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정덕스님(正德, 1933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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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5일 (목) 07:32 판



정의

정덕(正德)스님은 대영(大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자비의 전화’ 등 복지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3 부산 출생
1948 전남 순천여고 중퇴
1979 견성암에서 대영(大英)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9 일타(日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재단법인 선학원 인과선원 창건
1982 범어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3 수덕사에서 하·동안거 성만
1988~2004 서울시 목동청소년회관(현 수련관) 운영위원
1990 전국비구니회 서울지부 부회장
1993~2004 ‘자비의 전화’ 2대 회장
1995 전국비구니회 사회부장
1996 사회복지법인 성라원 부설 성라실버타운 원장
1999~2004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
2000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불교상담개발원 이사
2000~2004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
대한불교 조계종 여성개발원 특별자문위원
2003 대한불교 조계종 불교상담개발원 2대 원장 취임
2004 재단법인 인과선원 주지,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성라실버타운 원장
2005 사단법인 자비의 전화 대표이사
2019 마음 그림전 개최
문중 육화문중(六和)
상훈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포교원장 공로패 (2000), 불교사회복지대회에서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2008) 외 다수
저서 『정덕스님이 들려주는 인과』, 우리출판사, 2012, 『백 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구제하라』 전3권, 예서원, 2021
수계제자 지성(智性)

활동 및 공헌

출생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565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566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참석]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569
[정덕스님]
사진출처 : 불교저널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8929
[정덕스님 그림]
사진출처:불교닷컴 https://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52574
[인과선원]
사진출처 : 불교저널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72

정덕(正德)스님은 1933년 11월 16일 부산에서 아버지 정준섭과 어머니 임미순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며, 이름은 정인자이다. 스님의 태몽은 참으로 신기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해 떨어진다. 해 받아라!" 이에 어머니는 엉겁결에 치마를 벌려 해를 받았다. 그 후 태기를 느끼고 그 꿈이 태몽인 줄 알았다. 임신한 지 7개월 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한 스님이 탁발을 하러 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스님을 무섭게 여겼던지라 시주만 하고 돌아섰다. 그랬더니 그 탁발승이 어머니를 보고 말하였다. “태중의 아이는 딸이며, 새 달에 세상으로 나올 것입니다. 귀히 될 인물이니 10년 동안 생일 불공을 드리고 『백살경』을 읽어주십시오." 출산 예정일이 아직 3개월이나 남았는데 다음 달에 아이를 낳는다고 하니 별 이상한 말을 다 듣는다며 어머니는 무심히 넘겨버렸다. 그런데 다음 달이 되자 신기하게도 그 스님의 말대로 산기가 있었다. 스님은 그렇게 팔삭둥이로 세상에 나왔다. 영특하고 귀한 자식이어선가, 스님이 태어난 뒤로 집안일이 만사형통하였다. 안 되는 일이 없이 모든 게 잘 풀려나가 나날이 사업이 번창하였고 마치 벼락부자라도 된 듯이 살림이 매우 풍족해진 덕분에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님이 9세 되던 해에 객지로 나가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면서 가세가 점차 기울기 시작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스님은 집안에 짐이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집안일을 도와가며 지냈다. 또한 어렵게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타고난 인성과 재능 만큼은 여전하였다.

