁜 수행 생활 속에서도 전국의 선방을 돌며 참학에 다시 임하였다.

운문사 사리암 원주[2] 소임을 맡다

1977년 가을 명성스님의 부름을 받고 운문사 사리암 원주 소임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스님은 잠시만 머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리암에 당도해보니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방사, 법당, 정랑 등 암자 전체가 난감한 실정에 놓여있었으며 게다가 식수난까지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산에 사는 거사님의 제안으로 법당 불사를 시작하였고, 이어 사무실 불사를 이루었다. 이외에 수각(물)과 전기, 요사채(사무실) 문제를 모두 해결하니 보살님들이 신심을 발하여 도와주어 한 채를 더 불사하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해마다 불사를 거듭하여 도량 가꾸는 일에 끊임없는 노력을 쏟아 부었다. 세수 33세로 동국대에 재학 중이던 명성스님이 청룡사에서 강의를 하실 때 당시 27세인 혜은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운문사와 사리암의 운영 방식

명성스님은 시간을 금쪽같이 여기는 분으로 하루 일과를 시간표에 맞추어놓고, 일과 시간에 손님이 오면 맞이하며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도 시간을 아끼어 붓글씨를 쓰시고, 붓글씨 쓸 시간에 사중 일이 있어 시끄럽기라도 하면 조용한 곳에 가서 붓글씨를 쓰고 올만큼 일과를 철저히 지키셨다.

혜은스님은 명성스님이 평생을 변함없이 일관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불법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분은 38년째 소중한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명성스님은 1977년 당시 최초로 운문사 학장을 맡으면서 주지 소임을 겸하였다. 외부에서는 학장과 주지의 겸직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강사스님이 소신대로 학장과 주지의 겸직을 추진하여서 모든 면이 일원화 되는 장점이 있었다.

현재는 타 강원에서도 이 제도를 본받아 운영하고 있으며, 소실된 운문사 가람 복원(대웅전)과 더불어 사리암의 모든 것이 운문사에 통합되어 한 살림이 되었다.

운문사와 사리암이 통합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사리암은 원래 별도로 운영되었으나 묘전스님이 들어오셔서 정화를 이룩한 후에 선배 스님들의 노력을 잘 이어받아 큰 절에서 관리하는 체제를 도입하였다. 그 후 후학들의 생활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었다면서 선배 스님들과 명성 학장스님의 공적은 한도 끝도 없음을 강조하였다.

1979년 당시 운문사의 학인은 130명가량이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해 학인 수가 갑절이나 되는 방대한 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학인들이 상주하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생활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은 사리암의 기도 수입이 운문사의 경상비로 지출되기 때문이고, 학인들의 봉사에 의해 투명하고 청정한 자산 관리로 운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직스님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재정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으며, 임의로는 한 푼도 쓸 수 없게 끔 철저한 재정 관리 제도를 만들어놓은 것도 운영을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운문사 학장스님께서 강을 하신 지는 32년, 주지 소임을 본 것은 20년이 되셨는데 절집 살림을 살면서 학인 체제의 살림 기반을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주력을 다하였다.

매일 아침 주지스님을 비롯하여 삼직, 강사스님들, 중강스님들, 원주, 별좌, 도감, 회계, 서기, 입승, 찰중스님 등 소임자들이 모여 그날의 상황에 따라 토의와 건의를 하는 조회를 열고 다양한 건 의안들을 대폭 수용하고 있다.

또한 강원의 모든 운영은 학인들의 자율성과 민주성에 눈을 맞추고 의사를 존중하여 투명성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또한 모든 혜택이 오롯이 학인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강구 하고 있다. 비로전의 불전 수입과 1983년에 만들어놓은 의료비를 학인들의 몫으로 하는 제도를 만들어 학인 재무가 관리를 하며, 여행비나 그 밖에 학인들을 위한 경비로 지출되고 있다.

그 후 혜은스님은 1990년까지 13년 동안 사리암 가람을 일신하는 불사를 회향하고 1997년 다시 운문사로 돌아와서 소임을 맡았으며 2002년 퇴임하였다.

