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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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스님은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 보문종을 창종(創宗)하고 보문사를 중창 불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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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恩榮)스님은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 보문종을 창종(創宗)하고 보문사를 중창 불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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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30일 (목) 17:47 판



정의

은영(恩榮)스님은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 보문종을 창종(創宗)하고 보문사를 중창 불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0 충남 대덕 출생
1918 동학사에서 긍탄(亘坦)스님을 은사로 출가
1919 동학사에서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20 보문사 주석
1935 도봉산 원통사에서 용성(龍城)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36 보문사 불교전문강원 개설
1941 서울 청룡암 주지 취임
1943 보문사 불교전문강원 졸업
1945 보문사 주지 취임
1945~1979 보문사 중창불사
1968 비구니 ‘우담바라회’ 발족하고 초대회장 역임
1971 재단법인 보문원 설립, 이사장 취임
1972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보문종’ 창립 초대 총무원장
1981 보문사에서 입적 (세수 72, 법랍 63세)
문중 보문종(普門宗)문중
생활신조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자지도 말라
상훈 국무총리 탑골승방 보문사 석굴암 준공 감사장 (1972)
수계제자 법준(法俊)・법훈(法訓)・법송(法松)・대원(大圓)・법춘(法春)・법종(法綜)・법관(法觀)・상륜(常輪)・법신(法信)


활동 및 공헌

출생

[은영스님]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77
[보문사 주지스님 생신기념 1969]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78

보암당(寶庵堂) 은영노사(恩榮老師)는 사법권이 일본으로 넘어가 조선 궁궐을 일본 친위대가 지키고 한일합방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혼돈의 시대에 태어났다. 스님은 1910년 1월 15일 아침 충남 대덕군 북면 미호리에서 아버지 송헌대와 어머니 박상품화 보살의 사이의 5형제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이며, 이름은 송걸례이다. 어느 날 밤 모친 박상품화 보살이 신기한 꿈을 꾸었다. 상서로운 서기가 가득하더니 망망대해에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올라 저절로 보살의 치마폭에 안기는 것이었다. 스님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아버지 또한 꿈을 꾸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황소 한 마리가 따라 오기에 집으로 끌고 와 매어놓고 보니 암소로 변했다고 한다.

완고했던 양반가문에 계속 딸만 태어나자 아들을 보기 위해 남자 이름인 걸례(傑禮)라는 남자 이름을 지어줬다는 일화가 있다. 은영 스님이 태어난 지 삼칠일이 지난 후, 계룡산에서 온 떠돌이 보살이 스님을 보더니 “이 아이는 보살의 화현입니다. 사바세계 중생들의 고통을 건지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하여 부모님들은 은영 스님을 부처님이 점지하여 주신 것으로 굳게 믿었다. 은영스님이 다섯 살 때 동무들과 소꿉놀이를 하는데 주로 집 짓는 일과 성 쌓는 일 혹은 탑을 세우고 부처님을 조성하여 공양하고 예배하는 등 주로 불사에 관한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동네 사람들이 “스님 죽은 후신이 태어났다보다. 보살이 화현한 것 같다.”라고 할 정도로 스님의 어린 시절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출가

어느 날 아버지 송 처사는 대덕 큰 장에 나갔다가 일본 헌병에게 매를 맞고 숨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에 놓였다. 어머니 박상품화 보살이 그 길로 동학사를 찾아 3일 동안 기도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맹세를 하였다. “거룩하신 부처님! 남편이 불현듯 액난을 만나 반신불수가 되었으니 하루속히 바른 몸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만일 병석에서 일어난다면 그 공덕으로 자식 하나를 부처님께 바치어 평생 동안 시봉케 하겠습니다.” 이에 감응하였던지 아버지의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나 “송헌대, 너는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러나 네 아내의 기도로 병을 낫게 하여 줄 터이니 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도록 하여라.”하며 호리병에 든 물을 먹여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차츰 기력을 회복하게 되셨다. 이렇게 하여 은영스님은 9세이던 1918년 동학사에 출가하였다. 하지만 사미니계를 받고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게 되었고 스님은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아버지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였다.

동학사로 강원교육을 이수하러 갔다가 긍탄스님을 만나 설월당 이긍탄 스님을 은사로 정하고, 1919년 10세에는 만호강백과 대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보문사에 주석하다.

