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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일 (목) 14:58 판
영수(暎修)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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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영수(暎修) |
법호 | 영수(暎修) |
속명 | 김정자(金正子) |
출생 | 1941.02.27. |
출가 | 1948년 |
입적 | |
사찰 | 동학사 문수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
특이사항 | '『동학사(東鶴寺(誌))』(우리문화연구원 刊)'에는 법명이 '英殊'로 되어 있음 [1] |
목차
정의
영수(暎修)스님은 영수스님은 동학사 문수암의 암주로서 참선과 기도정진에 노력하셨으며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41 | 충남 공주 출생 |
1948 | 동학사 문수암에서 일현(一賢)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6 | 동학사에서 경봉(鏡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8 | 서울 청룡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 사집 수료 김영사(대성암) 동안거 성만, 윤필암, 석남사 하안거 성만 |
1969 | 천일 참선 기도 정진 |
1975 | 은사스님을 모시고 문수암 중창 불사 |
2004 | 문수암 주석 |
문중 | 청해(靑海)문중 |
상훈 | 사이판 한인회 감사패(1996) |
수계제자 | 보명(普明)·외선 |
활동 및 공헌
출가
영수(暎修)스님은 1941년 2월 27일 충남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389번지에서 아버지 김한기와 어머니 최복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영이며, 이름은 김정자이다.
아버지는 일본 명치대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이었고 어머니는 국민학교를 나왔는데, 아버지의 외도로 두 분이 헤어지면서 스님은 친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영수스님이 일곱 살 되던 해, 할머니가 대전역으로 데리고 가더니 어떤 스님한테 맡기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그 스님은 20리도 넘는 길을 영수스님을 업고 염불을 외우면서 걸으셨다.
그 뒤 함께 살게 된 아이에게 스님은 염불을 가르쳐주셨고,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영수스님은 그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따라했다. 어린 영수스님은 자신한테 잘해주고 맛있는 것을 주는 스님이 무척 좋았다.
당시 스님이 영수스님을 데리고 간 곳은 동학사 문수암이었다. 그리고 영수스님은 일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처님의 인연으로 문수암까지 오게 된 것인 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머리 긴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삭발한 스님들이어서 처음에는 모두 남자인줄 알고 몹시 두려워했다.
잔뜩 겁을 먹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처마 밑에 앉아있는 단발머리를 한 작은 소녀를 보았다. 그 소녀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다. 그 후 단발머리 소녀와 친구로 다정하게 지냈으나 아쉽게도 그 친구는 19세에 속퇴하고 말았다.
영수스님을 문수암으로 데리고 온 스님은 노스님께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이곳에도 버려진 아이들이 많은데 그것도 부족해서 또 데리고 왔느냐며 야단을 치신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영수스님은 어린 마음에 또 다시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출발이 어떠했든지 간에 그곳에 온 이상 삭발을 해야 했고, 스님이 되기 위한 수행도 시작되었다. 그렇게 하여 스님은 1956년 동학사에서 경봉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68년 서울 청룡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한편 속가에서는 실종된 영수스님을 찾으려고 신문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친할머니가 어린 영수스님을 어느 스님에게 맡기고 도망 가버린 사실을 속가 식구들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영수스님은 21세 때 속가의 집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당시 정부에서 사찰로 인구조사를 나왔는데, 노스님이 무조건 고아라고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자신이 주민등록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자각을 하고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출가 전 속가 집이 있던 경북 문경을 찾아간 것이다. 영수스님은 13년 만에 가족과 재회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이야기했다. 식구들은 다시 절에 들어가지 말고 속퇴하여 가족과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스님은 오랜 승려 생활이 몸에 배어있던 터라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수학
스님의 은사스님은 어찌된 영문인지 스님이 20세가 되도록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속가로 갔던 그해, 영수스님은 동학사 강원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학비를 벌기 위해서 8개월 동안 공양주[2]를 살면서 조금씩 공부를 했다.
영수스님이 동학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강사스님이 영수스님을 부르더니 '어른 말 안 듣고 나와서 혼자 사느냐.'며 호되게 꾸짖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러한 질책에도 끄떡하지 않고 계속 공부를 했으며 마침내 졸업까지 했다. 인내심을 보여준 것이다.
영수스님은 동학사에서 공양주 살던 때가 극락이었다고 회상한다. 큰절이라서 공양주 생활이 힘들었을 텐데 내색 한번 하지 않았으며, 항상 웃으면서 공부하고 일을 했다.
또한 그곳은 스님들이 많아서 서로 얘기도 나눌 수 있었고, 넓은 법당 청소도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라며 책임감을 갖고 했다. 막상 공부를 시작했지만 한글도 미처 깨우치지 못한 터라 여러 가지로 힘이 들어 중도에 포기했을 법도 한데 영수스님은 머리를 싸매고 굳은 의지로 끝까지 공부를 마쳤다.
