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선광스님(善光, 194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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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haksa.kr/ 동학사]는 대전에 살던 고모를 따라 한 번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구니 스님들은 모두 동학사에서 사시는 줄 알고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스님은 계시지 않았다.
 
[http://www.donghaksa.kr/ 동학사]는 대전에 살던 고모를 따라 한 번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구니 스님들은 모두 동학사에서 사시는 줄 알고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스님은 계시지 않았다.
  
동학사에서 어린 선광스님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0031 미타사]로 보냈고 미타사가 스님의 출가 본사가 되어 장대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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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에서 어린 선광스님을 [[보문동 미타사|보문동 미타사]]로 보냈고 미타사가 스님의 출가 본사가 되어 장대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다.
  
 
==교육==
 
==교육==

2024년 10월 28일 (월) 18:46 기준 최신판



정의

선광(善光)스님은 장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영천사를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9 경북 상주 출생
1958 보문동 미타사에서 장대(藏大)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8 녹원(綠園)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6 운문사 강원 사집과[1] 수료, 전국 선원 안거
1977 영천사 주지 취임
1980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95~1997 법당, 요사채 불사
1999 영천사 주지, 지역사회에서 포교
2004 영천사 주지
문중 수정(水晶)문중
수행지침 포교를 해야 한다.
생활신조 불우한 이웃을 보살핀다.
상훈 내무부장관 표창장(1994) 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묘각(妙覺)·묘법(妙法)·묘덕(妙德)·묘진(妙眞)·묘상(妙想)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두전(斗典, 6)→윤형(允亨, 7)→계주(季珠, 8)→장대(藏大, 9)→선광(善光, 10)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33
[영천사 대중]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34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36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37

선광(善光)스님은 1949년 음력 2월 2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유곡리 농가에서 아버지 박일묵과 어머니 이명심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영순이다. 국민학교 다니던 어느 해 가을, 떡을 먹고 체하여 병이 난 스님은 1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어린 마음에도 절에 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만 같은 간절한 생각이 들어 절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계시는 비구니 스님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겨 그 스님을 따라간다고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할머니가 뒤를 쫓아오셔서 하는 수 없이 할머니를 피해 비구니스님과 함께 도망을 갔다. 당시 스님이 살던 시골은 십 리를 걸어가야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어린 선광스님이 비구니 스님의 손을 잡고 산길을 걸어 부지런히 도망을 치는데 외삼촌이 자전거를 타고 뒤쫓아와 붙들려 가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절에 가 있다 보니 자연히 몸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이에 스님은 삼촌의 돈을 몰래 훔쳐 무작정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 비구니 스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 무턱대고 동학사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동학사는 대전에 살던 고모를 따라 한 번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구니 스님들은 모두 동학사에서 사시는 줄 알고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스님은 계시지 않았다.

동학사에서 어린 선광스님을 보문동 미타사로 보냈고 미타사가 스님의 출가 본사가 되어 장대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다.

교육

당시 스님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심부름을 주로 하였다. 18세에 운문사 강원에서 사집[2]까지 마치고 십여 년 동안 제방을 다니며 참선 수행을 하다가 은사스님이 위암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영천사 주지를 맡다

은사스님 곁으로 돌아온 스님은 은사스님 시봉하랴 아이들 돌보랴 정신없이 지내는데, 월정사 주지스님이 은사스님의 병문안을 오셨다가 고생하는 선광스님을 보고 걱정을 해주셨다. 그 뒤 은사스님이 돌아가시고 장례식에 참석한 월정사 주지스님이 영천사 주지 임명장을 내려주셨다.

은사스님이 키우던 세 아이들은 스님이 맡아 보살피게 되었다. 선광스님은 아이들을 정성스럽게 키웠다. 그러다 보니 스님에 대한 칭찬이 인근에 자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하나 둘씩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30여 명이나 되었다. 식솔들이 늘어감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하숙생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 그만두고 메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님은 아이들이 원하면 학교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보내려고 애썼다. 상급학교에 시험을 봐서 떨어지면 도리가 없지만 시험에 합격하면 무조건 다 보냈다. 이렇게 아이들과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던 스님은 1986년 원주시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아이들에게 불심을 심어주기 시작하였다.

바쁜 와중에도 스님은 틈틈이 교도소, 양로원 등을 찾아다니며 자비를 베풀었고, 지역사회에서 그 공을 인정받아 많은 감사패를 받았다.