투병과 가피

스님은 1989년 사리암 원주로 있을 때 지병인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입원 중에 의사가 말하길 장이 파열될 염려가 있으니 미리 보호자의 도장을 받아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손상좌에게 전화를 걸어 장 내시경을 받기 전에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손상좌는 명을 받아 간절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흘러 내시경 검사가 끝날 때가 되었는데도 병원에서는 전화를 주지 않았다. 간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손상좌는 계속하여 간절히 대비주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사리암 산신이라면서 공청이 들렸다. “나를 구석에 처박아놓고 저희들 집만 자꾸 지으니까 원주가 안 아프냐!” 나중에 손상좌의 말을 듣고 주변에서 말하길 사리암에 계신 존자님을 위해서만 공양을 올릴 뿐 산신님을 위해서는 아무도 공양을 올리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스님은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시주를 받아 산신각 불사를 하였다. 후에 터를 보아주신 수월스님 말씀이 산의 주인인 산신님을 지극히 모셨기 때문에 신도도 대중도 더 많이 모여드는 것 같다고 하셨다. 실제로 법당을 지을 때보다도 오히려 산신각을 지을 때 더 많은 시주자들이 몰려 불사금을 거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스님의 수술이 무사히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피 덕택이었다. 당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준비를 하면서도 정작 스님 본인은 희망을 갖지 않았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아버지와 오빠가 대장수술을 하고 난 뒤에 모두 돌아가셔서 스님 역시 유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스님은 수술을 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권속들의 설득으로 하는 수 없이 금생에 마지막으로 참회나 하고 가자는 생각으로 기도와 참회를 하며 수술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대 병원의 법사를 맡아 보던 운문사 강원 졸업생인 은진스님이 병실에 찾아와서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꿈 내용인 즉, 운문사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오백나한님, 사리암 나반존자님 그리고 운문사 대중스님들이 모두 법복을 입고 병원 2층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깼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권속들은 '스님들과 부처님께서 혜은스님이 입원해 있는 병실까지 오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왜 2층까지만 오셨을까.' 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수술하는 날 알고 보니 병원 2층이 모든 환자들의 수술실이었다. 이에 부처님과 대중스님들께서 수술을 보살펴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바탕으로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때 운문사 대중 스님들은 수술이 무사히 끝나도록 기도하고 있었다니 혜은스님은 과연 기도의 힘과 부처님의 가피가 스님을 살려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듯 불보살님과 대중스님들의 기도 덕분에 스님은 수혈도 받지 않고 무사히 수술을 끝냈으며, 더 신기한 것은 수술한 환부가 아물 때까지 일주일간 진통제를 맞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통증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일은 스님이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잊을 수 없는 일로 부처님 가피력의 위대함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종양 조직검사 결과 세포가 감염이 되어 있었고, 의사는 1년간 항암제를 투여 받을 것을 권했다. 그 후 2개월간의 고통스러운 치료를 하고 본인의 의사에 의해 투약을 중단하고 절에 돌아와 7~8년간 아무 탈 없이 지냈다. 그러나 1997년 병이 재발하여 다시 서울대학병원 송인성 박사를 찾아가 검사를 하였는데, 수술을 받지 않으면 일 년밖에 못 산다는 통고를 받았다. 이에 스님은 수술을 거부하고 일 년 동안 정진과 참회를 하면서 마지막 생을 마감할 각오를 하였다. 그러나 권속들이 모두 일심으로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마음을 돌려 기력을 회복할 결심을 하였다. 그때 손상좌인 유승스님이 사리암에서 7일 기도를 회향하고 와서 “노스님, 70세까지 8년간 수명 연장하는 기도를 성취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혜은스님은 '권속들의 정성과 부처님 가피력으로 생명을 연장했으니 남은 여생을 정진 잘해서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스님은 사리암 불사를 다 마치고 떠났다가 운문사에 다시 들어와 주지를 살면서 사리암의 나반존자님을 바라보며 여쭈어 올렸다. '나반존자님의 위력이 이렇게 크신지 몰랐습니다.‘

옛날에는 불사를 하느라 힘들고 어렵게만 살았는데, 그 결과 지금은 모든 게 안정되어 있고 사리암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운문사의 경상비를 모두 충당하여 대중들이 편안히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님은 더 없는 보람을 느낀다.

