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창호스님(彰浩, 188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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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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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화두는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러서 남에게 가르쳐 주어서도 안 되며, 화두가 끊어지먄 마치 육체의 호흡이 끊어진 송장이나 같다.
 
|수행지침|| 화두는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러서 남에게 가르쳐 주어서도 안 되며, 화두가 끊어지먄 마치 육체의 호흡이 끊어진 송장이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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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혜춘·보명<ref>하춘생 저, 『한국의 비구니문중』 123쪽에는 창호스님의 수계제자로 상덕(尙德)・혜춘(慧春)・보명(菩溟)으로 되어 있고, 334쪽에는 혜춘(慧春)・상덕(尙德)으로 되어 있으며 보명스님(菩溟)은 창호스님(彰浩)의 사형제로 되어 있다. 『한국비구니수행담록』(상권 317쪽)과 『한국비구니명감』(232쪽)에는 상덕스님(尙德)이 창호스님(彰浩)의 은사인 재희스님(在喜)의 수계제자로 되어 있으므로 창호스님(彰浩)과 상덕스님(尙德)은 사형제로 되어 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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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7일 (화) 15:02 기준 최신판



정의

창호(彰浩)스님은 철저한 선수행(禪修行)을 하신 대한민국의 대표적 비구니 선객(禪客)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89 경남 합천군 치로면 금평리 출생
1896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
1907 사미니계 수지
김룡사, 윤필암 등 여러 비구니 선원에서 정진
1976 1976년 정월[1] 해인사 보현암에서 입적(세수 88세, 법납 81세)
문중 청해문중(靑海)
수행지침 화두는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러서 남에게 가르쳐 주어서도 안 되며, 화두가 끊어지먄 마치 육체의 호흡이 끊어진 송장이나 같다.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춘(慧春)·보명[2]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광우(光宇, 3)→회진(會眞, 4)→정은(正恩, 5)→재희(在喜, 6)→창호(彰浩, 7)혜춘(慧春, 8), 상덕(尙德, 8)[3]

활동 및 공헌

출가

창호(彰浩)스님은 1889년 7월10일 경남 합천군 치로면 금평리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박금평이다. 비구니회 회장을 역임했던 혜춘(慧春)스님의 은사스님였던 창호스님은 평생 선수행(禪修行)만을 하시다가 가신 당대의 진정한 선객(禪客)이었다.

당시 스님을 시봉한 손주 상좌인 보현암의 서용스님과 정안스님은 창호스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다. 청암사가 아직 강원을 열기 전, 창호스님은 청암사 극락전에서 정진 중이었는데, 서용스님은 늘 “저 노장님은 공부 밖에 모르는 스님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서용스님의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창호스님은 항시 흐트러짐이 없는 준엄한 정진의 자세를 고수하고 진리탐구에 매진하였으며, 공부하지 않는 시간에는 늘 손수 풀을 매는 등 매사에 신심을 다하였다.

상좌 혜춘스님이 보현암을 짓기 전에는 청암사에서 수행 정진에 힘쓰셨으며, 보현암을 지어놓고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어 쓰러졌다. 병으로 쓰러진 창호스님을 모시고 들어와서 3년 정도 시봉하였으나 입적하였다.

일상이 수행, 평상심이 도

[창호스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77

창호스님은 시봉하는 스님들이 미처 챙길 사이도 없이 자신의 일을 하는 수행자였다. 손상좌 정안스님이 세수 70세가 넘은 노스님을 시봉하기 위해 청암사 극락전으로 찾아뵈면 사사로이 양말 한 짝 내어 놓는 일이 없었고, 항상 즐겨 입으시던 삼베옷도 직접 손질하는 등 일상 생활을 수행으로 여기며 묵묵히 정진하였다.

새벽에는 방선 후 항상 도량청소를 하시고, 화단에 꽃이 떨어져 있으면 가져와서 화병에 꽂아 놓는 등 일생을 진실된 마음과 간절한 정진, 단정한 살림살이로 일관하였다. 새벽예불 후 입・방선에 한 치의 어김이 없이 철저했으며 반드시 발우공양을 하며 일상에 임했다.

