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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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8일 (화) 14:44 판
법희(法喜)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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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법희(法喜) |
법호 | 묘리(妙理) |
속명 | 유손순(兪巽順) |
출생 | 1887년 2월 9일 (비구니) |
출가 | 1971년 |
입적 | 2014년 |
사찰 | 수덕사 견성암(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경력
연도 | 내용 |
---|---|
1887 | 충남 공주 출생 |
1890 |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貴完)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01 |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01~1909 |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 |
1910 |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 | |
1916 |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 |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 | |
1966 |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 |
1975 |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
기타사항
삼현(三賢)문중 |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불단정진(不斷精進)하라. |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 |
수옥(守玉)・춘일(春一)・영명(靈明)・영호(永浩)・도원(道圓)・장용(糚湧)・혜능(慧能)・정화(貞和) 외 |
활동 및 공헌
출가
묘리법희(妙理 法喜)는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
수행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 법희스님 사진출처 : 자성불(自性佛)(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
만공스님과의 만남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 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래 잘 왔다.”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 속에서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묘한 이치 참된 광명 길이 매하지 않도다.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하루는 만공스님이‘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
또 하루는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一便紙)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를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 사진출처(만공큰스님을 모시고)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
진정한 수행자의 삶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 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금오,전강,경봉, 햬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
만성스님과의 인연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 "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 등 여 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
법희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사불산 윤필암, 지리산 구충암, 덕산 보덕사, 삼각산 승가사,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
입적
80세 즈음에 는 다시 수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신품을 떨치며 유유자적 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
법회스님의 법맥을 이은 제자들로는 수준일 영명영호도원장 용혜정화 상륜스님 등이 있는데, 한결같이 한국 비구니의 큰 맥을 형성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스님의 고매한 인품 철저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수 있는 덕화는 불교계의 표상이 되어 후세인의 가슴속에 오래오래 이어져 갈 것이다.
월산(月山)스님의 조사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회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법회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
法喜老!
西天飛 乾坤失色 日與光 (법회노학 서천비 건곤실색 일여광)
日落西山 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 월출동 차일숭산 춘색만)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회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벽초(超)·탄허·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생존 시의 법희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회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비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 사진출처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수계제자
수계제자로는 춘일(春)·영명(靈明)·수옥(玉)·영호(永浩)ㆍ도원(道圓)· 혜능(慧能)·수찬(贊)·원성(圓)·도일(道一)·금목(金目)·현성(이상 열반함)스님 등이 은사의 유지를 계승했으며, 장용 (湧)·정화(貞和)·상륜(相)·정운(淨雲)·무생(無生)·월덕(月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
법희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 조영숙.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 민족사, 1998년.
- 한겨레신문, [깨달음의 자리]⑬ 견성암 법희선사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300002/2005/04/005300002200504061854072.html
수덕사 견성암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회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척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1986년 도감을 많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분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5~71.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97.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199~220.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86.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25~39
- 자성불(自性佛)(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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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희(法喜)스님 | 본항목 | 법희스님(法喜, 1887~1975) | 法喜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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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희(法喜)스님 | 귀완(貴完)스님 | ~의 제자이다 |
법희(法喜)스님 | 동학사 미타암 | ~에서 출가하다 |
법희(法喜)스님 | 동운(東雲)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법희(法喜)스님 | 해광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법희(法喜)스님 | 만공(滿空)스님 | ~으로부터 법 인가(전법게)를 받다 |
법희(法喜)스님 | 만공(滿空)스님 | ~으로부터 법호 를 받다 |
법희(法喜)스님 | 수덕사 견성암 | ~의 비구니 총림원장을 역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