영천사는 오래된 고찰이었지만 그동안 가람을 돌보지 못해 무척 쇠락해 있어서 스님은 불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주스님, 엄마스님

선광스님은 1995년 법당과 요사채 불사를 동시에 진행하게 되었다. 불사를 하기 위해 바자회를 개최하여 손수 농사를 지은 참깨며 들깨, 콩, 땅콩 등을 20가마나 팔았다. 그리고 직접 쑥을 뜯어다가 쑥개떡과 왕송편 등을 팔아서 불사를 하였다.

불사를 하는 중에도 스님은 여전히 사회의 어려운 곳을 돌보는 것을 잊지 않고 팥죽을 쑤어 나누어주는 등 헌신적인 보살행을 펼쳤다.

스님은 선광이란 법명보다 메주스님이라는 별명을 더 좋아하고 엄마스님이라고 불러주면 더욱 더 흐뭇해한다. “해마다 50가마의 콩으로 메주를 쑤어 아이들의 학비를 마련하였어요. 메주 팔아 얼마나 남겠어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하나둘 늘고 하루 세 때 끼니를 걱정할 형편이다 보니 보육비가 넉넉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스님의 메주장사는 이제 금덩이보다 더 귀한 메주가 되었다.

스님은 지금도 5천여 평의 드넓은 밭에 깨와 콩 그리고 땅콩 등을 손수 경작하여 가을에는 바자회를 하고 있다. 소외된 이웃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 스님의 작은 소망이다.

수계제자로는 묘각(妙覺)·묘법(妙法)·묘덕(妙德)·묘진(妙眞)·묘상(妙想)스님 등이 있다.

원주 영천사

[영천사] 사진출처: 다음백과, 영천사(원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337539

영천사의 창건주는 나옹스님이라고 전해지는데,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사찰 입구에 있는 군부 대 자리가 본래의 터라고 한다. 비구니 묘각스님의 사리탑과 나옹스님 사리탑이 그곳에 있는데, 어느 시대인지 정확한 고증은 없는 상황이다. 영천사는 고려 중엽에 창건된 절로 추정되며, 현재의 위치와 인근 일대를 절골이라고 부른다.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로는 배례석拜禮石과 광배光背가 있다. 배례석은 1.23m, 0.6m의 규모로 전후 면에는 4구의 안상眼象이 있고, 양측에는 2구씩의 안상이 있으며 상면에는 연화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배례석의 용도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서울로 옮겨진 보제존자普濟尊者 사리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광배는 최근에 신축한 대웅전 공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두 개 의 광배가 여러 조각으로 파편화된 상태로 남아 있다. 현재의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 등이 있으며 공사관계로 지금은 매몰되었지만 장방형의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한편 이곳에서 1915년에 영전사지令傳寺址 보제존자 사리탑 2기가 서울로 옮겨졌다고 하지만 원래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 원천석元天錫의 『운곡행록谷行錄』에는 영천사법화법석권화시靈 泉寺法華法席漸化詩와 영천사에 대한 시가 여러 수 전해지고 있다. 선광스님은 1997년 불사를 완공 하여 영천사를 새로운 가람으로 변모시켰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52~55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248.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99, 404.
  • 불교신문, 전국비구니회 전북·강원지회 출범 (2016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51
  • 경기 데일리, 좋은 샘물로 유명한 원주 영천사(靈泉寺) (2016년) http://www.ggdaily.kr/73158
  • 원주 투데이, 영천사, '미망의 시간' 특별전 (2017년) http://m.wonju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167
  • 지역N문화, 사리를 나누어 세운 부도탑, 영천사(영전사) 삼층석탑https://ncms.nculture.org/stonecraft/story/519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선광(善光)스님 본항목 선광스님(善光, 1949~) 善光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선광스님(善光,_194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선광스님(善光) 수정문중(水晶) ~의 일원이다
선광스님(善光) 장대스님(藏大) ~의 수계제자이다
선광스님(善光) 보문동 미타사 ~에서 출가하다
선광스님(善光) 녹원스님(綠園)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선광스님(善光)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선광스님(善光) 원주 영천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선광스님(善光) 원주 영천사 ~을(를) 중창하다
선광스님(善光) 안거 ~을(를) 성만하다 전국 선원

지도

  • 영천사 : 강원도 원주시 태장동 122-1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선종에서 중시하는 것으로, 불교를 학습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네 가지 책. 곧 《서장(書狀)》, 《도서(都書)》, 《선요(禪要)》, 《절요(節要)》를 이른다.
  2. 선종에서 중시하는 것으로, 불교를 학습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네 가지 책. 곧 《서장(書狀)》, 《도서(都書)》, 《선요(禪要)》, 《절요(節要)》를 이른다.