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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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현재 세수 78세, 법랍 61세인 성현스님은 금천선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 2004년 현재 세수 78세, 법랍 61세인 성현스님은 금천선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 ||
수계제자로는 현주(現珠)·현근(現根)스님이 있다. | 수계제자로는 현주(現珠)·현근(現根)스님이 있다. | ||
+ | ==참고문헌==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
2022년 6월 29일 (수) 19:07 판
성현(聖賢)스님 | |
---|---|
법명 | 성현(聖賢) |
법호 | 대주(大珠) |
속명 | 김귀분(金貴分) |
출생 | 1927. 7. 25 (비구니) |
출가 | 1944. |
입적 | |
사찰 | 금천선원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1동) |
특이사항 |
정의
성현(聖賢)스님은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여 비구니강원 설립에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27 | 경북 상주 출생 |
1944 | 금천선원에서 성진(性眞)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46 |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50 |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4~1963 | 동학사 강원 졸업(1회) |
1963 | 동학사 총무 |
1965 | 금천선원 총무 |
1966~1984 | 금천선원 주지(가람 수호, 포교, 도제양성) |
1984 | 주지 사임 |
1984~1994 | 금천선원에서 10년간 두문불출 10시간 이상 정진 |
1994~1996 | 내원사, 범어사, 대성암, 경주 금련선원에서 안거 성만 |
1996~2002 | 경주 금련선원 안거 |
2004 | 현재 금천선원 주석 |
- 문 중 : 삼현(三賢)
- 수행지침 : 지행합일(知行合一)
- 상 훈 : 삼현문중상
- 수계제자 : 현주(現珠)·현근(現根)
활동 및 공헌
출가
대주당(大珠堂) 성현(聖賢)스님은 1927년 7월 25일 경북 상주군 내서면 연월리에서 아버지 김학천과 어머니 김음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이며, 이름은 김귀분이다. 무종교 집안에서 순탄하게 자란 스님은 우연한 기회에 상주 남장사에서 수옥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게 되었다. “마음만 견고하면 불법의 대해(大海)에서 노니는 사문이 될 수 있다.” 이 한마디가 스님의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부처님과의 인연을 일깨웠다. 이후 성현스님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옷가지 하나 없이 올올이 출가를 결행하여 1944년 17세에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였다. 20세 되던 1946년 스님은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0년 범어사 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금천선원 경내 (사진)
비구니강원 설립의 중요성 인식
스님은 덕운당(德雲堂) 성진스님 문하에 들어가서 하루하루 탑을 쌓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중에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가서 삼칠일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금빛을 머금은 경책을 받는 꿈을 꾸었고, 경론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마침 강원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신 은사스님이 지원해주셔서 동학사 경봉 큰스님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니 이때가 1954년 스님의 나이 28세였다. 비구·대처승 간의 대립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절에 비구니 강원의 설립을 시급하게 여겨 뜻 맞는 도반스님 몇 분과 함께 학인 자체 내에서 주지를 내어 강원을 세우고 오전 강의가 끝나면 오후 내내 울력을 하며 도량을 일구었다. 동학사 강원 시절 스님은 5년간 입승 소임을 보았는데, 저녁 9시에 방선을 한 후 대중이 자는 사이 대웅전에서 새벽 3시까지 3년간 절을 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스님의 돈독한 신심과 불퇴전의 용맹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월 보름 결제 후에는 상반들이 열흘씩 탁발을 하여 아랫반의 부족함을 메워주었고, 청담 큰 스님을 모시고 일주일씩 특강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성현스님은 28세에 동학사에 들어가 37세 되던 1963년에 대교과를 모두 마치고 최초의 비구니 강원인 동학사 강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에 동학사에서 총무 소임을 맡았으며, 1965년 금천선원 총무로 부임하여 40세 되던 해인 1966년 금천선원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와 포교, 도제양성에 주력하였다.
보시 인욕행 실천
처음 발심할 때 참선정진에 뜻을 두었기에 지금도 하루 종일 일을 놓지 않으면서도 새벽 참선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만공스님 어록을 탐독하고 있다. 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 병고로 3년간 누워 지낼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직접 시봉하고 보살펴서 타의 모범이 되었고, 은사와 상좌 간 인연의 지중함을 몸소 실천하는 대비심(大悲心)을 보여주었다. 도제들이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도록 노년까지 살림을 직접 도맡아 하였는데,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쉬지 않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상좌 등 대중들에게 한 번도 성을 낸 적이 없다. 또 가람에 들어오는 인연들을 부처님처럼 보살피는 보시 인욕행(忍辱行)을 실천해왔는데, 그 공로로 삼현문중상을 수상하였다. 68세 되던 1994년 경남 내원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하고, 다음해에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 하였다. 성현스님은 『유마경』 보살행 품의 ‘큰사랑(大慈)을 여의지 아니하고 어여삐 여김을 버리지 아니하며, 일체지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고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중생을 교화하되 게으르지 말라. 네 가지로 법수하는 법에 따라 행하기를 생각하며, 옳은 법을 옹호하되 몸과 마음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며, 선한 근본을 심되 싫은 마음이 없으며, 방편으로 회향하는데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으며, 법을 구하기에 게으르지 말라. 법문을 말하기에 인색하지 아니하며 부처님께 부지런히 공양할 것 이니라.’는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며 후학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1996년에서 2002년까지 경북 경주 금련선원에서 동안거 결제를 한 스님은 외부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매일 10시간 이상 정진에 전념했다. 2004년 현재 세수 78세, 법랍 61세인 성현스님은 금천선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현주(現珠)·현근(現根)스님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