집안의 어려움과 육신의 고통을 겪다

형편이 바뀐 탓에 가까스로 학업을 이어가던 스님은 여수반란사건을 계기로 순천여고 재학 중에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스님은 어려운 집안 환경을 탓하는 법 없이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에 느닷없이 배가 부풀어 오르는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명조차 전혀 알 수가 없었고,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참으로 딱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 무렵 스님은 저승을 다녀오는 아주 특별한 꿈을 꾸게 되었다. 스님이 극심한 고통으로 혼절해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스님을 찾았다. 이호수대왕의 명을 받들어 스님을 데리러 온 세 명의 사자가 문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호수대왕이 부르신 다는 말을 듣고 스님은 어떤 불심이 발동했는지 스님은 영광스럽고 기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그 길로 사자의 뒤를 따라 나섰다. 스님은 가마를 타고 저승의 열두 대문을 지나면서 전생의 죄업은 그대로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업보가 되어 그 고리가 이어진다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두 대문을 지나 이호수대왕 앞에 당도하여 대왕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하지만 대왕의 모습이 너무나 존귀하고 위엄을 갖췄기에 차마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깊이 존경하는 마음에 스님은 대왕 앞으로 나아가 큰 절을 세 번 올렸다. 그러자 스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왕은 만면 가득히 흐뭇한 웃음을 지으시며 물었다. “몇 살이더냐?" 스님이 대답을 하자 대왕은 온 세상 중생들의 명부가 적힌 책장을 넘겨보고는 얼굴을 환히 펴시며 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잘못 데려왔다. 이 아이는 황인자가 아니라 정인자가 아니더냐! 이 아이를 정중히 데려다주어라.” 스님은 이호수대왕과 함께 그곳에서 살고자 하는 바람이 컸던 터라 돌려보내라는 말씀이 못내 서운하기만 하였다. 이런 스님의 마음을 읽으셨던지 이호수대왕은 붓을 들어 글을 써주면서 말씀 하셨다. “백 가지 방편으로 너는 중생을 제도하라.” 대왕이 쓴 글귀를 보니 ‘성대성화성토(星大星火星士)’라고 적혀 있었다. 스님은 글귀가 적힌 종이를 받아들고 나중에 결혼을 하여 자식이 생기면 이름으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호수대왕 앞을 물러나서 가마를 타고 저승에서 돌아나오는 도중에 스님은 사람이 올 수 없는 신성한 성지에 왔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다. 그 벌은 가시가 돋친 엄나무 가지 세 개를 엮어 만든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것이었다. 스님은 종아리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다가 그만 꿈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스님이 꿈에서 깨어나 보니 그토록 부풀어 올랐던 배가 슬그머니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스님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났다고 한다. 비록 꿈속일지라도 사후 세계에 대한 체험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덕을 쌓고 항상 남을 위하여 제도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듯이, 나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을 대해 온 것이다.

스님은 평소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어른 아이 구분할 것 없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하고 착한 마음으로 대하였다. 그러기에 주위 사람들 모두가 스님을 가까이하며 좋아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님은 자비로운 불법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부처님과의 인연이 맞닿는 일생일대의 계기를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스님은 궁핍한 사람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남의 집에서 가정부를 하는 이들에게 푼돈을 모아서 목돈을 만드는 일을 소개시켜 주곤 하였다. 그런데 계주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스님은 단지 소개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500만 원이나 되는 거액의 빚을 지고 말았다. 좋은 집 한 채 값이 약 35만원 쯤 되는 시절이었다. 그러니 500만 원은 대단히 큰 돈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돈을 대신 물어내라는 독촉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스님은 문득 절에 가서 부처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하다

스님은 초와 쌀을 사 가지고 상단에 올린 다음 무작정 절을 하였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스님은 실로 엄청난 가피를 체험하였다. 관세음보살님이 법당 아래로 내려오셔서 금관을 벗어주며 스님에게 쓰라고 건네주셨던 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스님은 다시 법당에 들렀다. 그리고 자신이 전생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중생의 마음을 치료해줄 수 있는 명의가 되게 해달라고 발원을 하였다. 이러한 발원을 가슴에 품고 정성껏 삼배를 하고 있는데 가사 장삼을 입은 어느 비구스님이 빨간 상자를 들고 다가와서 구슬을 건네주었다. 그 순간 스님은 입고 있던 치마가 흥건히 젖고도 남을 만큼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쏟다가 심안(心眼)이 환히 열리면서 전생을 모두 보게 되었다.

그 뒤로 스님은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전생과 금생을 언제라도 보고 들을 수가 있었으며, 모든 것을 저절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자식 문제 등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따뜻한 조언과 함께 아픈 마음을 치료해주며 답례로는 쌀 한 숟가락씩만 받곤 하였다.