일분, 일초도 나태하지 않았던 노스님은 절대 낮잠을 자지 않는 분으로 유명했다. 방학을 맞아 수행 차 사찰을 찾은 젊은 사람들과 같이 생활할 때에 그들이 일하다가 힘들어서 잠깐 눕기라도 하면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야단을 쳐서 호랑이 노장님이란 소문이 자자했다.

스님을 떠올리면 좌선하시는 모습 이외에 다른 모습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인데, 정진의 원력을 세운 이후로는 곁눈질 한번 주지 않는 청빈하고 꼿꼿한 수행자의 삶을 오롯이 불태운 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지 소임을 단 한 번도 살지 않은 선객 중의 선객

스님은 평생 동안 주지 소임을 단 한 번도 살지 않고 김룡사, 윤필암 등 제방(諸方) 비구니 선방을 돌며 피나는 정진을 거듭하고, 수행자로서 본분을 상실한 출가자를 보면 엄격하게 꾸짖어 출가자로서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화두(話頭)는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어서 남에게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되며, 화두가 끊어지면 마치 육체의 호흡이 끊어진 송장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강조하던 창호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11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공양시간을 빼고는 그저 가부좌를 틀고 공부하거나 도량에 나가 풀을 뽑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입적

“선객은 좌선만 할 뿐 말이 필요 없다" 는 것이 스님의 평생 지론이었다. 항상 화두를 챙기고 몸소 실천한 창호스님은 1976년 정월 보현암에서 세수88세, 법랍 81세로 조용히 입적하였다.

수계 제자로 혜춘(慧春)스님과 보명스님이 있다.

해인사 보현암

보현암 홈페이지 : http://haeinsa.or.kr/bbs/board.php?bo_table=1050&wr_id=24&page=10

천제굴 소나무 아래, 거적을 깔고 바위처럼 가부좌를 틀었다. 허락 대신 날아온 물벼락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차디찬 보리밥 한 덩어리로 끼니를 때우며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10만 배를 하고 오라는 전갈이 왔다. 스승이 내리치는 주장자에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바랑까지 불태워지는 혹독한 수행에도 자신에게 매질을 아끼지 않았던 비구니 혜춘 스님의 설화 같은 수행기이다. 성철 스님의 수행 지도를 받기 위해 목숨을 건, 구법의지는 달마 대사에게 법을 구한 혜가 선사를 떠올리게 한다.

해인사의 산내 암자인 보현암선원은 문수보살의 정중수행과 보현보살의 대중교화, 좌청룡 우백호의 전망, 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오가리로 불리는 절승지에 위치하고 있다.

보현암은 비구니회 초대회장을 지내고, 비구니회관을 건립한 혜춘 스님의 원력으로 세워진(1972년) 비구니 선수행 도량이다. 평생을 무욕의 수행자로 살아 온 스님은 비구니 납자들의 마음밭을 가꿀 터전을 마련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원력으로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대승보살이었다

죽비의 여음이 침묵 속으로 매몰되자 푸른 설법이 구슬처럼 청아한 선방에는 선덕 서용스님을 비롯하여 22명의 선객들이 불성의 자리로 옮겨가기 위해 수행의 고삐를 다잡고 있다. 새벽 3시에 시작하는 일과로 하루 11시간씩 화두와 씨름하며, 24시간 잠자지 않는 일주일간의 용맹정진도 마다하지 않는다. 오전 8시 잠시 가부좌를 풀고 법당 밖으로 나선 선객들은 연못을 돌기 시작한다. 굳어진 허리와 다리를 풀기 위한 또 다른 수행의 연속이자 소박한 휴식이기도 하다. 새벽예불의 능엄주 독송과 저녁 예불 대참회는 성철스님이 좌복에만 앉아 있는 선객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일러준 수행으로, 보현암 창건 이래 변함없이 지켜지 고있는 가풍이다. 아침에 하는 죽 발우공양과 제자들이 1년씩 돌아가며 도감 소임을 맡아 선원을 외호하는 것 역시 보현암만이 지닌 특징이다.

