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완스님(明完, 193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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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37~540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37~540 |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119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119. |
− | * 불교신문, 명완스님 안구 기증-이범신씨에 새생명줘(1998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130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31. |
− | + | * 불교신문, 명완스님 안구 기증-이범신씨에 새생명줘(1998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130 | |
==시맨틱 데이터== | ==시맨틱 데이터== |
2024년 9월 17일 (화) 18:42 기준 최신판
명완(明完)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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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명완(明完) |
법호 | 혜완(慧完) |
속명 | 김재윤(金在允) |
출생 | 1937.09.08. |
출가 | 1943년 |
입적 | 1998.08.04. (세수 62세, 법랍 56세) (안구:경상대, 시신 동국대(경주) 기증) |
사찰 | 보문선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동 29-87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명완(明完)스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량을 건립했으며, 입적 후 장기 및 법구를 기증하는 등 진정한 자비행을 실천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37 | 충북 옥천 출생 |
1943 | 동학사에서 재문스님(在文)을 은사로 출가 |
1956 | 청암사 백련암에서 치문 수학 |
대구 동화사, 공주 동학사 외 9개 사찰에서 경전(經典) 수학 | |
1971~1974 | 청도 운문사 강원 졸업, |
양산 내원사 노전암에서 3년간 수행 | |
1979 | 진해 경화동 암자에서 수행 |
1980 | 진해시 제황동 보문선원 주지 |
1995~1998 | 보문선원 가람 불사 |
1998. 8. 4. | 보문선원에서 입적(세수 62세, 법랍 56세), 경상대 의과대학에 안구 2구 기증 |
2000 | 경주 동국대학교병원 해부학교실에서 영결식 |
문중 | 청해문중(靑海) |
수행지침 | 한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셈 치고 청정하게 산다.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법수(法壽)·법성(法性)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계밀(戒密, 2)→성문(性文, 3)→법신(法信, 4)→재문(在文, 5)→명완(明完, 6)→법수(法壽, 7), 법성(法性, 7) |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완(慧完) 명완(明完)스님은 1937년 9월 8일 충북 옥천군 군북면 언향리에서 아버지 김학진과 어머니 곽창근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재윤이다.
1943년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스님은 설상가상으로 명이 짧아 열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아버지는 궁여지책으로 탁발하러 오신 그 비구니스님에게 어린 딸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1943년에 불문에 든 스님은 10세 때부터 은사스님과 함께 진해 안양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수학과 수행
안양사가 천리교로 넘어가게 되자 거처를 옮겨 1956년에 청암사 백련암에서 고산스님께 치문을 잠깐 배웠다. 그리고 동학사 강원, 동화사 강원 등 9개 사찰을 두루 다니면서 일대시교를 공부했다.
금천선원에 계시던 은사 재문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난 후, 35세이던 1971년 운문사 강원에 입학하여 1974년에 몸이 좋지 않아 내원사 노전암에서 3년을 머물렀다.
보문선원 불사
명완스님은 그 뒤 진해 경화동에 있는 암자에서 사셨는데 1979년에 암자가 수해로 완전히 떠내려 가는 극한 상황을 겪었다. 그때 스님의 상심이 얼마나 컸던지 한 달 정도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하고도 마땅한 거처가 없어 1년 정도 셋방에서 살았다. 천 평이나 되던 넓은 암자의 땅은 산 자체가 떠내려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태화기업의 농간으로 천 평의 땅 가운데 절반인 500평의 땅만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모진 시련이었지만 스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1년 동안 셋방을 얻어 살면서 모은 돈으로 불사를 시작하였고, 각고의 노력 끝에 스님이 44세 되던 해인 1980년, 현재의 보문선원 주위에 있던 집 3채를 구입하였다. 그 후 1995년 3월 10일 불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10일에 법당 30평, 방 4평, 요사 58평, 해우소 7평을 완공했다.
입적
생전에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유치원 등 사회사업을 하고 싶어 했던 명완스님은 1998년 8월 4일 저녁 7시 50분 보문선원에서 스님의 세수 62세, 법랍 56세로 고요히 입적했다.
장기 및 법구 기증
입적하기 전 스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와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며 경상대학교 의과대학에 안구와 시신을 기증하기로 약속했었다.
스님의 뜻에 따라 경상대학교 의료진이 보문선원에 도착하여 스님의 안구 2구를 추출해 갔, 다음날 경주 동국대학교 병원으로 시신을 기증을 한 후 2000년 6월 29일 경주 동국대학교 병원 해부학교실에서 영결식을 하고 다비를 하였다. 영결식과 다비식에는 동국대학교 학생 70명과 학장, 주임, 교수들이 참석했고 스님의 유해는 다비 후 감포 앞바다에 뿌려졌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법수(法壽)스님과 법성(法性)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37~540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119.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31.
- 불교신문, 명완스님 안구 기증-이범신씨에 새생명줘(1998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13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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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완(明完)스님 | 본항목 | 명완스님(明完, 1937~1998) | 明完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명완스님(明完,_1937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명완스님(明完) | 청해문중(靑海) | ~의 일원이다 | |
명완스님(明完) | 재문스님(在文) | ~의 수계제자이다 | |
명완스님(明完) | 공주 동학사 | ~에서 출가하다 | |
명완스님(明完) | 진해 보문선원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명완스님(明完) | 진해 보문선원 | ~을(를) 창건하다 | |
명완스님(明完)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양산 내원사 노전암 |
지도
- 보문선원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동 2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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