1968년 동안거 해제일에 조계사 법당에서 경오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오던 중이었다. 어떤 할아버지가 스님의 귀에 대고 “공부 좀 해!” 하고 호통을 치셨다. 깜짝 놀란 스님은 뛰다시피 할아버지를 쫓아갔는데, 당도해 보니 우주본체론에 관해 강의를 하는 곳이었다. 스님은 그 자리에 있는 책과 그림의 내용들이 금방 이해가 되고 그 뜻을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잠시 후 뒤를 돌아봤으나 그곳까지 자신을 인도해주신 할아버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스님은 다양한 학계의 박사와 학장들로 이루어진 그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홍일점으로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상, 한방, 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공부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그 후 스님은 육·해·공군사관학교 등지를 찾아다니며 고통 속에서 힘겨워하는 중생들의 마음과 육신을 고쳐주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몇 겁의 업으로 만들어진 인과를 알고 치료해주는 스님의 영험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스님은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부처님께서 자신이 발원한 대로 영험한 능력을 주신 것이라 믿고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고 한다.

출가

세수 47세 되던 해인 1979년 정덕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대영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출가한 바로 그해 일타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출가 후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주위의 모든 인연들과 화합함으로써 어른스님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1979년 재단법인 선학원 인과선원의 주지로 취임한 후 세수 50세 되던 해인 1982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고, 다음해 수덕사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성만하였다.

자비의 전화

늦게 출가하면 늦게 깨우친다는 말이 무색하게 스님은 마음이 열린 후에 보이는 것이 전과 같지 않아 새롭게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중생을 위한 삶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자비의 전화’를 통해서 늘 불자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자비의 전화’는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우리 이웃들의 어려운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누구나가 벗이 되어 어려움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나누고자 불교계에서 설립한 24시간 종합전화상담기관이다. ‘자비의 전화’는 1990년 창립 당시부터 1995년까지는 독립 단체로, 1996년부터는 (사)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부설기관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0년 4월 조계종 포교원 불교상담개발원(원장 이근후)의 부설기관으로 정착하였다.

2004년‘자비의 전화’대표는 정덕스님이 맡고 있으며, 상담 자원봉사자가 180여 명이고 월 평균 봉사자는 60여 명 정도이다. 2002년 9월까지 제16기 상담원을 배출하였다. “중생 제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중생 제도입니다.”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과 늘 함께 호흡하는 스님은 상담을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나 자신에서 비롯된다는 인과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교 114사업'

이 밖에도 스님은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스님은 불교계의 문화 행사나 환경과 복지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그에 관한 정확한 정보나 자료를 제공해줄 만한 단체가 없다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왔다. 그리하여 불자는 물론 일반인에게 불교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을 바탕으로 관심과 동참 욕구를 끌어올려 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와의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는 목표로 ‘불교 114사업’도 운영하고 있다.

성라실버타운 원장 역임

또한 국내 최고 수준의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성라실버타운’ 원장을 맡고 있다. ‘효행은 부처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중요한 실천덕목’이라고 말하는 스님은 부처님의 뜻을 올바르게 따르는 것일 뿐이라며 자신을 겸허히 낮춘다. 스님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일을 하면서도 좋은 생각, 기쁜 생각으로 해왔기에 힘들거나 피곤한 줄 몰랐다는 것이다. 또 공부는 시끄러운 가운데서 익혀야만 힘이 강한 법이라고 생각한다.

영가들의 합동 영혼결혼식

언젠가 기도하는 중에 ‘너는 삼십만 영가를 제도하라.’는 선몽을 받은 스님은 영가 천도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영가들의 합동 영혼결혼식을 윤달에 이끌어주고 있다. “수행자라면 우주 속의 ‘나’로서 전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악한 마음으로 다가 오더라도 참회하는 마음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우리 승려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스님은 언제나 하심(下心)하며 온화한 마음으로 자비행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덕스님은 1990년 전국비구니회 서울지부 부회장과 1995년 전국비구니회 사회부장을 역임하였으며, 2004년 자비의 전화 2대 회장, 사회복지법인 성라원 부설 성라실버타운 원장,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공동대표로 재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지성(智性)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정덕(正德)스님 본항목 정덕스님(正德, 1933~) 正德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덕스님(正德,_193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정덕(正德)스님 육화문중(六和) ~의 일원이다
정덕(正德)스님 대영스님(大英) ~의 수계제자이다
정덕(正德)스님 수덕사 견성암 ~에서 출가하다
정덕(正德)스님 일타스님(日陀)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정덕(正德)스님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정덕(正德)스님 서울 인과선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정덕(正德)스님 서울 인과선원 ~을(를) 창건하다
정덕(正德)스님 안거 ~을(를) 성만하다 예산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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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인과선원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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