1년 후에는 이미 주지로 가 계시던 긍탄스님을 따라 서울 보문사로 올라왔다. 보문사에 도착해 보니 절에서 일하던 ‘청운’이라는 자가 사찰소유의 전답을 다 팔아 챙겨 달아난 후였다. 사찰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스님은 스승을 따라 탁발과, 밥장사와 나물장사까지 하여 간신히 절 살림을 이끌어 갔다. 하지만 워낙 몸을 돌보지 않고 탁발을 하던 은사스님은 병을 얻어 금강산 장안사 선방에 입방을 하게 되셨다.

1923년, 14세의 어린 스님은 보문사의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은영스님은 이 때부터 보문사 대도량을 완성하기까지 살신성인의 자세로 불철주야 노력하는 대보살(大菩薩)이 되었다. 그렇게 각고의 고생 끝에 모은 돈과 당시 보문사 근처에 살던 지혜룡, 지운양 부자의 시주금 등에 힘입어 요사채를 신축하고 기울어져 가는 대웅전을 일신 중창할 수 있었다. 그때 스님의 나이 겨우 19세였다.

법당을 중수하고, 지금의 선불장 뒤에 있던 산내 묘소 이전문제 등을사중의 고민거리를 해결하고 나니 천하가 통일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보니 떠나갔던 대중이 다시 모여들어 4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보문사에 불교 강원을 개설

당시 개화물결을 타고 변화되어 가는 사회현상을 바라보던 스님은 마침내 1936년 보문사에 불교 강원을 개설하고, 전주 정혜사 정영명 스님을 초대 강사로 초빙하였다. 강원은 비구니 대강백 수옥(守玉)스님을 비롯해 대저술가 안진호 스님과 이종익 박사, 이섭 교수, 황영진 선생 등이 차례로 강사직을 역임하며 수많은 비구니 학인들을 배출하엿다.

보문종의 제3대 종정 천일조(千日照)스님과 제4대 종정 천혜안스님이 보문사로 온 시기도 이즈음이다. 이에 앞서 스님은 1935년 나이 26세 때 서울 원통사에서 백용성(白龍城)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보문사를 지키기 위한 노력

1940년 초 용주사 주지였던 강자진 스님이 보문사 법사로 오게 되었다. 노전채가 곧 허물어질 것 같아 대중공사에서 임야 반을 팔아 보수하기로 결정하고 강자진 스님께 부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땅문서만 빼앗기고 큰스님을 비방하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자 강자진 스님을 상대로 몇 차례 고소 고발이 잇따랐다. 강자진 스님이 보문사를 봉은사에서 용주사 말사로 바꿔 놓으면서 양대 사찰 간에 미묘한 알력이 생긴 것이다. 강자진 스님은 일본 천황의 심복이었던 데라우찌 제독의 양아들로서 한국 최대의 권승 노릇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런 강자진 스님이 비구니만 사는 보문사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노전채 수리를 위해 내놓은 임야를 가로채고 관권을 동원해 주지를 교체하는 등 보문사가 쑥대밭이 되도록 괴롭혔다. 그러나 이종성 변호사를 만나 삼년 동안 끌어오던 재판은 무사히 끝낼 수 있었고, 부처님의 가호로 보문사를 지키게 되었다. 해방 후 강자진 스님은 원한을 얻은 사람들에게 붙들려 등에 북을 지고 종로 네거리를 돌며 “나는 일본 놈의 앞잡이요. 데라우찌 제독의 양아들이었소. 용서해 주십시오.”하며 조리를 돌다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보문사의 주지로 취임

보문사에 불교 강원을 개설한 스님은 1941년 사집과를 졸업한 후 삼각산 청룡암의 주지로 부임했다. 1943년에는 대교과를 졸업하고 그해 보문사에서 대덕법계 위에 올라 당호를 ‘보암(寶庵)’이라 하였다.

은영스님은 1945년 보문사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다섯 가지 서원을 발원하게 되였다.

첫째, 대지를 매입하여 절 주변 환경을 정리한다.
둘째, 절 경계를 이루는 담장을 쌓아 시비의 요소를 제거한다.
셋째, 구도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건축 불사를 통해 도량을 청정하게 장엄하게 만든다.
넷째, 도제양성을 통해 불교의 생명을 잇는다.
다섯째, 복지사업을 통해 명실공히 대자대비 행(行)을 실천한다.