초발심자경문을 배울 때 어려운 말이 너무 많아서 고생을 하기도 했고, 치문을 배울 적에는 더욱 힘이 들었다. 이때는 실력에 따라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뉘어 공부를 했는데, 영수스님은 공부를 못해서 결국 하반으로 떨어졌다. 같이 공부를 했던 대호스님은 지금도 치문을 배우던 강원시절 이야기를 하며 이따금 영수스님을 놀리기도 한다.
처음에 강사스님께서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쳐주셨는데 영수스님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자 화엄경을 가르치는 스님에게 인계하여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게 했다. 강사 스님은 영수스님이 잘 못해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한글을 모를 때에는 칠판에 직접 써가면서 가르쳐주셨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며 사집을 배우고, 남들보다 몇 배 는 더 힘들게 공부를 마친 끝에 드디어 졸업을 했다.
성철스님과의 인연
동학사 강원 생활을 끝낸 스님은 참선을 하면 도를 깨친다는 순수한 믿음으로 김룡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김룡사에는 도인이라 불리는 성철 큰스님이 계셨다.
큰스님은 영수스님을 보자마자 삼만 배를 시키셨다. 영수스님은 하루에 천 배씩 절을 했다. 처음에는 절하는 것이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무척 힘이 들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삼일이 지나고나니 괜찮아졌다. 그 다음부터는 불이 붙었는지 열흘 만에 삼만 배를 다 마쳤다.
그런 뒤에 화두를 받았고 보름 만에 능엄주를 외웠다. 참선을 할 때는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영수스님은 성철 큰스님을 통해 절하는 것과 인내심을 배웠다. 이때 배운 인내심은 이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이겨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 후 윤필암에 다녔는데, 그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김룡사에 계시는 큰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들었다.
은사스님에 대한 보은
선방에서 안거 중인 영수스님에게 어느 날 사형스님이 찾아왔다. 은사스님이 병환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스님은 그 길로 짐을 싸서 은사스님이 계신 문수암으로 들어가 시봉을 했다. 은사스님은 3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다가 결국 입적하셨고, 문수암 산 뒤쪽에서 다비를 했다.
은사스님은 무척 엄하셨다. 무조건 일을 많이 시키고, 어려서부터 단련을 해야 한다며 잠도 많이 못 자게 하셨다. 잠을 못 자게 하실 때는 은사스님도 주무시지 않고 영수스님 옆에서 지켜보며 이끌어주셨다. 당시에는 잠도 못 자고 일해야 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님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은사스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문수암 증축
은사스님 입적 후 문수암에서 지내던 영수스님은 낡고 퇴락한 문수암을 증축해야겠다는 서원 을 세웠다. 그리고 한 처사님이 당시로는 엄청난 액수였던 500만원을 문수암에 시주하여 불사를 시작했다. 1974년의 일이었다.
처사님은 병이 깊어 큰 수술을 이미 두 번이나 한 뒤였다. 그러나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 죽음을 눈앞에 두고 문수암에 요양차 오신 것이었다. 생활이 어려운 스님이 처사님에게 제대로 공양을 해줄 수 없다고 했지만 괜찮다며 매일같이 문수암에 올라와 끊임없이 기도를 하셨다.
처사님이 세 번째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을 때는 의사도 처사님의 부인도 모두 포기한 상태였 다. 그 누구도 살 가망성이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영수스님은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사님이 수술을 하러 간 날 스님이 꾼 꿈 때문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처사님이 문수암에 오셨고, 영수스님이 샘물에 있는 물을 떠주자 처사님이 맛있게 물을 마시는 꿈이었다. 이 꿈이 길몽이었는지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로 인해 발심한 처사님이 시주를 하신 것이다.
절을 열심히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
스님은 처음 찾아온 사람들에게 무조건 절부터 시킨다. 비록 성철 큰스님께 배운 삼만 배는 아니지만 정성으로 기도하고 절을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초심자들에게 절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절을 열심히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며 백팔배를 시키는데,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보살님들이 많다. 이럴 때마다 스님은 힘을 나누어 절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고, 또한 불교 기초교리와 불법을 배울 수 있는 불교학교에 들어가서 진리를 배우라고 권한다.
영수스님이 들려주신 문수암 영험담
"영험담요? 문수암 얘기를 해 볼까요. 스물 아홉인가 서른인가. 가구점을 하는 어떤 남자가 아파서 저 아래 여관에서 지내다가 ‘헛간이라도 좋으니 여기 와 지내고 싶다’ 해요. 한 달 있다 서울 가서 목 수술한다는데. 이미 세 번 수술한 뒤래요. 다 죽는다고 하여 부인이 여기 와서 삼일 기도한다고 왔어요."
"제 꿈에 가구점을 한 그이가, 오층이 살림집인데 아래 위층을 오르락 내리락하는 꿈을 꾸었어요. 꿈에 문수암 물을 퍼주면서 이 물을 마시면 안 죽는다는 말을 했었어요. 바로 그날 그이 부인이 왔어요. 그래서 꿈 이야기를 했지요.
