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지성스님(志性, 193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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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31일 (수) 15:28 판



정의

대경(坮熲) 지성(志性)스님은 부도암에서 상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우리나라 대표적인 찬불가를 작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9 대구 출생
1974 동화사 부도암에서 상명(尙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7 통도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글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기 시작
1979 송광사에서 구산(九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불교여성회 창립, 지도법사
1980 통신강원 대교과 졸업
1985 대구 불교한방병원 설립
1992 새 찬불가집 발간
1999 신춘음악회 개최
2004 도정암 주지
2008(?) 입적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행지침 명령하는 주인공은 콧구멍이 없구나.
생활신조 열심히 마음 비우기, 검소하게 살기
저서 및 작품 『나의 연꽃』(불교 가곡집) 외 다수
상훈 청송교도소 감사패(1991) 외 다수
특기 글쓰기(작사)
수계제자 자현(子玄)

활동 및 공헌

출가 전 경전 공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15
[불교한방병원 개원시 일타 큰스님을 모시고]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16
[교가곡출반기념법회]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17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18
[도정암 전경]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wnsdnjs2ek/221552695860

대경(坮熲) 지성(志性)스님은 1939년 10월 27일 대구에서 아버지 박갑수와 어머니 이남이 사이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용순이다.

출가하기 전 스님은 위장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지만 차도가 없자 혼자서 수양차 절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절에서 머물며 기도하던 중에 ‘부처님, 저는 인연이 없어 시집 못 갑니다.’하고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스님의 나이 29세 때였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인연이 되었는지 그렇게도 스님을 힘들게 하던 병이 나았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비로소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경전 공부를 시작하였다. 팔상록을 시작으로 『금강경』과 『응화경』을 읽었는데, 특히 『응화경』 속에는 『열반경』, 『잡아함경』, 『능엄경』 등이 다 들어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읽은 것이 『화엄경』과 『법화경』이었다.

이와 같이 스님은 속가에서 경전을 두루 보았으며, 『능엄경』과 『수심정록』, 『신심명』 등 경전을 보는 동안 7∼8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렀다. 이렇게 경을 보는 가운데 큰스님이신 의상대사께서 가사를 입혀주는 꿈을 꾸었고, 연잎이나 연꽃 송이를 따는 꿈을 연이어 꾸기도 하였다.

그 당시 스님은 기독교 신자였다. 당연히 출가에 뜻을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꿈들을 계속 꾸게 되자 매우 걱정스러웠다. 왜냐하면 출가는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하는 것인 줄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이어지자 스님은 혼자 암자에 들어가 정녕 출가를 해야 한다면 뚜렷한 현몽을 꾸게 해달라고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산대사 책을 부처님 전에 올리고 의상대사를 스승으로 삼아 그 분이 간 길을 자신도 걸어가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성스님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스님은 자신의 신발을 벗어 부처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초가 거의 다 타서 조금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때 허공에서 ‘급하지 않느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꿈에서 깨어난 스님은 비로소 시기가 임박했음을 깨닫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스님은 1974년 대구 동화사 부도암에서 상명스님을 은사로 삭발하였다.

세수 39세 되던 해인 1977년 양산 통도사에서 고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1979년 구산화상을 계사로 송광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만행

스님은 세속에서 경전을 오랫동안 봐왔으므로 강당에서의 공부보다는 마음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향곡 큰스님 등을 찾아다니면서 만행공부를 주로 하였다. 그래서 강당은 다니지 않았으나 스님은 출가 이후 곧바로 만행을 떠났다. 선방도 대중선방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주로 혼자 공부하였다. 그런 이유로 어른 스님들로부터 걱정을 많이 듣곤 했다. 그렇지만 스님은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공부한 것에 대해 나름대로 점검을 받았다.

찬불가 작사

출가 후 누구나 그렇듯이 스님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게송이 떠오르면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 글들을 모아 시집으로 출간하려고 했다. 나중에 찬불가를 작사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화두를 들다가 스쳐가는 생각들, 문득 문득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들을 적어 모았다. 그 글들을 나중에 읽어보면 스스로도 재미나는 게 많았다.