오늘날의 보문사를 만든 초석이 된 스님의 이 서원은 머지않아 이루어졌다. 스님은 먼저 삼성각 대지 3천여 평을 매입하여 앞서 잃었던 사찰 토지를 다시 확보했다. 또한 사찰 경계를 낱낱이 측량하였다. 그리고 13년에 걸쳐 붉은 벽돌로 6척 높이의 담장을 성처럼 쌓아 올렸다. 담을 쌓고 보니 도량이 가을 하늘처럼 드러났고, 시비의 염려는 저녁연기처럼 사라졌다. 이 일로 인해 스님은 ‘억척 비구니’로 불리기도 했다.

불교전통 음악인 범패를 되살리다

이렇듯 서원이 하나씩 이루어지면서 보문사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스님은 새로운 경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은사인 긍탄 스님과 함께 불교전통 음악인 범패를 배워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고 바라, 승무, 도량게 등 불공의식을 여법이 전수, 계승하는 일이었다. 탑골승방 보문사가 ‘재받이 승려들이 모인 장소’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불교의식을 대중화하고 특수화하려는 스님의 전승의지는 봉원사·백련사·안정사 등 태고종 사찰에 비견할 만큼 강했다. 스님의 불교전통 전승의지는 불교의식을 대중화하고 특수화하여 보문사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다특히 스님은 옛 곡조가 든 우리말 법문인‘하청(下請)’을 잘하여 교단 내에서 이름을 드날리기도 하였다.

계속되는 불사

그러한 와중에도 사찰 불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1958년에는 대중을 위한 선방식 법회장소이자 보문사의 심장인 선불장을 완공했다. 천연수 개발과 상하 2층 지하 1층의 건물을 불연석으로 지었으며, 특히 지하실의 오밀조밀한 설계는 당시 건축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일본과 중국 불교계에서도 설계도를 가져갈 정도였다.

스님의 원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법보원을 지어 장경을 배치하고, 1962년 산신각, 1969년 범종각을 신축하는 한편 대종을 주조하고, 1970년 극락전, 호지문, 시왕전, 보광전을 신축하였다.


‘재단법인 보문원’을 설립

그러나 당시 조계종은 총무원이 비구·대처승으로 갈리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었고 그런 가운데 순수한 사찰들까지도 모진 바람을 맞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보문사도 그러한 사찰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비구·대처승 싸움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독립적인 권리능력을 인정받고 누구한테도 침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단법인 보문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71년, 스님의 세수 62세 때였다. 재단법인 보문원 이사장에 취임한 스님은 법인의 첫 사업으로 시자원(施慈園)을 건립하여 한의원 시설 등 스님들의 노후대책과 외로운 노인들을 위한 경로사업의 길을 열었다. 보문종이 사회복지사업의 물꼬를 트면서 대중회향의 전법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근에 이르러 시자원을 이용하는 노스님과 노인들의 숫자가 줄어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이다.

탑골 승방 석굴암

[보문사 대웅전]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484
[보문사 석굴암]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484
[보문사 선불장, 2022년 철거]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484
[보문사 석가여래 진신사리 묘보탑]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484

호국충효, 남북통일, 국태민안 등을 기원하며 경주 석굴암을 보문사 도량에 그대로 재현시킨 ‘탑골 승방 석굴암’은 보문사의 핵심이자 스님 원력의 총체로 일컬어지는 건축물이다. 소요된 석재만 2천4백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 포, 연인원 7만 여 명이 동원된 이 건축 불사는 보문종의 최대 불사로 손꼽힌다. 1970년 8월에 착공하여 1972년 6월에 준공한 건물로 공사비만도 무려 1억원이 소요되었다. 당시 불교관련 대석학들은 이 석굴암을 두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병도 교수는 ‘가히 동양문화의 중흥을 위한 방향 제시’라고 찬탄했으며, 김원룡 박사와 이선근 박사는 ‘한국 석불사업의 금자탑이자 조국통일의 심벌’이라고 칭송했다. 또 이기영 박사는 ‘생활불교의 이상을 재현하였다’고 평가했다. 석굴암은 돌산의 지형적 특성을 살려 조성한 것으로, 경주 불국사 석굴암과 규모와 내용은 같으나, 구성면에서 경주 석굴암이 1문(門)인데 비해 3문이며, 경주 석굴암의 전실(前室)에 있는 팔부신중상이 생략되었다.