"(수술하고) 일주일 있다 부인한테서 연락왔어요. 밥 먹고 걷는다고. 그 분이 문수암에 법당 세운다고 하여 반신반의했어요. 축대가 엉클어져 볼 수 없다고 축대나 세워 달랬더니, 공양주 보살에게 그러드래요. “법당 세우는걸 싫어하나 보다”라고. 하여 초파일에 부부가 왔을 때 “큰돈이 드는데, 세울 자신이 있나요”했더니, 74년도에 오백만원을 시주했어요. 당시 모두 천만원 비용이 들었어요"
[출처] 나물먹고 물마시며 다음 블로그(https://blog.daum.net/taoshi/394)
노스님에 대한 효도
영수스님의 노스님인 응조스님은 매우 정직한 분이셨고, 밤낮으로 염불을 많이 하셨다. 은사스님이 자잘한 병치레로 힘들게 돌아가신 반면에 노스님은 건강하셨고 한 번도 앓는 일 없이 편안 하게 입적하셨다.
노스님에 대한 영수스님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노스님은 영수스님을 예뻐하셨다. 영수스님이 어렸을 적에 부엌에 있는 음식을 몰래 먹다가 은사스님께 들켜 혼이 날 때면 노스님이 달려와 자신이 한 것이라며 잘못을 덮어주셨다. 또한 노스님이 염불하고 계실 때 영수스님이 장난을 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염불에 집중하셨고, 장난치고 도망가는 영수스님을 가만히 바라보고 웃기만 하셨다.
영수스님은 선방에 다닐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노스님에 대한 칭찬을 수없이 들었다. 노스님의 정직함을 닮아야 한다는 얘기들이었다. 영수스님은 노스님과 함께 생활한 게 어렸을 때뿐이고 더 오래 모시지 못한 채로 입적에 드신 점이 늘 아쉽고 안타깝다.
보육
영수스님은 그동안 10여 명의 아이들을 키웠는데, 고아였던 아이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웠고 지금은 모두 장성하여 각자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태어난 지 이레밖에 안 된 사내아이를 키운 적이 있었다. 아이가 여덟 살 되던 해에 절에서 공양주를 하시던 할머니가 데리고 나가 신도 호적 앞으로 올려 같이 살게 되었다. 스님은 전격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었고,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나머지 아이들도 자신의 길을 따라 속가에서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고, 이따금 절에 들러 스님의 안부를 물어 오니 그저 감사하고 뿌듯할 뿐이다.
좋은 인연의 소중함
스님은 젊은 시절에 어른스님들이 복잡한 생각 없이 순수한 시절에 도를 알면 다 알 수 있다라고 했던 말을 따라 참선에 열중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참선 정진 중이다.
스님은 성철 큰스님, 정일 큰스님, 경봉 큰스님을 마음속의 선지식으로 삼고 있다. 경봉 큰스님은 영수스님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법명도 지어주었으며 각별한 애정을 보이셨다.
또한 대성암에서 참선 중일 때 매우 인상 깊은 스님이 계셨는데, 이름을 몰라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늘 조용히 선방에 계셨고 솔직한 모습이 보기 좋았으며, 자비로움이 가득했던 그 스님을 자신의 의지사 스님으로 삼고 싶었다고 한다.
신사년 2월, 영수스님은 회갑을 맞아 법회 후 목탁에 맞춰 회심곡을 불렀다. 이날 스님의 회심곡을 들은 모든 신도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인적 없는 동학사 문수암에 밤은 깊은데
새벽을 알리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애절하구나!!
속세에서 모진 인연 끊어 버리고
칠세에 입산수도 출가하여 61년 살아온 인생
이슬같이 사라지고 구름같이 흘러간 무정의 세월
여관에 든 손님 밤이 새면 떠나듯이
잠시 왔다 가는 우리 인생
가는 세월에 70을 바라보며 오늘도 자비로운 목탁 소리
우리 다함께 성불합시다.
우리 다함께 성불합시다.
2004년 영수스님은 문수암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보명(普明)·외선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96~704.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26.
- 나물먹고 물마시며 다음 블로그(https://blog.daum.net/taoshi/394)(원본 : 추만호, 『東鶴寺(誌)』, 우리문화연구원, 2543(1999), p.25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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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暎修)스님 | 본항목 | 영수스님(暎修, 1941~) | 暎修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영수스님(暎修,_194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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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暎修)스님 | 청해(靑海)문중 | ~의 일원이다 |
영수(暎修)스님 | 일현(一賢)스님 | ~의 제자이다 |
영수(暎修)스님 | 동학사 문수암 | ~에서 출가하다 |
영수(暎修)스님 | 경봉(鏡峰)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영수(暎修)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영수(暎修)스님 | 동학사 문수암 | ~을 중창하다 |
지도
- 동학사 문수암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주석
- ↑ 나물먹고 물마시며, 제5부 동학사 회상, 1장 동학사 회상 - 194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후반까지(영수 스님의 회상) https://blog.daum.net/taoshi/394
- ↑ 후원(부엌)에서 밥을 짓는 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