스님은 작사하는 법을 특별히 따로 배우지는 않았다. 작사한 가사들 대부분이 공부하다가 떠오르는 게송들을 풀어서 옮겨 적은 것들이다.

그동안 작곡가들은 스님이 쓴 노랫말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구도하는 수행자가 수행하는 순간순간 느낀 감상을 작곡가들이 수정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스님이 일부러 운율을 맞춰가며 쓰지 않았는데도 손댈 데가 없었다. 묘하게도 작사를 하면 5절이든 10절이든 모두가 저절로 연결이 되곤 하였다.

김용호, 이철혁, 나운파 선생 등 여러 작곡가들이 스님의 노랫말에 다양한 곡을 만들었다. 청소년을 위한 노래가 있는가 하면 운전하면서 들을 수 있는 노래와 찬불가 등도 있다.

작곡가 김용호 선생과의 인연

스님의 글이 노랫말로 빛을 보게 된 것은 불교신도회 박완일 회장과 불교여성회 이승자 회장이 스님의 글을 보고 작곡가 김용호 선생을 소개해준 덕분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스님이 틈틈이 적어 놓았던 글들은 노래로 새롭게 태어났고 주위의 반응이 좋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공부하다가 떠오른 게송을 모아 곡을 부쳐 발표한 것이 제1집이고, 불교방송에 출연할 무렵 제2집이 나왔다. 지성스님은 찬불가 작사 및 보급은 물론이고 포교와 복지 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1979년에는 불교여성회를 창립하여 지도법사로 활동하였다.

서울에서는 찬불가를 비롯하여 웅장한 노래들이 울려 퍼지는데 지방에는 불교 노래가 그다지 전파되지 않은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스님은 ‘나의 연꽃’을 작사하였고, 그 노래는 당시 초파일을 전후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복지 사업을 시작

스님은 불교여성회를 조직한 뒤 부설로 1985년 병원을 건립하고 복지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설립한 것이 대구의 불교한방병원이다. 스님은 병원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나가자 사업은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일반인에게 넘겨주었다.

스님은 서점에 자주 간다고 한다. 스님의 사상과 이상에 맞는 인물들이 서점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를 만나려면 차비와 시간, 기타 여러 조건이 필요하지만 그 사람이 쓴 책은 손쉽게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좋은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위대한 사람들의 정신을 가져올 수 있고, 따뜻한 방안에서 수많은 책을 통하여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며 독서의 즐거움을 예찬한다.

1992년 ‘새 찬불가 집’을 발간한 스님은 1999년 신춘음악회와 ‘지성스님 가곡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약사부처님과 인연이 있어 병원을 짓고 법당에 약사부처님을 모셨지만, 스님은 주로 지장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2004년 경북 칠곡군 도정암 주지를 맡으며 수행 정진 중인 스님의 저서로는 『나의 연꽃』 (불교가곡집) 이 있다. 2008년 이전에 입적하였다. 수계제자로는 자현(子玄)스님이 있다.

‘마음 속 님 찾아’

  깊은 산속 솔향기를
  나의 님 계신 곳에
  산바람이 불어오고
  들꽃 향기 그윽하네
  마음속에 내 님 찾아
  이 산 저 산 헤매면서
  망상 번뇌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법당 앞에 당도하니
  그 마음은 간 곳 없어
  두 손 모아 부처님께
  진심으로 귀의합니다.

  산사 도량 돌고 돌아
  나의 님 계신 곳에
  타향살이 나그네가
  고향집에 돌아오니
  내 마음을 다 받쳐서
  삼보전에 귀의하고
  녹음방초 푸른 향기
  스쳐오는 발아래서
  물길 따라 노래 따라
  방방곡곡 다니면서
  거룩하신 님의 말씀
  노래로써 전합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지성((志性)스님 본항목 지성스님(志性, 1939~2008) 志性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지성스님(志性,_193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지성((志性)스님 법기(法起)문중 ~의 일원이다
지성((志性)스님 상명(尙明)스님 ~의 제자이다
지성((志性)스님 동화사 부도암 ~에서 출가하다
지성((志性)스님 고암(古庵)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지성((志性)스님 구산(九山)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지성((志性)스님 칠곡 도정암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지도

  • 도정암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산32-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