대한불교 보문종을 등록

그 후 스님은 1972년 4월 20일 대한불교 보문종을 등록하여 한국불교뿐 아니라 세계 불교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비구니 종단을 창종(創宗)하였다. 초대 종정에 은사인 긍탄 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는 스님이 취임하였다. 1977년에는 보문사 정문 앞에 지금의 은영유치원과 독서실이 들어있는 동원정사를 신축하고, 1979년에는 생애 마지막 불사가 된 석가여래 진신사리 묘보탑인 9층 석탑을 조성하였다. 보문사는 이로써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큰 법당, 노전, 삼성각, 산령각, 선불장, 범종각, 극락전, 호지문, 시왕전, 보광전, 시자원, 석굴암, 관음전, 법보원, 9층 석탑 등이 질서정연하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명자 그대로 보문시현(普門示現)하고 원력홍심(願力弘深)한 관음보살의 대원력을 실천하는 도량이 되었다.

관음보살의 대원력을 실천

일생을 두고 길러낸 도제(徒弟)가 1천여 명에 달하고 보문사 탑골 승방을 거처간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앗다. 보문사는 이름 없는 고아원이요, 양로원이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입을 것을 주고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잠잘 곳을 제공하였다.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못한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시켜주고, 출가 사문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에겐 출가의 길을 열어주어 만인의 어머니가 되고 백만 신도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은영스님의 이러한 노력은 현재도 계속 계승되고 있는데, ‘은영 어린이 집’과 ‘은영 유치원’은 교계의 대표적인 시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스님이 남긴 사회복지와 포교의 업적은 상당한 것이다. 비구·대처승 양 종단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갖은 수모와 고난을 겪다가 마침내 사찰 재산을 탐내는 모리배들과 수십 차례 재판을 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불교의 정법정신(正法精神)이 무엇인가를 백일하에 드러내어 만인의 송화(頌賀)를 받는 가운데 대종단의 기수(旗手)가 되었다.

입적

스님은 1981년 음력 9월 11일 보문사에서 세속의 연을 다하였다. 세수 72세요 법랍 64세였다. 현재 보문사 법보전 뒤편 계단에는 은영스님의 뜻을 기리는 ‘비구니보암당은영사비(比丘尼寶庵堂恩榮師碑)’가 세워져 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 법준(法俊)·법훈(法訓)·법송(法松)·대원(大圓)·법춘(法春)·법종(法綜)·법관(法觀)·상륜(常輪)·법신(法信)스님 등이 있다.

※ 운문회보 발취 불기 2533 (1989년 7월 15일) 제 29호

보문사

홈페이지: http://www.bomunsa.or.kr/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이다. 1115년(예종 10)에 담진(曇眞)이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조그만 암자로, 탑골에 있었으므로 탑골 승방이라 하였다. 그 뒤 1692년(숙종 18)에 대웅전을 개축하는 등 수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45년부터 비구니 은영(恩榮)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원래는 조계종 산하의 소속 사찰이었으나 1972년 독립하여 보문종을 창종하고 보문종의 본산이 되었는데, 현재 그 규모면에서 굴지의 거찰(巨刹)이 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석굴암·호지문·선불장(選佛場)·보광전(普光殿)·산령각(山靈閣)·석굴암노전(石窟庵爐殿)·삼성각(三聖閣)·별당·요사채, 한의원 및 특별양로원이 있는 시자원(施慈園)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굴암은 은영이 그 분야의 권위자를 모아 준공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각과 설계를 하였고, 공사비만 1억을 들여 1972년 부처님 오신 날에 착공하였으며 3년 6개월의 역사 끝에 점안식을 가졌다. 경주 석굴암과 똑같은 규모로 만들었으나, 구성면에서 볼 때 경주 석굴암은 정면이 1문인 데 비하여 이곳은 3문이며, 실내 벽을 이중으로 만들고 실내 천장으로 공기가 유통되게 하였다. 단지, 경주 석굴암의 전실에 있는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이곳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오래된 문화재는 없으나 석굴암 앞의 높은 단 위에 세워진 팔각구층석탑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팔각구층석탑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탑 안에는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여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은 세계 유일의 비구니들만으로 구성된 보문종의 총본산으로서 언제나 150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수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도의 분위기가 특히 엄숙한 도량이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은영(恩榮)스님 본항목 은영스님(恩榮, 1910~1981) 恩榮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은영스님(恩榮,_1910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은영(恩榮)스님 보문종(普門宗)문중 ~의 일원이다
은영(恩榮)스님 긍탄(亘坦)스님 ~의 제자이다
은영(恩榮)스님 동학사 ~에서 출가하다
은영(恩榮)스님 대은(大隱)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은영(恩榮)스님 용성(龍城)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은영(恩榮)스님 보문사 ~을 중창하다
은영(恩榮)스님 청룡암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은영(恩榮)스님 보문사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