노송 위에 올라앉은 한 줌 햇살이 보석으로 영그는 산사의 아침, 탁 트인 시야로 들어오는 기암괴석과 청량한 한 줄기 솔바람이 오가리의 진면목을 느끼게 한다.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깔끔한 도량, 은은한 차향에 묻혀 보현암 스님들의 수행이야기에 귀를 세운다,

선덕 서용스님은 혜춘 스님의 맏상좌이다. 고암스님의 편지 한 장을 손에 쥐고 찾았던 18세 소녀에게 스승은 ‘더 나은 은사를 구하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걸망과 함께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스승을 기다린 세월이 3년, 마냥 먹물자락이 좋아 부모님을 졸라대며 기다려왔던 출가의 길이었기에 꿈결처럼 보낸 시간이었다. 18세 소녀가 평생을 흔들림 없이 달려온 외길, 칠순을 바라보는 스님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궁금해졌다. “오고감에 얽매이지 않고, 부처가 된다, 안된다는 망상도 놓아버리고 공부할 뿐이지요. 한 치의 주저함도 순간의 멈춤도 허락하지 않고 무조건 ‘이뭣고’만 잡고 나를 찾아간다”고 하는 스님의 흐트러짐 없는 단아한 얼굴에는 마애불의 입가에서 솟아나는 자애로운 미소로 가득하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선문답처럼 툭툭 던져지는 끝없는 자기 물음에서 답을 구하지 못해 서성이던 어느 날,‘일체유심조’ 다섯 글자가 젊은 영혼을 사로잡았다. 행자 교육에서 “성불하기 위해 출가 했습니다. 불성에는 남녀가 없지 않습니까?” 당돌한 대답으로 학장스님의 말문을 닫게 했던 선애스님은 스승이 입적하기 전까지 10년을 곁에서 모셨다. “은사스님 시봉에만 몰두하여 떠나신 후에야 선지식이었음을 자각했지요. 공부 한 줄 여쭤보지 못한 회한이 크지만 스승의 그림자를 따르는 곳마다 진리가 있었고, 머물 때마다 말씀을 들었으니, 늘 법향에 훈습된 날이었지요.”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하얀 그리움이 교차되어 가슴을 메우고 찻잔 가득 채워진 스승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세상을 덮고 있다.

“하루종일 앉아서 생각만 하면 되는데, 그것처럼 쉬운 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그 한 생각을 평생해도 쉽지 않으니, 하하하…….” 한 생각…….? 그 한마디에 자석처럼 이끌려 스스로를 좌복 위에 동여맨 입승 현응스님, 그러나 그것은 구속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자유로운 날갯짓이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자신감이 내포된 입승스님의 웃음은 한 생각에 자신을 가두고 온 힘을 쏟아내는 구도의 열정에서 우러난 것일까? 진리의 향이 피워내는 웃음꽃일까? 그 웃음 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 사진 공양 올 릴 수 있길 서원해 본다.

서로에게 다가온 불연의 사연은 다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를 찾아 떠나는 길 위에 모두가 함께 서있다. 절박한 자기 물음의 보따리를 껴안고 하루를 치열하게 사르는 열정과 수행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버릴수록 더욱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 구법의 길, 그 길 끝에서 만나게 될 선객들은 어떤 모습일까? 산사를 벗어나자 비웠던 마음에 또다시 채워진 마음을 들여다보는 나는 누구인가?.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6~78.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93.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22~124, 333~33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창호(彰浩)스님 본항목 창호스님(彰浩, 1889~1976) 彰浩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창호스님(彰浩,_188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창호(彰浩)스님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창호(彰浩)스님 재희(在喜)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지도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음력으로 일 년 중의 첫째 달
  2. 하춘생 저, 『한국의 비구니문중』 123쪽에는 창호스님의 수계제자로 상덕(尙德)・혜춘(慧春)・보명(菩溟)으로 되어 있고, 334쪽에는 혜춘(慧春)・상덕(尙德)으로 되어 있으며 보명스님(菩溟)은 창호스님(彰浩)의 사형제로 되어 있다. 『한국비구니수행담록』(상권 317쪽)과 『한국비구니명감』(232쪽)에는 상덕스님(尙德)이 창호스님(彰浩)의 은사인 재희스님(在喜)의 수계제자로 되어 있으므로 창호스님(彰浩)과 상덕스님(尙德)은 사형제로 되어 있다.
  3. 『한국비구니수행담록』(상권 317쪽)과 『한국비구니명감』(232쪽)에는 상덕스님(尙德)이 창호스님(彰浩)의 은사인 재희스님(在喜)의 수계제자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