스님은 불사를 했다는 자랑을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인연이 있어 불사를 하고 나니 다시 운문사 주지로 보내주어 장애 없이 살 수 있었으며 나반존자님 덕으로 건강을 되찾아 어려움 없이 살고 있으니 그저 인연법에 감사할 뿐이라고 한다.

젊어서 수행에 부족했던 부분이 후회스럽다는 스님은 ’젊은 스님들은 하고자 하는 일에 충실하고 부처님 법에 바탕을 두고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무엇을 하든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그런 삶을 살아야만 훗날 돌아봐도 후회가 없으니 자신부터 바로 세운 다음에 모든 일을 행할 것을 거듭 당부한다.

스님은 2015년 8월6일 운문사에서 입적하였다

수계제자로는 보우(普雨)·경선(敬禪)·무공(無空)·설송(雪松)·현도(玄道)·평등(平等)스님 등이 있다.

운문사 문수선원

[문수선원] 사진 출처: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003

80여평 되는 ‘ㄷ’ 자형의 모습인 운문사 문수선원(文殊禪院)은 지난 2003년 하안거 때 개원됐다. 문수선원은 ‘선교일치(禪敎一致)’ 를 주장하는 명성(眀星)학장스님의 원력(願力)으로 세워진 것이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校是佛語)요 율시불행(律是佛行)이라.”

또한 얼마 전 보현율원(普賢律院)도 시설되었으니 이제는 명실공히 선(禪)과 교(敎)와 율(律)이 행(行)하는 총림의 체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학장스님은 수년간의 정성을 선원 개원에 쏟았고, 문수선원이란 이름도 직접 지으셨고 현판도 직접 쓰신 글씨이다.

운문사 사리암

[사리암] 사진출처 : 경남신문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331249

사리암(邪離庵)은 고려 초의 고승 보량이 930년(태조 13)에 창건하였다. 조선 후기인 1845년(헌종 11)에 정암당 효원이 중창하였다.
1851년(철종 2) 10월 13일 증명법사 동호, 지윤과 승려 만점, 선화 등이 나반존자상을 봉안하였으며, 같은 해 독성 탱화를 제작해 안치하였다. 그 후 영험이 있는 나반존자의 기도도량으로 부상하였다. 승려 신파가 천태각을 건립하였다.
1924년에 증축하고 1935년에 중수하였다. 1965년 경봉선사가 산신탱화를 봉안하였으며, 금호선사가 천태각 밑에 중수비를 건립하였다.
1980년에는 비구니 혜은이 3층의 요사를 신축하였으며, 1983년 관음전, 자인실, 정랑 등을 개축하였다. 천태전 밑에 있는 사리굴은 운문산 4굴의 하나이다. 현재 운문사의 말사로 불교의 나반신앙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는 사찰이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혜은(慧隱)스님 본항목 혜은스님(慧隱, 1937~2015) 慧隱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은스님(慧隱,_193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혜은스님(慧隱)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혜은스님(慧隱) 하연스님(河連) ~의 수계제자이다
혜은스님(慧隱) 마곡사 은적암 ~에서 출가하다
혜은스님(慧隱) 일현스님(一玄)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혜은스님(慧隱)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혜은스님(慧隱) 대구 불은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혜은스님(慧隱) 청도 운문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혜은스님(慧隱) 운문사 사리암 ~을(를) 중창하다
혜은스님(慧隱) 안거 ~을(를) 성만하다 양산 내원사 동국제일선원 등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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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한국비구니명감』에는 하연(河連)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하연(河蓮)으로 되어 있다.(출처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364.)
  2.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