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법주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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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다. </br> | + | 보은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다. </br> |
그러나 이 절은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는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그 뒤 1101년(숙종 6)에는 숙종이 그의 아우 대각국사(大覺國師)를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이 절에서 베풀었는데 당시 3만 명의 승려들이 모였다. </br> | 그러나 이 절은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는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그 뒤 1101년(숙종 6)에는 숙종이 그의 아우 대각국사(大覺國師)를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이 절에서 베풀었는데 당시 3만 명의 승려들이 모였다. </br> | ||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배향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1363년(공민왕 12)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br> |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배향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1363년(공민왕 12)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br> |
2024년 5월 9일 (목) 21:42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보은 법주사(法住寺),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 주소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보은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이 절은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는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그 뒤 1101년(숙종 6)에는 숙종이 그의 아우 대각국사(大覺國師)를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이 절에서 베풀었는데 당시 3만 명의 승려들이 모였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배향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1363년(공민왕 12)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상환암(上歡庵)에서 기도하였고, 세조는 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복천암(福泉庵)에 와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신라 영심의 중창 이래 이 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유정(惟政)이 팔상전을 중건하였다. 1624년(인조 2)에도 벽암(碧巖)이 중창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쳤다.
1851년(철종 2)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주선으로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1872년(고종 9)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렸다. 1967년 태전(太田)이 중수하였으며,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 중수가 있었다. 그 뒤 1990년 청동미륵상을 중수하고 그 좌대 아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팔상전(捌相殿)·명부전(冥府殿)·원통보전(圓通寶殿)·약사전(藥師殿)·천왕문(天王門)·금강문(金剛門)·능인전(能仁殿)·진영각(眞影閣)·사리각(舍利閣)·염화실(拈華室)·삼성각(三聖閣)·응향각(凝香閣)·진해당(振海堂)·궁현당(窮玄堂)·명월료·정제당 등이 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주사
- 지도 : 법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